첫째날(8/15)
순안-4.25문화회관-개선문-천리마동상-옥류관-옥류교옆-대동문-민속박물관-조선중앙역사박물관-대동강호텔, 해방산호텔-국립극장-당창건기념관-고려호텔
1250 김포출발
1300 이륙
1354 평양공항 착륙
1700 단체상봉
2000 인민문화궁전만찬
고려항공. IL62, 폭이 좁고 긴 형체. 냉방 탓인지 물이 천장에서 뚝뚝 떨어짐.
녹색 시트, 좌석은 좁은편. 기내 음악은 북 민요. 물수건, 금강산 샘물. 마분지 같은 지질로 만든 위생봉투.
기내가 좁습니다. 기자동지 여러분 함축해서 앉아주십시오.
167cm 수줍은 미소가 눈에 띄는 승무원 윤경희 22세.
위생실. 안내문구-담배를 피우지 마시오. 박띠를 매시오.
서울-평양 541km, 고도 7,500m 비행소요시간 1시간.
평양 기온 26도. 착륙 직전 아나운스멘트
꿈결에도 그립던 혈육과의 뜨거운 상봉을 바랍니다.
장재언 북적위원장, 최원식 평양시민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평양공항, 100여명 정도의 환영인파. 착륙 전 소나기가 내린 듯 활주로가 젖어있었음. 평양 시내 진입 전까지는 시민들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방북단 차량을 쳐다보는 듯 싶더니 평양 시내로 들어가자 간혹 시민들이 손을 흔드는 모습.
판문점 통일각 가는 길목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대형 벽화가 순안 평양비행장을 벗어나자 마자 거대하게 버티고 있었음-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슬로건.
평양 시내 진입-조선은 하나다.
4.25문화회관-tv송신탑-평내면옥-개선문-김일성경기장-개선영화관-서평양백화점-모란봉-천리마동상-조선혁명박물관-학생소년궁전-평양대극장-만수대예술극장-1백화점-인민대학습당-김일성광장-로동신문-고려호텔
고려호텔-창광거리에 위치. 쌍둥이 빌딩으로 건립. 45층. 높이 140m, 총건평 8만4천평방미터.
1985년부터 영업 개시. 500객실. 호텔 앞 창광식당, 릉라식당 등.
평양 시내, 미용 리발, 체신소 등 표지판, 늘 화면을 통해 보던 교통 안내원.
안내원 라운석민경련(민족경제협력연합회) 참사.
지난번 장관급회담 참석 경험. 남측에 대해 잘 꿰고 있는 듯한 말투. 사회주의에서 관료들이란 나무의 그늘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늘이 커야 인민들이 잘 쉴 수 있다. 그런데 권위주의에 빠지면 오히려 잎을 갉아먹는 기생충이 된다, 라며 우리식 사회주의에 대해 강조. 아버님 고향이 평양이라고 말하자 관심을 가짐.
단체상봉-당초 예상했던 이선행 이송자 부부는 야마가 되지 못함. 따로 떨어져 상봉한데다가 이선행 할아버지 예상외로 덤덤.
이선행 할아버지의 부인 홍계옥 할머니 왈, 위대한 장군님의 배려로 이렇개 만나게 해주시니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취재팀들 당황. 이리저리 뛰며 취재. 갑자기 상봉장 입구 쪽에 통곡소리가 들려옴.
김장녀 할머니 딸과의 상봉 감격적.
두 모녀가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에서 자꾸 아내와 다희의 모습이 오버랩. 눈물이 쏟아져 나와 취재에 애를 먹음. 딸의 통곡, 어머니의 눈물.
홀몸으로 만난 딸
[앵커멘트]
“어머니 보고싶었어요. 왜 이제 오셨어요.”
딸의 통곡과 어머니의 오열.
반세기만에 만난 모녀의 상봉은 평양 고려호텔에 마련된 단체상봉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리포트원고]
[싱크-이렇게 만날 줄 믿었어요, 내가. 왜 인제왔어요, 그리웠어요]
기억할 수 없는 어머니의 얼굴, 그리고 아가의 모습으로만 남아있는 딸에 대한 기억.
모녀는 마침내 바닥으로 쓰러져 부둥켜않고 오열했습니다.
1946년, 네 살난 딸을 황해도 친정에 두고 남편과 춘천으로 온 뒤 전쟁이 터져 생이별을 한 일흔아홉살 김장녀 할머니는 딸의 울부짖음에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싱크-어머니와 딸]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의 얼굴이지만 살아 생전 소원이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었다는 딸 앞에
김 할머니는 미안하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는 말만 되풀이 했고 딸은 이어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을 키워준 삼촌마저 세상을 떴다며 눈물을 그치지 못했습니다.
헤어질 당시 딸과 함께 두고 온 아들의 안부를 묻자 오빠는 전쟁 중에 죽었다며 딸은 또 한차례 오열했고 순간, 김할머니는 망연자실했습니다.
함께 월남한 남편마저 15년 전에 세상은 뜬 뒤 홀몸으로 살아온 김할머니에게
딸은 54년만에 새롭게 찾은 혈육이었습니다.
[크로징]
부둥켜 안고 통곡을 한들 이산의 아픔이 온전하게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분단에서 화해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이들에게 오늘밤은 평생을 다바쳐도 아깝지 않은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인민문화궁전 만찬. 사회주의 국가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 천장이 높고 웅장한 분위기, 그러나 왠지 한편으로 썰렁한.
낯익은 북측 인사들. 평양신문 박형철 기자를 조우. 정상회담 준비접촉 당시 만났던 친구, 인터뷰를 하자고 했으나, 안된다고 거절.
테이블에 함께한 민경련 인사 한명, 노동신문 김흥교 선생-정상회담 준비접촉 당시 북측 단장, 그외에 북적 관계자 한명. 김선생, 특유의 북한 어투로 계속 술을 권함. 술을 마셔야 기사가 더 잘 써진다니, 기자선생이 술을 못마신다느니, 등등 하며 갈구길래, 세상에 팔불출 팔불출 해야 술 잘마신다고 자랑하는 자만큼 더 한 팔불출이 없는 거라고 우리 아버님이 말씀하시더라고 했더니 조금 조용해짐
평양은 어두웠다. 울란바타르가 생각남.
프레스센타에 네스카페 커피 비치.
새벽 1시 취침
둘쨋날(8/16)
고려호텔-대동강선착장-대동강-양각섬(양각도호텔)-쑥섬-만경대 선착장-하선-만경대-청춘거리(체육촌)-보통강역-낙원거리-서평양호텔-4.25문화관-김일성 종합대학-단군릉-고려호텔
오전 7시 기상.
호텔 2층 식당에서 아침 식사
국밥, 장조림, 룡성 배단물, 신덕샘물, 케익, 자두, 호박무침, 더덕, 김,
개별 상봉 취재-이환일, 한재일, 채성신, 최경길, 최태현, 최성국
‘아내는 말이 없었다’ 리포트 제작.
침묵보다 더 진한 감정표현은 없다. 통곡보다 더 큰 침묵의 진실.
“위대한 장군님의 배려로 이렇게 만나게 됐다.” 라고 말할 때 보다 아무 말 없었을 때 전달되는 진실의 의미.
최태현 할아버지 아들-뭔가 못마땅한 표정, 기자들이 들어가자 선물을 꺼내러 가는데, 아버지 좀 가만 앉아 있으라우요, 선물을 건네자, 시계는 무슨, 저도 있어요.
최성록 할아버지 딸-50년만에 만난 것은 모두 장군님의 덕분이 아니게겠어요. 통일이 되는 그날을 위해.....딸의 말을 들은 최 할아버지는 그래, 나는 남측이니까, 김대중 대통령께 감사하고.....85년도 지학순 주교의 수화의 이산가족 이란 표현이 떠오름.
아내는 말이 없었다
[앵커멘트]
상봉에 맺힌 사연은 저마다 드라마같은 내용이지만 그 가운데 부부 상봉은 당사자들의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반세기 동안 쌓인 그리움의 표현은 그러나 통곡이나 오열이 아닌 침묵이었습니다.
[리포트 원고]
[effect-최태현 할아버지 상봉 현장]
아내는 말이없었습니다.
반세기 만에 만난 아내,
곱고 희던 섬섬옥수는 어느새 거칠게 변했고 검은 머리는 파뿌리가 됐습니다.
열네살 때 결혼해 꼬마신랑 대접을 받으며 신혼을 보낸 예순아홉살 최태현 할아버지.
두 살 더 많은 누님같던 아내는 50년 세월에 옛모습을 잃었습니다.
눈물 대신 흐르는 침묵,
최할아버지는 재회를 기약할 수 없었던지 선물로 가져온 시계를 아내의 손목에 채워주며
건전지까지 건넸습니다.
[최태현 싱크-이거 하나끼우면 1년반 내지 2년은 가]
두명의 딸과 함께 아내를 만난 최성록 할아버지는 자식들 앞에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애써 가족들의 안부를 거듭 묻기만 합니다.
[최성록 싱크-그래, 누가 지금 살아있다구? 아! 그랬어...]
그러나 반세기만에 아내의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줄 때 최할아버지는 더 이상 슬픔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최성록 싱크-이 손좀 봐, 당신한테 뭐라 말을 못하겠어. 내가 죄인이야, 나를 용서해줘요!]
[크로징]
이번 방문단 가운데 아내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열일곱명.
남편의 탄식보다 더 큰 아내의 침묵으로 이곳 고려호텔은 단체상봉 이후 또한차례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점심 식사후 오후 3시 대동강. 170m 주체탑. 150m 높이의 분수.
평양이 고향인 이산가족 할아버지 할머니 선상에서 옛고향 기억하며 환담하는 모습.
임선근 할아버지- 순안이 고향인데 평양공업 실습학교에 다녔다. 해방전엔 대동교하나와 철교만이 유일한 다리였는데 그 때 당시 일부가 결빙돼 있었다. 6/25때 끊기는 바람에 도강에 어려움 많았다. 겨울철에 도강할 때 어려움 많았다. 12월 5일 이었는데 일부는 해빙이 되기도 해서 정말 곤란했다. 평양은 정말 많이 변했는데 그저 변하지 않은 것은 만수대 언덕과 칠성문 정도인 것 같다.
대동강에서 바라보는 평양 시가지는 고려호텔과 유경호텔을 대척점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도시라는 인상을 받음. 김동욱왈, 그들만의 도시.
1시간 반을 유람한 뒤 만경대 구역에 도착.광복거리에서 청춘거리로.
광복거리는 지난 89년에 진행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앞두고 건설된 계획도시.
놀이시설인 만경대 유희장은 모든 기구가 올 스톱. 안내원 왈, 목요점검있는 날이어서 가동이 되지 않고 있다는 설명. 우리 청룡열차 같은 기구의 레일 위에 멈춰선 기차. 멈춘 성장?
만경대가 있는 광복거리를 거쳐 체육시설이 밀집돼 있는 청춘거리. 1988년 9월3일 준공.
청춘거리는 26만 7천 평방미터에 축구경기장과 9개의 종목별 실내경기관, 피로회복관,체육인식당, 호텔이 밀집.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엄마가 어린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해 건축했다는 설명을 듣고 보니, 아주 그럴싸했음.
김주석 생가를 지나쳐 체육시설이 밀집돼 있는 거리를 거쳐 단군릉.
단군릉-평양 체류일정의 둘쨋날 참관행사 하이라이트인 단군릉 참관은 이산가족들에게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민족 단일성을 강조하기 위한 북측의 배려에서 마련된 행사인 듯.
평양시내에서 승용차로 40여분 떨어진 평양시 강동군 문홍리 대박산 기슭에 위치한 단군릉은 북측이 단일민족 강조를 위해 역사적인 문화재 발굴한 사실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명소.
이미 단군 관련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남측 학술단체 등과도 교류를 하고 있다고 북측 관리가 전했다. 참관에 앞서 기자와 동행한 리유선 민화협 연구위원은 단군에 대한 역사적인 재평가와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는 점을 수차례 강조. 그는 일제시대 민족말살정책 차원에서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금기시하는 풍토로 인해 단군에 대한 평가가 절하됐다고 설명.
북측은 1993년 단군릉발굴에 착수, 단군과 단군의 부인 유골을 발굴했으며 이를 정밀한 측정을 통해 5011전 것으로 확인했다고 설명. 북측은 당시의 유골 일부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원인으로 대박산 기슭 일대가 화석화 지대이면서 가열성 광물층이 남아있는 지층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설.
45헥타아르의 면적에 마련된 단군릉 초입에 들어서면 높이가 70m에 이르는 단군릉이 우뚝 솟아있다.
초입에 버티고 좌우 다섯 개씩 서있는 문기둥은 고인돌을 연상케하는 거대한 돌조각상으로 제작된 것으로 최고 10m 높이에서부터 최저 1.5m높이까지 모두 열 개가 자리잡고 있다.
문기둥을 통과하면 석인상 구역이 나타나는데 치산치수와 지방사업 등을 관장하는 8명의 신하들이 버티고 있고 이들을 지나치면 네명의 단군 아들이 릉을 지키고 있다. 릉에서 내려오는 순서대로 왼쪽편에 맏아들 부루와 셋째아들 부우, 오른쪽 편으로 둘째아들 부소와 넷째아들 부여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석인상 구역을 통과하면 무덤구역이 나타난다.
단군릉과 그 앞에 상돌, 분향로가 자리잡고 있고, 릉앞의 좌우 양쪽에 두 개의 망주석과 석등 네모서리에 네 개의 범상과 청동검탑이 세워져 있다.
릉은 고유한 조선식 건축슬과 전통적인 조선식돌계단 무덤형식에 맞게 9개의 돌계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무덤 안에는 단군부부의 유골이 발굴된 부분을 연이어서 복원한 상태로 유리관안에 보존돼 있다. 유리관 안에 아르곤 가스를 주입해 보존상태를 유지한다는 설명.
돌아오는 길 김일성 광장에 학생들 가득 모여 메스게임 연습하는 모습.
안내원 왈, 얘들이 저거 한번하면 키가 부쩍 커요. 운동도 되고 아주 좋아요. 현상을 바라보는 이 격차!
평양의 거리 특징-인적이 뜸한 듯 싶다가 길목을 돌아서면,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식. 개인은 없고 집단만 존재하는 느낌. totalism. 물론 대동강 변의 한가한 시민들의 모습, 공원 벤취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평양은 말고 깨끗함과 썰렁함과 규격화된 도시라는 인상.
저녁8시 조선중앙 tv 시청하는 고려호텔 매대 점원. 눈물을 글썽이며 tv시청하는 모습. 점원 김금련 인터뷰-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어서 빨리 통일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임수경 언니도 생각나구......
저녁식사 후 일 종료 11시. 호텔 지하 가라오케. 민경련 참사 라운석, 한인덕 등.
휘파람, 반갑습니다 말고 평양에서 부르는 비틀즈, can't take my eyes off you, 그리고 아침이슬. 평양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노래를! 그 어떤 정치적 통제도 문화의 유입을 막을 수 없다.
새벽 1시 헤어지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북측 안내원에게 서의동 한 마디-빨리 통일합시다.
라운석 참사-이제 평양에선 kbs보다 ytn 더 알아줘요. 지난번 장관급회담 때 전금진 단장이 ytn 틀어봐라 했어요. 아주 좋습디다. 띄워 줄려구 하는 멘트였으나, 어찌됐든, 지난 장관급회담 당시 신라호텔에서 ytn을 보긴 본 모양.
유영규 마사지 후 일성-안마사에 직업에 대한 사회적 status 인식이 없더라. 한의사 정도로 인식. 요는, 비교의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셋쨋날(8/17)
호텔-주체사상탑-청년중앙회관 춘향전 참관-옥류관
오전 일정 개별상봉 팀과 주체사상탑 참관팀. 서의동과 참관팀에 합류.
주체사상탑-1982년 4월15일 제막. 170m. 위부분 목화높이만 20m. 김일성 주석 탄생 70돌 맞아 건립. 70년을 날 수로 계산해 25,550개 화강석으로 제막. 단수는 앞뒷면 18개씩, 좌우 17개씩해서 일흔계단은 일흔살 상징. 입구에 각국으로부터 온 기념석을 붙여놓음.
안내원 진옥순(45. 주체사상탑, 개선문 관리 강사)
모래지층이어서 탑 건립에는 적당치 않았으나 김 주석께서 장소를 정해주신 뒤 땅을 파보니 거대한 암반층이 나왔다며, 천길 땅 속도 훤히 들여다보니는 위인이라고 설명. 주체!!!??
엘리베이터 ㅈ-ㄱ-1-2-3-4-5-6-7-8로 층 표시. ㅈ은 지하, ㄱ은 기단을 의미한다고.
전망대에 오르자 평양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옴.
리포트.
눈에 밟히는 고향
[앵커멘트]
기다려온 반세기를 생각할 때, 순간 같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이번 방문일정 동안 북측은 방문단에게 평양 곳곳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방문단들은 평양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승리거리를 비롯해 신시가지인 광복거리와 청춘거리를 둘러봤고 대동강을 유람하며 향수에 젖기도 했습니다.
[리포트원고]
반세기 전 대동강을 건널 때 평양의 모습은 지금 몰라보게 변했지만 실향의 세월을 달랜
향수는 여전했습니다.
대동강철교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평양 중심부를 흐르는 대동강엔 그동안 옥류교와 능라교 등 네 개의 다리가 더 들어섰습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평양.
숲으로 뒤덮인 모란봉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이지만 곳곳에 들어선 고층건물로 평양은 이미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뿔처럼 솟아오른 324m의 105층 유경호텔과 방문단 숙소인 고려호텔은 먼발치 어느 곳에서나 눈에 들어오는 초고층 건물로 이정표 구실을 합니다.
낙하산처럼 펼쳐진 능라도경기장과 대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인민대학습당,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방문단 환송연 장소인 옥류관의 청기와 지붕은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인터뷰/진옥순(관광안내)-저기 저곳이 양의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양각도라고 부르지요....]
[effect-(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넣어주십시요)17일 오후 대동강 유람선에서 평양이 고향인 3명이 서서 여기가 어디, 저기가 어디 하는 모습]
눈에 밟히는 오늘의 평양을 바라보며 이산가족들은 흩어짐의 세월이 그만큼 길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차례 절감합니다.
[크로징]
옛고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평양 곳곳을 둘러본 방문단은 그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남과북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음을 실감했습니다.
관람 후 방명록을 내놓으며 한 줄 쓰라고 권하길래 앞부분을 뒤적여봤더니, 박지원 장관의 친필도 있었음.
-어릴적 듣던 아버님의 고향을 직접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돼 무척 고맙고 반갑습니다. 서울과 평양이 이웃처럼 왔다갔다 할 수 있게되길 빕니다,라고 씀.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개인 안내역을 맡은 민화협 리유선 연구위원이 질문.
아버님이 평양 분이신가 보죠?
-네, 순창이시죠. 아버님이 두고 오신 고향은 아들이 먼저 찾아오는 불효를 범한 셈이에요,라고 답변.
또 다른 질문-남한에서 가장 유명한 언론인은? 김대중 주필 아닌가요? 하길래.
영양력있는 신문의 주필이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요즘엔 꼭 그렇지도 않아요. 특히 최근 남북 관계 분위기에서는 김 주필 같은 사람들은 비난도 많이 받지요.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사람이 지금 비난을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그래, 그것 봐라, 하며 박수를 칠 일이 아니라, 남한 사회에는 소위 반통일 세력이라 해서 하루 아침에 몰아쳐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역시 환영받지 못한다는 다양성의 인정이에요. 그렇구만요,라고 답변하며 고개를 끄덕.
오후 청년중앙회관에서 춘향전 관람.
극장 안에 들어서자 북한 특유의 박수로 방문단을 환영. 형식적이라기보다는 마음이 우러나는 환영으로 느껴짐. 극장 정면 중앙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더욱 철저히 무장하자’ 좌우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곁에 계신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님을 결사 옹위하자’
무대커튼-초록색 나무와 그 위로 은하수, 별이 그려져 있는 괜찮은 분위기의 그림.
춘향전은 김일성 훈장을 수상했다는 국립민족예술단의 공연.
무대와 객석 사이에 연주단.
사랑사랑 내사랑아로 오프닝이 흐르며 커다란 푸른색 대형부채가 우에서 좌로 흘러 나오며 붉은 글씨로 춘향전. 제1장 광한루의 봄. 1장 마감 무렵 '빈부귀천 원쑤로다'.
유영구 리포트-정서는 하나.
김원찬 할아버지 소감-50년 전 흥남에서 이런 가극을 봤거든, 견우와 직녀였는데 옛날 생각난다.
공연관람 후 환송만찬장으로 이동 중 버스 안에서 라 선생이 말을 걸어옴.
-선생 어떻습디까?
아주 잘봤습니다. 개인적으로 공연 좋아하게든요
-아 그래요,
춘향전이 사실 사랑이야기지만 그 안에 다 있잖아요. 계급 타파같은 메시지도 있고
-그렇지요. 그 안에 모든 거이 다 있지요.(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발언을 하면 어린아이 같은 눈빛으로 사람을 대한다)
러시아 문학에 푹 빠졌던 적 있었거든요
-그래요?
특히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제 꿈이 정년 이후 말년에 그의 작품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겁니다.
-어떤 작품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가난한 사람들, 백야...
-아! 백야도 읽으셨군요
라 선생은 백야를 읽었다는 말에 거의 동지애를 느끼는 표정으로 반가워했다.
옥류관으로 가는 길에 당 탑을 지나침. 망치와 붓, 낫을 움켜쥐고 있는 형상을 한 석상.
조선인민의 모든 승리의조직자이며 향도자인 조선노동당 만세라는 구호.
당이 지배하는 시스템의 일단을 엿봄.
아파트 촌을 지나침. 아파트 옥상에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
대동강 공급소란 간판에는 탁아소 유치소라는 간판.
금릉동굴 통과. 동굴 위가 모란봉이라는 설명.
옥류관에서의 만찬. 평양시 인민위원회 량만길 위원장 주최.
본관이 1960년대에 지어진 부속건물까지 모두 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대형 식당.
냉면 15원. 7불 정도.
평양냉면의 맛보다는 최경길 할아버지의 말이 뇌리에 박힘.
-마누라가 내일이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앞으로 서신교환이라도 했음 좋겠어.
저녁 리포트 마감 뒤 지하 가라오케에서 장 총재 주관하는 술자리.
노래하는 사람들이 2불씩 내자, 여 접대원 왈, ‘여기는 아직 이런 체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 이건 아주 중요한 인식이다. ‘아직’이란 표현에 담긴, 내일의 변화 가능성!
울란바타르의 모습이 오버랩. 사회주의 그 이후 10년을 눈으로 목격한 울란바타르 기억이 새삼스러움. 울란바타르 시가지 벽에 써있던 낙서 ‘Nirvana kurt cobain 1967-1994’ 같은 젊은 목소리가 평양 시가지 어느 벽 모퉁이에 낙서로 등장하기 시작하면 이 곳도 변화하기 시작하리라. american graffiti 같은. 변화에 대한 무조건 적인 긍정은 아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지니지 못한 숱한 장점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문제는 ‘우리식’ 운운하는 도그마 인데, 하긴 과거 우리도 ‘한국적 민주주의’라며 세상과는 담 쌓고 살았었으니까.
아랫 것들 일지 감치들 도망가고, 북측 인사들도 사라지고, 이선재 선배, 박정규 본부장과 최후의 3인으로 남음. 그동안 소극적으로 기자들은 대한 것에 대한 박 본부장의 사과.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 조용히 지내고 싶었으나 늘 그렇듯 세상은, 개인을 허락하지 않음.
네쨋날(8/18)
고려호텔-평양 공항-서울
오전 8시 프레스센타 집결. 서울로 가져갈 선물로 술 몇 병 삼. 복무원이 거스름돈을 주는데 자투리를 영광담배로 주길래 안피면 어떻게요 했더니, 그냥, 기념으로 간직하세요.
호텔2층에서 아침 식사.
여 종업원에게 동무와 동지의 차이점이 뭐냐고 질문.
-그저 흔히들 동무라고 부르지요. 우리같은 사람들은 동지라는 말 거의 안써요. 동지라는 것은 뭐랄까, 동지,라고 일단 말을 하면 어금니 양쪽이 뻐근해지는 느낌이 전해올 정도로 뭔가 비장하고 그렇거든요, 그럴 때 쓰는 호칭이라 우리같은 사람들은 거의 쓸 경우가 없지요.
10시10분부터 호텔로비에서 마지막 작별 상봉. 헤어짐을 앞두고 또다시 눈물바다. 고려호텔 직원들도 슬픔을 참지 못하는 듯 눈물. 차창을 사이에 둔 또 다른 이별. 내 이제 너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치매에 걸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던 최경길 할아버지의 아내, 말없이 그저 한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음. 아들-아부지가 가지 않으면 어무이가 저렇게까지 되갔어?
이 마르지 않는 눈물들
헤어지고, 만나고, 또 다시 헤어지고!
세상에는 이렇게 헤어지기 위한 만남도 있습니다, 라는 표현을 써야겠다고 생각.
평양공항.
북측 안내원들과의 이별. 얼굴이 익숙해진 탓인지 이젠 서로들 자유롭게 농담까지.
북측 이산가족들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음.
활주로에서의 기념촬영.
기내 인터뷰-이재경 할아버지-이젠 마음의 장벽을 허물 때가 왔어.
김포도착.
KE818 PYONG YANG라는 사인이 그리 낯설지 않게 눈에 들어옴.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느낀 내 젊은 날, 그 이후, 내 눈과 귀를 타고 내 머리로 들어와 걸러지고 걸러진 뒤 마침내 내 가슴에 들어온, 그러나 평소에 선뜻 떠오르지 않던 헤어짐과 만남에 관한 그 모오든 문장을 지난 나흘 간 모두 소진해버린 뒤.....세상이 쬐끔, 기우뚱해 보이다.
사족-이산가족 취재의 현장을 서술어로 스케치하는데 개인의 역량이 미치지 못함을
솔직히 고백해야겠음. 실제로 평양 취재 당시 방송스타일 구어체의 기사 작성에 몹시
애를 먹음. 명사형으로 뚝뚝 끊기기만 하는 이 목메어오는 감성! 기자의 기본 덕목인
냉철한 이성의 끈을 가능한 한 놓지 않으려 했으나 주체할 수 없는 감성의 벽앞에서
번번히 주저앉았음. 이산의 한이 풀리게 되는 날 쉽게 쉽게 기사도 쓰여질 수 있게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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