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가 ‘원전제로’를 내걸고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 총리의 도쿄도지사 출마를 지원하고 나섰을 때 많은 이들은 고이즈미가 야권재편 같은 정치적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것 아니냐고 관측했다. 사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이즈미의 지난해부터의 행적을 살펴본다면 ‘정치적’이란 단어만으로는 그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부족하다. 정계 은퇴 이후에도 ‘라스트 보스’라며 그를 추앙해온 자민당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고이즈미가 ‘탈핵’을 들고 나온 과정은 음미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고이즈미는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 이후 꽤 오랜 기간 일본의 에너지 문제를 고민해왔던 것 같다. 지난해 8월 세계 유일의 핵폐기물 처분장인 핀란드의 ‘온카로’를 방문해서는 지하 400m의 암반에 구멍을 뚫어서 만든 시설에 핵폐기물을 10만년간 밀봉 상태로 보관해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절망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지금은 위험한 핵폐기물이라는 표지를 해놓겠지만, 지금 쓰는 언어가 10만년 후 인류에게 통할까. 인간이란 호기심이 많아 핵폐기물인지 모르고 파볼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핵의 위험성을 후세에 전할 수 있을까.”(지난해 11월12일 일본 기자클럽 강연)
‘지산지소’(地産地消), 즉 지역의 전력을 충당할 수준의 소규모 재생에너지 회사들의 운영실태를 견학하기 위해 독일도 방문했다. 지난해 10월에는 도쿄 도심에 최근 지어진 시미즈(淸水)건설 사옥을 찾아 태양광패널과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이 설치돼 구 사옥에 비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70% 줄였다는 설명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석탄 화력 발전 과정의 대기오염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기술개발이 진행 중이라는 기업인들의 이야기도 청취했다. 총리 시절 원전 추진론자였던 그가 ‘원전제로’를 외치게 된 데는 이런 모색의 과정에서 탈핵의 절박함과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은퇴한 무사가 무뎌진 칼을 공들여 벼리며 출전의 각오를 다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 정치사에서 드물게 5년5개월간 총리를 지내며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다 은퇴한 그가 선거 출마도 아닌, 후보 지원에 나서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 선거는 ‘정치적 제자’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의 승부이기도 하다. 선거(2월9일)를 보름여 앞둔 현 시점에서 판세는 자민당이 지원하는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후보가 호소카와 후보를 크게 리드하고 있다. 질 경우 고이즈미의 정치인생에는 큰 오점이 남게 된다. 그가 선거에 임하는 결의를 도쿠가와 시대의 ‘추신구라(忠臣藏)’사건에 비유한 것은 이런 위험성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1703년 아코(赤穗)번의 무사 47명이 막부관료와의 싸움에서 밀려 자결을 강요당한 주군의 복수를 하고 전원 할복한 추신구라 사건처럼 ‘옥쇄’마저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고이즈미는 재임 중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사회격차를 키웠고, 자위대를 이라크 전장에 보내 평화주의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자민당을 짓부수겠다”는 각오로 단행한 ‘우정개혁’도 평가가 갈리는 만큼 현실 정치로 복귀하는데는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정치적 타산’으로만 그의 ‘참전’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도 반성없이 원전을 재가동하려는 정치권을 짓부수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는 없다’는 충심이 움직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고이즈미의 복귀를 보면 일면 부럽기도 하다. 은퇴한 국가정상들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해 직접 팔을 걷고 나서고 이를 사회가 용인하는 모습은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가도 임기가 끝나자마자 ‘유폐’되는 한국에 비해 꽤 참신하다. 원전 비중을 2035년까지 29%로 늘리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에너지 역주행’에도 별 문제삼지 않는 한국 야당들에도 고이즈미의 ‘출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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