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울어진 협상장

서의동 2015. 4. 5. 21:00

서커스 공연장의 공중그네 밑에 탄력 있고 튼튼한 그물이 깔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곡예사들이 맞은편 그네를 잡으려다 떨어지더라도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곡예의 달인들은 가끔 일부러 떨어졌다가 튀어올라 그네를 다시 잡는 ‘깜짝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 곡예사를 보호할 뿐 아니라 재도전도 가능케 하는 탄력이 그물에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사회안전망은 ‘군용 담요’ 수준이어서 추락하면 뼈를 다치거나 자칫 죽을 수도 있다. 해고되는 노동자는 이 담요 위로 뛰어내려야 하는 곡예사 신세다. 해고된 뒤 재취업을 하더라도 대체로 최저임금 수준에 장시간 근로의 질 나쁜 일자리를 얻는 게 고작이다. 이래서는 아이 교육비는커녕 집세도 감당하기 힘들다. 자영업은 사정이 더 나쁘다. 이미 2013년부터 자영업을 새로 시작한 사람보다 접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있다.

노사정위원회가 정규직을 쉽게 해고하도록 하는 방안을 놓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다. 협상 의제가 처음부터 한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청년실업자가 넘쳐나고 있는데 정규직들이 일자리를 움켜쥐고 있으니 안된다, 일자리를 나누기 위해 해고요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정부와 사용자는 주장한다. 노동자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요구를 하면서도 정부의 교환조건은 실업급여 확충과 최저임금 인상 정도에 그친다. 그나마 얼마를 올려주겠다는 구체안도 나오지 않는다.

노동계가 왜 해고요건을 양보하려 들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지나칠 정도로 명백하다. 일자리를 잃는 순간 바로 벼랑 끝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현행 복지 수준으론 해고 이후의 불안한 삶을 지탱하는 데 턱없이 모자란다. 이미 고교생쯤이면 다 알고 있듯 한국의 복지지출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꼴찌 수준이다.

이런 까닭에 엄격한 해고요건은 노동자들에게 사회안전망을 대신할 버팀목이다. 그런데 이 버팀목도 꽤나 약해져 있다. 대법원은 2002년 판례 변경을 통해 근로기준법 24조의 정리해고 요건 중 ‘긴박한 경영상 위기’에 대해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경우로까지 폭넓게 인정했다. 2007년 안정적인 경영흑자를 기록하던 콜텍악기가 대전공장을 폐쇄했지만 대법원은 “전체 경영실적이 흑자를 기록해도 일부 사업부문이 경영악화를 겪고 있는 경우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며 사용자 손을 들어줬다.

정규직이 과보호되고 있다고 정부와 재계는 주장하지만 해고장벽은 이미 충분히 낮아져 있다. OECD가 조사한 ‘해고 보호지수’를 보면 한국은 34개 회원국 중 22위로 중하위권이다.

노동자들이 움켜쥔 ‘버팀목’을 내놓으라기에 앞서 정부와 사용자는 등가(等價)의 교환조건을 제시했어야 한다. 실업급여 확충과 최저임금 인상을 넘어 사회안전망을 대폭적으로 확충하겠다는 약속을 내놨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겐 독일의 하르츠 개혁이나 네덜란드, 덴마크의 노동개혁이 좋아 보이겠지만 그들의 사회안전망은 서커스장의 그물처럼 튼튼하다. 사회안전망 확충에 드는 재원은 증세를 해서 조달하면 된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에 그럴 의지는 없어 보인다. 올 초 연말정산 파동을 계기로 ‘복지·증세’ 논의가 불거졌지만 정부는 불끄기에 급급했다. 여론이 가라앉자 박 대통령은 “경제활성화 노력 없는 증세론은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라며 ‘증세 없는 복지’론을 다시 꺼내 들었다. “복지과잉으로 가면 국민이 나태해진다”(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우리는 이미 고복지 스타트 단계”(최경환 경제부총리)라는 망언들이 춤을 추더니 최근에는 복지 예산을 깎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노동자가 움켜쥔 마지막 버팀목에서 손을 떼라고 압박한들 말이 먹혀들까. 노동계의 양보만을 강요하는 ‘기울어진 협상장’에서 과연 타협을 기대할 수 있을까.

지난 31일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회의가 열리고 있는 서울 세종로 종합정부청사 앞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중단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정부는 노사정 협상을 잠시 중단하고 재협상 테이블에 올릴 복지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게 맞는 길이다.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안심할 수준의 복지 프로그램,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재원조달 계획을 밝혀야 한다. 돈이 필요하다면 대기업·고소득층뿐 아니라 세부담층을 넓히는 현실성 있는 방안을 내놓고 노동계와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그런 다음 협상을 재개해 노동개혁과 복지 확충을 맞바꾸는 ‘빅딜(큰 거래)’을 시도해도 늦지 않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드라마 <미생>에서 회사를 그만둔 선배가 오상식 차장을 찾아와 한 말이다. 회사 밖이 ‘지옥’이라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쉬운 해고’에 대한 저항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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