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리셋론

서의동 2015. 5. 11. 20:02

3년 전쯤 일본 청년들 사이에서 ‘일본리셋론’이 유행한 적이 있다. 당시 민주당 정권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200%가 넘는 국가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세(부가가치세) 인상을 추진하자 등장한 담론이다. 빚을 갚지 못해 국가재정이 파탄나면 기득권층이 가진 금융자산의 가치가 폭락하고, 그 결과 ‘고착화’된 사회가 유동화(流動化)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금을 올리느니 재정이 파탄나게 내버려두자. 사회가 불안정해지면 기회가 박탈된 청년층에도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자조(自嘲)가 깔려 있다. 컴퓨터 리셋 버튼을 눌러 껐다 켜듯 일본 사회를 뒤집어 버렸으면 하는 심리는 1990년대 불황기에서 자라나 비정규직을 전전해온 일본의 ‘잃어버린 세대’ 상당수에게 자리 잡고 있다.



이 리셋론이 한국에서도 번지고 있는 사례를 최근에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달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이 개최한 ‘국가미래전략 정기토론회’에서 박성원 박사가 내놓은 조사결과는 충격적이다. 5대 도시에 거주하는 20~34세 청년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42%가 ‘붕괴-새로운 시작’을 선호하는 미래로 꼽은 것이다. 하와이미래학연구소가 개발했다는 미래예측방법을 원용해 ‘계속성장’ ‘붕괴-새로운 시작’ ‘보존사회’ ‘변형사회’ 등 4가지 미래사회 중 선택하도록 한 조사결과다. 조사시점이 세월호 사고 이전인 데다 조사대상자 중 ‘대졸 사무직·전문직’이 가장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 충격적이다. 발표자는 ‘붕괴-새로운 시작’을 꼽은 이들은 과도한 성장주의만을 추구하는 현 사회 대신 다양한 삶의 양식을 보존하고 소수자·경계인을 보호하는 사회를 희망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무분별한 성장주의의 결과 부와 기회의 독점이 심화된 한국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리셋시키자는 것이 설문조사를 통해 드러난 청년들의 생각이다. 요즘 페이스북에서는 ‘5년 전 서울대 커뮤니티 예언글’이라는 글이 다시 돌고 있다. “(한국사회는) 망하지 않고 몇년 성장한다 한들 그것은 예전처럼 모두의 파이가 커지는 발전이 아니라 이제부턴 1%만의 발전이다. …(중략) 기술의 진보와 경제적 발전은 점점 더 1%가 독점하고 범죄에 노출 등 위험한 것은 탈출하지 못한 정글에 있는 나머지가 모두 감당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절망을 지렛대 삼아 ‘경제민주화’를 내걸어 당선됐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경제민주화 의제는 실종됐고, 경제활성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고, 저소득층의 소득을 올리려는 정책노력 대신‘이자를 낮춰줄 테니 집을 사라’며 부동산 띄우기에 올인하는 모습만이 두드러진다. 성장집착증이란 고질병이 도지고 있는 셈이다.

 

돌이켜보면 민주화 이후 정부의 경제정책에는 공통된 ‘경로의존성’이 엿보인다. 독재정권 시절의 관치경제를 극복하겠다며 역대정부가 규제 완화와 시장자율 정책에 초점을 맞춰온 것이다. 그로 인해 소수 재벌과 일부 계층의 경제력 독점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좁디 좁은 연못 속에 고래 몇 마리가 들어차 있는’ 기형적인 생태계 속에서 나머지 생명체들은 질식해 죽어가고 있다.

 

더구나 5년 단임제라는 권력구조의 속성상 집권세력들이 단기실적에 목을 매다 보니 성장집착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근본 문제들에는 손대지 않은 채 ‘막 던지기’ 식으로 엉뚱한 사업들을 벌여놓다가 5년을 허송세월한다. 간혹 방향이 괜찮은 정책들도 다음 정권에서 뒤집어지기 일쑤다. 정책수명이 짧다보니 신뢰도가 떨어져 탄력도 붙지 않는다. 연 1% 저금리의 주택담보대출을 해주겠다는 최근의 발표에 많은 이들이 냉소하고 있다.최경환 경제팀은 노동, 금융, 공공, 교육부문의 구조개혁에 나서겠다고 하지만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개혁인지 불투명하다. 

 

한국경제의 문제는 심각한 분배왜곡에 있다. 당연히 구조개혁은 분배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이 돼야 한다. 답은 분명하다. 경제민주화의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구조적 불공정거래 관계를 해소하고 고용복지 정책을 강화해 중소기업 종사자와 중소상인, 저소득 노동계층의 소득을 높여주면 된다. 복지기반을 확충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런 근본대책을 외면한 채 섣부른 금융지원으로 가계부채를 더 키우는 전략은 효과가 없음을 정책당국자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청년들이 걱정없이 결혼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한국은 미래가 없다. ‘한국리셋론’이 번지는 섬뜩한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선 안된다.


(2015년 2월2일자 경향신문 '아침을 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