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16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대서양과 유럽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대서양을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2016년 영국 독립당 당수 나이젤 파라지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데 인용됐다. 하지만 이는 처칠의 다양한 어록 중 입맛에 맞는 일부만을 빌린 것이다. 오히려 처칠은 1946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우리는 유럽합중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베르사유 조약 체제가 붕괴된 1930년대부터 처칠은 ‘유럽합중국 건설’을 구상해 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처칠이 영국 전체를 대표하지 않듯, 그의 외교노선도 오래가지 못했다.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 노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영국인들 상당수의 생각이었다. 프랑스는 이런 영국을 경계했고, 샤를 드골 대통령은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영국이 가입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
18세기에 형성된 영국의 고립주의는 유럽의 세력균형이 국익을 극대화한다는 생각이 바탕을 이룬다. 유럽문제에 개입해 불안정성을 키우는 것보다 해외에 구축한 광대한 식민지를 차질없이 운영하고, 자유무역을 활발히 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이다. 영국은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특정국가와 동맹을 맺는 일을 피했고,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은 것이 유일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영국 의회가 영국 정부와 유럽연합(EU) 간 브렉시트 합의안을 압도적 표차로 부결시켰다. EU와 협상을 주도해온 테리사 메이 총리의 리더십이 치명상을 입었고, ‘EU 잔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패권을 미국에 넘겨줬고 더 이상 ‘대영제국’으로 불리지 않게 됐다. 하지만 영국인의 심상에 남은 ‘고립=명예’ 심리가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찬성’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낳았다. 전후 ‘유럽의 일개국가’로 왜소화된 지 오래인 영국의 홀로서기는 애초 무리였던 것 같다. 16세기 튜더왕조 시대 ‘인클로저(enclosure·울타리 치기)운동’은 영국을 산업혁명으로 이끌었지만, 이번에는 울타리를 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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