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30
“어제 악마가 이 자리에 왔다. 아직도 유황 냄새가 난다.” 2006년 9월20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연단에 오르자마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악마’로 지칭해 장내를 발칵 뒤집었다. 차베스가 15분간 연설에서 제국주의자, 파시스트, 살인자로 표현을 바꿔가며 부시를 맹비난하자 간간이 폭소와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차베스는 1999년부터 14년간 베네수엘라를 이끌면서 중남미 좌파 정부들과 강력한 반미전선을 구축했고,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해왔다. 또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미시온(misssion·선교)’이라는 사회복지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반미와 복지를 지탱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원유였다.
하지만 석유는 축복이자 저주였다. 석유 수출이 재정수입의 95%를 차지하는 베네수엘라는 국제유가 수요에 좌우되는 ‘천수답 경제’다. 중동 국가들이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신재생에너지, 석유화학 산업 등에 투자해온 것과 달리 베네수엘라는 다른 산업을 육성하지 않았다. 남미 국가 상당수도 사정이 비슷해 2010년대 들어 원자재 수요가 감소하자 예외 없이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차베스 집권기 배럴당 100달러까지 치솟던 유가는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취임 이후 20달러 선까지 폭락했다. 그 바람에 국가재정이 쪼그라들었지만 마두로 정권은 공공지출을 줄이지 않은 채 돈을 계속 찍어내 초인플레이션이 빚어졌다. 경제붕괴로 지난 5년간 베네수엘라 국민 300만명이 탈출했다. 그러자 국회의장인 후안 과이도가 지난 23일(현지시간) 임시 대통령을 자처하며 정권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과이도를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인정한다”고 반색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는 한편 군사개입 가능성을 시사하며 마두로 정권을 구석으로 몰고 있다. 중남미를 ‘뒷마당’으로 간주해온 미국은 이참에 눈엣가시인 베네수엘라를 친미국가로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듯하다. 베네수엘라의 수난은 원자재 가격 상승에 맞춰 20년 가까이 중남미를 휩쓸던 ‘핑크 타이드(좌파 물결)’의 완연한 퇴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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