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1
미국의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은 200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방문했을 때 받은 느낌을 ‘폭력’이라는 단어로 압축했다. 2017년 국내에 출간된 카플란의 책 <지리의 복수>의 한 대목이다. “남한 병사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팔에 잔뜩 힘을 준 태권도 준비 자세로 북한 병사들의 얼굴을 노려보며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 키도 제일 크고 가장 위압적인 병사들을 선별하여 DMZ 철책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
언제나 제국의 관리자인 듯하는 오만한 시선으로 세계를 내려다보는 카플란에게도 남북 병사들이 마주선 채 대치 중인 기묘하고 낯선 현장감은 꽤나 자극적이었던 모양이다. 서울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JSA는 외국인에게 한반도의 지정학 리스크를 체감케 하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근대 이후 한반도처럼 지정학 리스크가 휘몰아친 곳도 흔치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에 익숙해져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쏴도 밥을 먹고 일상을 이어간다. 하지만 바다 건너에서는 훨씬 충격적으로 바라보곤 한다.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느끼는 리스크의 ‘역치’, 즉 반응하는 데 필요한 자극의 최솟값은 사뭇 다르다. 그래서 지정학 리스크가 발생할 때마다 주식·외환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이는 반응이 한국인들에겐 호들갑으로 비친다.
남북관계가 해빙되고,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북·미 협상이 본격화하면서 리스크가 현저히 낮아졌음을 외환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원-달러 환율이 안정세를 보이며 원화가 ‘변동성 강한 신흥국 통화’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국채도 국제시장에서 안전자산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지리의 복수>에서 카플란은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이 베를린장벽과 마찬가지로 지리와 무관한 ‘임의적 경계’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렇기에 독일, 베트남, 예멘처럼 한반도의 통일도 예기치 않게 빠르게 올 수 있다고 봤다. “철조망과 지뢰밭 양쪽에서 분출되는 형식적 증오감도 결국에는 예측 가능한 내일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의 예언이 맞든 틀리든 한반도의 지정학 리스크가 숙명이 아닌 ‘임의적’인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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