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는 군사쿠데타 주역이라는 비판이 무색할 만큼 시대흐름에 부응한 여러 정책들을 추진했다. 공산권 및 북한과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북방정책이 그랬고, 부동산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시도한 ‘토지공개념’도 혁신적이었다.
1980년대 후반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 호황으로 시중에 돈이 흘러넘치자 여유자금이 부동산에 몰려들었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풀린 돈들도 땅값을 밀어 올렸다. 부동산 투기에 따른 집값폭등으로 서민들의 불만은 임계점으로 치솟았다. 집권 첫해인 1988년 13대 총선에서 패배해 정국 주도권을 상실한 노태우 정부에 부동산 문제는 정권의 존립을 위협했다. 조순 부총리, 문희갑 경제수석 등 경제관료들은 연일 “개혁이 없으면 혁명이 일어난다”고 경고(경향신문 1989년 9월4일자)했다. 1989년 12월18일 국회를 통과한 택지소유상한법, 토지초과이득세법, 개발이익환수법 등 ‘토지공개념 3법’은 이런 배경 속에 등장했다. 노태우 정부는 1990년 5월8일에는 초법적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한 매각 명령을 내려 재벌기업의 부동산 사재기에 제동을 걸었다.
토지공개념은 1994년 토지초과이득세법이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았고, 택지소유상한법이 1998년 헌재 위헌판정을 받으면서 동력을 상실했다. 당시 헌재는 법 설계가 정밀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을 뿐 공공이익을 위해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취지는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지공개념은 국정철학으로 계승되지 못했고, 부동산은 역대 정부에서 경기부양의 ‘밸브’로 동원되었다.
경제학자들은 한국이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룬 주요 배경으로 경자유전 원칙 아래 지주-소작제를 혁파한 농지개혁을 꼽는다. 농지개혁을 통한 소득 불평등 완화와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은 개발도상국의 초기 성장에 훌륭한 자양분임을 한국의 사례가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이후 뉴노멀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제2의 농지개혁’이 아닐까. 그 원칙이 토지의 공공성을 높이는 방향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토지공개념은 3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유력한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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