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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경제사 '쇼크독트린'

서의동 2022. 9. 15. 13:43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군사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집권한 피노체트의 사례가 나오미 클라인이 명명한 '쇼크 독트린'의 전형적인 예라는 점을 사실 잘 몰랐다. 칠레의 사례 뿐 아니라 천안문 사태이후의 중국, 동유럽과 러시아의 체제전환,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라크전쟁,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공, 싱가포르 쓰나미 등 비정상적인 상황이 만들어질 때마다 극단적인 자본주의로의 개조가 이뤄졌다. 재앙같은 사건이 벌어진 뒤 공공부문에 대한 치밀한 기습공격을 가하면서 기업과 자본은 막대한 초과수익을 거두는 반면 민생은 피폐해졌다.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김소희 역, 살림비즈)은 전쟁, 테러, 자연재해, 주식시장 붕괴 같은 총체적인 대규모 충격을 받아 대중의 방향감각이 상실된 틈을 이용해 정부가 경제적 쇼크요법을 밀어붙인 사례들을 집약했다. 

 쇼크독트린의 역사는 자본주의 황금기가 서서히 저물어가던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기승을 부렸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관점을, 단지 관점 만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로 뒷받침해준다. 쇼크독트린은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의 흑역사를 를 일목요연하게 종합했다. 이하는 스크랩.

 

프리드먼은 영향력있는 논문을 통해 현시대 자본주의의 묘책을 구체화했다. 내가 보기엔 그것은 쇼크 독트린이었다. 그는 "실제이든 아니면 인식이든 간에, 오직 위기만이 진짜 변화를 만들어낸다. 위기가 발생하면 이제껏 밀려났던 사상에 근거한 조치가 취해진다. 또한 과거엔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던 일들이 오히려 불가피해진다. (15쪽)

 

우리는 흔히 악명 높은 인권 유린은 반민주적인 체제가 저지른 가학적 행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대중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고의적으로 사용되거나, 과격한 자유시장 개혁의 도입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1970년대 아르헨티나 군부체제에서 일어난 3만명의 '실종'은 시카코학파 실험의 핵심이었다.(19쪽)

 

프리드먼과 카메론이 생각한 임무는 모두 '자연스러운'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꿈을 기반으로 한다. 즉 인간의 개입으로 사회 패턴이 왜곡되기 이전인 모든 것이 조화로운 상태를 원한다. (중략) 프리드면은 정부 규제, 무역 장벽, 이익집단 등의 방해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순수한 자본주의로 돌아가려 했다. 또한 카메론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경제 왜곡 현상이 나타날 때 이를 완전무결한 상태로 되돌릴 방법은 고통스런 충격을 가하는 길 뿐이라고 믿었다. (69쪽)

 

이러한 이상적인 시스템에 대한 사랑이 급진적 자유시장 경제의 본질이다. 자본주의는 '보석같은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또는 "천상의 시계장치이다. (중략)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너무나 매력적이다. 포도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 새들이 와서 쪼아 먹으려 할 정도였떤 그리스 화가 아펠레스의 저명한 그림들 같다."(70쪽)

 

프리드먼은 정부를 올바른 노선으로 돌려놓기 위해, 유명한 첫번째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글로벌 자유시장 규정집을 제시했다. 또한 미국에서 신보주의 운동을 대표할 경제적 의제들을 내놓았다. 첫째, 정부는 이윤추구를 방해하는 규정과 규칙들을 모두 폐지해야 한다. 둘째, 정부자산은 기업들에게 매각해 이윤을 내게 해야 한다. 셋째, 사회 프로그램의 지원을 대폭 줄여야 한다. (78쪽)

 

1953년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미국인 두명이 만나 구체적 방안을 논의했다. 미 국제협력처의 칠레 지부 대표인 앨비언 페패터슨(Albion Patterson)이다. 훗날 이 조직은 미 국제개발처(USAID)가 된다. 다른 한명은 시카고 대학 경제학부 학장인 시어도어 슐츠이다. (중략) 두 남자는 국가 주도 경제의 본산인 산티아고를 정반대로 바꿀 계획을 생각해냈다. 바로 최첨단 자유시장의 실험실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1956년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실시된 이래, 1957~1970년 동안 학생 100명이 시카고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중략) 1965년, 프로그램은 남미 전체의 학생들로 대상을 확대했다. 그러자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에서 참가자들이 많이 늘었다. 확장은 포드재단의 지원금으로 이뤄졌으며 이후 시카고 대학의 남미경제학회센터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중략) 단 십년만에 남미 학생들이 해외로 경제학을 공부하러 가장 많이 가는 곳은 극도로 보수적인 시카고 대학이 되었다. 이는 앞으로 십년간 남미 역사의 진로를 결정짓는 사실이기도 했다. (81~83쪽)

 

시카고 경제학부는 칠레 정책을 세심하게 관찰한 뒤 몇가지 불필요한 요소들을 찾아냈다. 강력한 사회안전망, 국영산업 보호, 무역 장벽, 가격 통제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가난을 완화시키는 이런 노력들이 경멸의 대상이라고 가르쳤다.(쭝략)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하든 아니면 산티아고 지점에서 교육과정을 듣든 간에, 그 프로그램을 마친 학생들은 남미에서 '시카고 보이즈'로 불렸다. 그들은 USAID로부터 더 많은 자금을 받게 되면서,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사상을 열렬히 홍보하고 다녔다. (83~85쪽)

 

닉슨은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잘 알려진 대로 CIA국장 리처드 헴스에게 '경제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략) 아옌데가 아직 취임하기 전일 때, 미국은 기업들을 대표해 아옌데 행정부에 전쟁을 선포했다. 위싱턴 소재의 칠레 임시위원회가 활동의 중심지였다. 주동자인 ITT를 비롯해 칠레에 자산을 가진 미국 광산회사들이 위원회에 있었다. (중략) ITT의 한 CEO는 국가안보자문인 헨리 키신저에게 편지를 보내 "아옌데 대통령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칠레에 대한 모든 원조를 재검토 단계에 두자라고 제안했다. 또한 닉슨 정부를 위한 18가지 전략을 준비했는데, 그 중에는 군사쿠데타를 요구하는 방안도 있었다.(87~89쪽)

 

살바도르 아옌데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던 워싱턴과 산티아고의 세력은 인도네시아의 사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수하르토의 잔인성에만 주목한 게 아니었다. 특히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교육을 받은 인도네시아 경제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흔히 '버클리 마피아'로 불린다. (중략)이들은 포드 재단의 후원으로 1956년 시작된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공부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서구 스타일의 경제학부를 인도네시아 대학에 그대로 복제했다. (중략) 버클리 마피아는 정부가 갑작스럽게 붕괴될 경우에 대비한 '비상사태 계획'을 작성하며, 쿠데타를 모의한 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중략) 버클리 마피아 경제팀은 시카고 보이즈만큼 국가개입을 반대하는 급진주의자는 아니었다. 정부가 국내 경제의 운영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쌀 같은 기본 품목을 적정가격에 공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도네시아의 광대한 광물과 석유자원을 원하는 외국 투자가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92~94쪽)

 

흔히 아옌데 정권의 전복을 군사적 쿠데타로 묘사한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의 워싱턴 주재 대사인 레텔리에르는 군대와 경제학자들 사이의 동등한 파트너십으로 본다. "칠레에서 '시카고 보이즈'로 알려진 그들은 군대의 잔인성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지성인의 능력으로 보완하겠다고 단언했다.(96쪽)

 

1973년 9월11일은 아옌데의 평화로운 사회주의 혁명이 폭력적으로 종식된 정도가 아니었다. '이코노미스트;가 훗날 '반혁명'이라 칭한 시대의 시작이었다. 케인즈 학파와 발전주의에 빼앗겼던 기반을 시카고 학파 캠페인이 되찾은 첫번째 승리였던 것이다. 이들은 난폭한 힘을 통해 혁명을 달성했으며 무엇이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했다. 장차 '브릭'의 정책들은 각종 위기를 핑계 삼아 수십여 국가에서 실행된다. (104~105쪽)

 

시카고보이즈는 피노체트에게 각 분야에서 정부가 단번에 손을 떼면 '자연스러운' 경제법칙이 즉각 균형을 되찾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잘못 알고 있었다. 1974년 인플에이션은 375퍼센트에 달했다. (중략) 피노체트의 '자유무역' 실험으로 값싼 수입품들이 넘쳐났고 칠레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중략) 시카고 보이즈들은 자신들의 이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이론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따라서 실험을 성공시키려면 왜곡 조치들은 완전히 제거해야 했다. 즉 더 많은 삭감, 더 많은 민영화, 더 빠른 속도가 필요했다. 이후 1년 반동안 재계 엘리트들은 시카고 학파의 극단적인 자본주의 모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외국 회사들과 '피라니아'로 불리는 몇몇 투자자들만 이득을 보게 되었다. (107쪽)

 

1975년 3월 밀턴 프리드먼과 아놀드 하버거는 실험을 계속하게 도와달라는 한 은행의 초대를 받아 산티아고로 향했다.(중략) 연설과 인터뷰에서 그는 현실세계의 경제 위기 논의에서 공개적으로 쓰인 적이 없는 용어를 구사했다. 바로 '쇼크 요법'을 요구한 것이다. (중략) 그는 이후에 피노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핵심을 더욱 강조했다. 그는 편지에서 장군의 '현명한'한 결정을 칭찬했다. 그러고는 정부 지출을 더욱 줄여 "6개월 내에 전 영역에 걸쳐 25퍼센트를 삭감하십시오"라고 촉구했다. (중략) 불평꾼들을 제거한 피노체트와 카스트로는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순수한 자본주의 유토피아로 가기로 했다. 1975년에 공공분야 지출을 단번에 27퍼센트나 줄이더니 1980년까지 계속 줄여나갔다. 의료와 교육분야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자유시장의 치어리더인 '이코노미스트' 조차도 '자학의 향연'이라 불렀다. (108~110쪽)

 

피노체트는 급작스러운 긴축정책이 경제에 충격을 주어 건강하게 만든다는 검증되지 않는 이론에 근거해 고의로 국가를 심각한 퇴행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런 논리는 1940~1950년대에 다량의 전기쇼크요법을 처방한 심리학자들의 생각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주입된 다량의 충격이 환자의 두뇌를 마법처럼 재부팅할 거라고 생각했다.(110쪽)

 

그러나 피노체트 경제팀은 멈추지 않고 더욱 실험적인 영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프리드먼의 가장 전위적인 정책을 도입한다. 공립학교 시스템은 바우처와 차터 스쿨 제도로 바뀌었다. 공공의료 서비스는 이제 돈을 내고 받아야 했다. 유치원과 묘지도 민영화되었다.(112쪽)

 

피노체트는 17년간 집권하면서 정치적으로 방향을 여러번 바꾸었다. 기적적인 성공의 증거로 제시되는 꾸준한 성장은 사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시키고 보이즈가 쇼크이론을 실행한 지 십년이 지난 시점으로, 이미 피노체트는 노선을 전환한 상태였다. 시카고학파 독트린의 엄격한 준수에도 불구하고 1982년에 칠레 경제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중략) 경제상황이 너무 불안정한 탓에 피노체트는 결국 아옌데가 했던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즉 많은 회사들을 국유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략) 1980년대에 칠레 경제가 그나마 완전 붕괴에까지 이르지 않았던 것은 피노체트가 코델코를 민영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델코는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광산회사로, 칠레 수출액의 85퍼센트를 차지한다. (113~114쪽)

 

장차 러시아, 남아프리카, 아르헨티나에서 칠레의 패턴이 계속 반복된다. 도시는 지나친 투기버블, 엄청난 이득을 숨기는 의심스러운 회계장부, 광적인 소비주의에 휩싸였다. 공장들은 문을 닫아 음산하게 변하고, 발전주의 시대의 인프라는 녹이 슨 상태였다. 부정부채와 정실주의는 통제불능일 정도였다. 또한 국영 중소기업들은 사라졌다. 만약 당신이 칠레에서 부의 버블 외부에 있다면 마치 대공황과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부의 버블 내부에서는 이윤이 자유롭고 빠르게 흐르는 쇼크요법 스타일의 개혁을 통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 그런 부는 경제시장의 마약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재계는 자유방임주의의 기본 전제들을 재평가함으로써 칠레 실험의 모순에 대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116쪽)

 

그 다음 개조대상은 남부원추지대의 다른 국가들이었다. (중략) 1973년 우루과이 군부는 쿠데타 이듬해부터 시카고학파 노선으로 나아갔다. (중략) 군부는 세금체계와 통상 정책을 개혁하기 위해 '시카고대학의 아놀드 하버거와 래리 샤스타드' 경제팀을 초청했다. (중략) 그 즉시 평등사회였던 우루과이에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실질임금은 28퍼센트나 떨어졌고, 처음으로 몬테비데오 거리에 구걸꾼들이 나타났다. (116~117쪽)

 

그 다음 실험국가는 아르헨티나였다. 1976년, 아르헨티나 군부는 이사벨 페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했다. 이제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브라질에는 미국이 후원하는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세 나라 모두 발전주의의 시범사례 국가들이었지만 이제는 시카고학파 경제학의 생생한 실험실이 되었다.(117쪽)

 

브라질에서 새로 나온 자세한 문서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장군들은 1976년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칠레처럼 국제적 항의를 받는 괴로운 일이 없기를' 바랐다. 따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덜 크는 탄압전술이 필요했다. 공포를 확산시키면서도 국제적 언론의 눈에는 띄지 않는 저자세 전술 말이다. 칠레에서 피노체트는 실종전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중략)

군인들이 사람들을 몰래 납치한 뒤 비밀캠프로 데려가 고문 또는 살해했다. (중략) 실종은 저자세 저전술 역할 외에도 공공개적인 학살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공포를 확산시켰다. (중략) 특히 아르헨티나 대통령궁을 차지한 군부가 가장 열성적이었다. 통치말기에 이르자 거의 3만명이 행방불명되었다. (119~120쪽)

 

1975년에 미국 상원에서 청문회가 열려 미국이 칠레에 개입했는지 여부를 조사했따. 그 결과 CIA가 피노체트의 군대에 '반란통제' 방법을 훈련시켰음을 알아냈다. 미국이 브라질과 우루과이 경찰에게 심문기법을 교육시켰다는 내용도 있다. (122쪽)

 

오랫동안 미국 국무부는 남부원추지대의 '더러운 전쟁'을 정규군과 위험한 게릴라간의 치열한 전투라고 말해왔다. 따라서 때때로 통제하기 힘들지만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받을만한 분쟁이라고 주장했다.(중략) 남부원추지대 공포정책의 희생자 대부분은 무장단체가 아니었다. 공장, 농장, 빈민가, 대학교의 비폭력 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경제학자, 예술가, 심리학자, 열성 좌파당원들이었다. 무기 때문이 아니라 신념 때문에 살해된 것이다. 근대자본주의가 탄생한 남부원추지대에서 '테러와의 전쟁'은 한마디로 새로운 질서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전쟁이었던 셈이다. (129~130쪽)

 

레텔리에르는 나아가 '칠레 경제를 운영하는 경제팀의 지적인 설계사이자 비공식적인 조언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피노체트의 범죄에 책임이 있다고 썼다. (중략) 또한 프리드먼식의 자유로운 사적 경제 설립과 인플레이션 통제는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중략) 대중 탄압과 소수 특권층의 '경제적 자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중략)1976년 8월말에 실린 리텔리에르의 기사('네이션')는 논란을 일으켰다.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9월21일, 마흔네 살의 이 경제학자는 워싱턴 도심으로 일하러 가기 위해 운전중이었다. 대사관 거리 중심부를 통과했을 때, 운전석 아래에 설치된 원격조정 폭탄이 터졌다. (중략) 쿠데타를 저지른 이래 피노체트가 벌인 가장 잔인하고 대담한 범죄였다. (중략) FBI는 조사를 통해 그 폭탄을 피노체트 비밀경찰의 고위급 요원인 마이클 타운리가 설치했음을 밝혀냈다. 그는 훗날 미국 연방법원에서 판결을 받았는데, CIA의 정보를 통해 만든 가짜 여권으로 미국 내에 잠입했다고 인정했다. (132~133쪽)

 

재판을 담당한 쉰다섯살의 판사는 아르헨티나 연방법원의 카를로스 로잔스키였다.(중략) 그는 판결만으로는 범죄의 본질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후세에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덧붙이겠다고 했다. 즉 1976~1983년 아르헨티나 공화국에서 발생한 학살은 제노사이드 측면에서 저질러진 인류애에 대한 범죄라는 것이다.(중략) 그는 살해행위가 시스템의 일부였으며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고 밝혔다.(중략) 개별적 개인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개인들이 대표하는 한 사회집단을 파괴할 의도가 분명했다. (134~135쪽)

 

노조지도부에 대한 공격은 작업장 소유주와의 밀접한 협력속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략) 외국기업들은 군부가 해준 일에 대해 단지 감사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일부는 공포 캠페인에 적극 참여했다. 브라질에서는 여러 다국적 기업들이 서로 연대한 뒤, 민영화된 고문부대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중략) 포드사는 아르헨티나 군대에 녹색 포드 팔콘 세단을 제공했는데, 그 차량은 수천명의 납치와 실종에 사용되었다. (중략) 남미 역사가 카렌 로버트에 따르면, 독재 말기에 "메르세데스벤츠, 클라이슬러, 피아트 콩코드 같은 대기업의 공장 노동자 대표들은 하나같이 실종되었다". (142~145쪽)

 

국가가 공포를 사용하는 경우에 대부분 그러하듯, 표적 살해는 두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먼저, 경제 프로젝트의 걸림돌이자 가장 저항이 심한 사람들을 제거할 수 있다. 두번째로는, 이러한 말썽꾼들의 실종은 저항을 염두에 둔 사람들에게 가장 확실한 경고가 된다.(중략) "국민들은 당황하고 고뇌하고 온순해졌으며,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퇴행한 것이다. 그들은 의존적인데다 두려움에 떨었다"라고 칠레의 심리학자 마르코 안토니오 레 라파라가 회상했다. (중략) 경제적 충격으로 물가가 치솟고 월급이 떨어져도, 칠레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거리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중략) 가족들은 자주 끼니를 거르고, 전통차로 아이의 배고픔을 달랬고,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동트기 전에 일터로 나서는 식으로 생활을 맞추었다.(147쪽)

 

남미 전역의 진실위원회 보고서의 증언에서, 죄수들은 자의식 형성에 필수적인 원칙을 배반하게 만드는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남미 좌파들에게 가장 소중한 원칙은 결속이었다. (중략) 고문관들은 정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이었다. 따라서 배신행위 그 자체를 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남을 도왔다고 믿였던 죄수들의 내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사회운동가로 자부심이 넘쳤던 내면은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대체되었다.(149쪽)

 

아르헨티나 군부는 고문센터 내부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처리했다.(중략) 추정컨대 오백명의 아기들이 아르헨티나의 고문센터에서 출생했다. 신생아들은 사회를 재구조화하고 새롭고 이상적인 시민을 만들기 위한 계획에 편입되었다. 아기들은 짧은 양육기간을 거친 뒤, 독재체제와 직접 연관된 부부들에게 팔리거나 혹은 넘겨졌다. 아이들은 군부가 '정상적'이며 건전하다고 판단한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가치에 따라 양육되었다. (중략)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캠프에서 살해당했다. (중략) 아이 강탈은 개인적인 권력 남용이 아니라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시행한 것이다. (151~152쪽)

 

밀턴 프리드먼은 1976년에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상관관계를 다룬 '독창적이면서도 중요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중략) 일년이 지난 뒤, 남부원추지대의 논쟁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일이 일어났다. 국제사면위원회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인권 유린을 용감하게 앞장서서 폭로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노벨경제학상은 노벨평화상과는 별개다. (중략)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심사원단이 결정해 수여한 두 노벨상은 상반된 의미를 심어주었다. 마치 고문실의 쇼크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경제쇼크요법은 칭찬받아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중략) 이처럼 지적 방화벽이 생기는 것은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이 공포를 이용해 자신들의 정책을 실행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포정치를 정치경제적 목적을 위한 도구라기 보다는 그저 좁은 범위의 '인권 유린'으로만 보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중략) 인권운동은 군부의 잔혹한 학대를 종식시키는 데 분명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단지 범죄에만 초점을 맞출 뿐, 그 이면의 이유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유혈로 얼룩진 첫번째 실험실로부터 시카고학파 이념이 무사히 탈출하도록 도와준 셈이다. (156~157쪽)

 

폭력을 사용해야 했던 또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또는 폭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사면위원회는 그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보고서 920쪽 어디에도 급진적인 자본주의 노선으로 국가를 개조하는 중이라는 내용은 없었다. 빈곤의 심화나 부를 재분배하는 프로그램들의 취소도 마찬가지로 다루지 않았다. (중략) 사면휘원회으 또다른 의무태만은 분쟁을 국내 군대와 좌익 극단주의자간의 갈등으로 한정시켰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나 CIA 같은 주체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국내 농장주와 다국적기업들도 빠뜨렸다. 남미에 '순수한' 자본주의를 실시하려는 포괄적인 계획과 그러한 프로젝트 이면에 숨겨진 이해관계에 대한 검토없이는 보고서에 기록된 사디즘 행위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58~159쪽)

 

물론 국제사면위원회의 침묵을 냉저속에서 공정함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말고 다른 요인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돈이었다. 당시 인권운동을 후원하는 자금의 상당부분은 포드재단에서 나왔다. (중략) 포드재단은 라틴계 시카고 보이즈 수백명을 배출한 시카고 대학의 남미경제 연구교육 프로그램의 주요 후원자였다.(중략) 포드 재단을 더욱 곤혹스럼게 만든 것은 시카고학파의 문하생들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일이 근래 들어 벌써 두번이나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첫번째는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가 일으킨 유현 쿠데타였다. 그 과정에서 버클리 마피아가 단기간에 권력을 잡았다.(중략) 1970년대 중반에 갑자기 포드는 제3세계에서 '기술적 전문가'를 생산하는 입장에서, 인권활동에서 손꼽히는 후원자로 바뀌었다. (중략) 두 국가의 좌익들은 포드가 도와줬던 정권에 의해 몰살되었다. 그런데 그 정권이 구금시킨 정치범 수천명을 석방시키고자 백방으로 노력하는 신세대 변호사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준 것도 포드재단이었다. (161~163쪽)

 

포드재단이 인권에 개입하되 정치와는 연관시키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폭력의 밑바탕에 놓이 질문은 할 수 없었다. 왜 이러한 인권탄압이 벌어졌을까? 즉 누구의 이익을 위해 그런 탄압이 벌어졌는지는 물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의무태만 때문에 자유시장 혁명이 극도로 폭력적인 분위기속에서 탄생했다는 언급은 자유시장의 역사에서 빠졌다. 시카고 경제학자들은 고문에 대해 할말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인권단체들은 경제분야의 급진적 변혁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탄압과 급진정책이 하나의 통합된 프로젝트라는 견해를 밝힌 인권보고서는 단 하나 뿐이었다. 바로 브라질의 '네버 어게인'이었다. 이는 국가나 외국 재단에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발행된 유일한 보고서이다. (중략) 보고서는 이런 답변을 담담히 내놓았다. "한 국가의 대다수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는 경제정책의 경우엔 무력으로 집행하는 수밖에 없다."(164~165쪽)

 

닉슨이 1969년에 취임했을 때 프리드먼은 뉴딜의 잔재에 맞서 반혁명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중략) 닉슨은 프리드먼을 비롯해 뜻을 같이하는 그의 친구들과 동료들을 경제 요직에 임명했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인 조지 슐츠도 프리드먼의 도움으로 닉슨 행정부에 임용된 사람이다. 또 다른 이로는 당시 서른일곱살이었던 도널드 럼스펠드가 있다. 그는 시카고 대학의 세미나에 종종 참여하곤 했다.(중략) 더욱 모욕적이게도 케인즈식의 정책을 실시한 것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럼스펠드는 임금과 물가 조절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관리예산국 책임자인 슐츠와도 의견이 일치했다.(중략) 깊은 배신감을 느낀 프리드면은 훗날 닉슨을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사회주의적인 대통령'이라고 표현했다.(175~176쪽)

 

시카고학파는 국내에서 당한 배신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리고 1970년대 내내 군부정권들과 손을 잡았다. 우익 군사독재가 권력을 잡은 곳이라면 거의 어디에서나 시카고 대학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하버거는 1976년 볼리비아 군부정권의 자문으로 일했다. (중략) 그는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와 버클리 마피아에게도 조언을 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이 시장경제로 전환할 때 경제자유화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었다. (177쪽)

 

대서양 건너편에서 대처는 이른바 '오너십 사회'를 후원해 영국식 프리드먼주의를 촉진했다. 특히 영국의 공영주택단지에 그런 노력을 기울였다. (중략) 그녀는 공영주택단지 주민들에게 할인된 가격으로 주택을 구입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주었다. 확실히 분열-정복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중략) 새로 집주인이 된 절반 이상이 토리당으로 성향을 바꾸었다.(중략) 총선이 다가오자 대처리즘은 조기에 불명예퇴진할 운명이었다.(중략) 대처의 끔찍한 첫 임기는 시카고학파의 급진적인 영리추구 정책들은 민주주의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닉슨시대의 교훈을 재현하는 것 같았다.(중략) 특히 월스트리트로서는 매우 걱정스러운 상황이었다. 1980년대 초반 이란, 니카라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같은 전제정권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략) 혁명을 시작하기 십년도 채 안되는 1980년대 초반, 글로벌 자유시장의 꿈에 어두운 전망이 드리워졌다. (178~180쪽)

 

영국군대의 포클랜드 반격은 코드명 조합주의 작전이었다. 군사적 정복 치곤 희한한 이름이었지만, 사실상 선견지명적이었던 작전이었다. 대처는 승리로 얻은 엄청난 인기를 이용해 조합주의 혁명을 실행했다. 전쟁 전 하이에크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바로 그 혁명이었다. 1984년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대처는 아르헨티나와 치른 전쟁의 연장선엣 파업을 다루며 잔인한 해결책을 요구했다. "우리는 포클랜드에서 외부의 적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제는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할 때 입니다. 이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한 위협에 대응하는 일입니다." (182~183쪽)

 

대처는 국가에 조명과 난방을 제공하는 광부들을 와해시키기 위해 강경책을 썼다. 그러니 덜 필수적인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약한 노조들이 대처의 신경제 질서에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였다.(중략) 이는 취임한지 몇달이 지난 레이건 대통령이 항공교통 통제관들의 파업에 대처한 방식과 아주 유사하다.(중략) 대처는 포클랜드 승리와 광부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바탕으로 급진적인 경제논의로 넘어갔다. 1984~1988년 영국 정부는 텔레콤, 가스, 항공, 항공통제시설, 철강을 민영화했다. 그리고 영국 석유공사의 지분을 매각했다. (중략) 대처는 전쟁을 이용해 처음으로 대규모 민영화 경매를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작했다. (중략) 포클랜드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용한 대처는 시카고학파 프로그램을 펼치기 ㅜ이해서 반드시 군사독재나 고문실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첫번째 명확한 증거였다. (184쪽)

 

1970~1980년대 프리드먼과 조합주의 관계자들은 재난을 대비하는 지성인들이라는 독특한 브랜드로 이러한 과정을 재현했따. 그들은 헤리티지와 카토를 비롯한 우익 싱크탱크의 새로운 네트워크를 정성들여 세웠다. 그리고 프리드먼의 세계관을 확산시킬 가장 중요한 도구를 만들었다. 바로 세계적 대기업들이 후원해준 PBS방송국의 10부작 미니시리즈 <선택의 자유(free to choose)>라는 프로그램이었다. (186쪽)

 

케인즈의 핵심교리에 따르면 심각한 경제 침체에 처한 국가들은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돈을 지출해야 한다. 그러나 삭스는 정반대의 접근법을 사용했다. 위기가 한참인 상황에서 정부의 긴축재정과 가격 인상을 옹호한 것이다. (중략) 삭스는 반세르에게 급작스런 쇼크요법만이 볼리비아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위기를 치료할 수 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조언했다. 석유가격을 열 배로 올리고 가격규제도 철폐하고, 예산을 삭감하라고 제안했다. (191쪽)

 

이런 해결책의 즉각적인 결과는 결국 볼리비아의 최빈곤층을 코카인 노동자로 만들었다. 코카인은 다른 작물보다도 수입이 열배나 많기 때문이다.(이러한 현상은 모순이다. 미국이 코카인 단속을 지원하는 바람에 애초에 경제 위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1989년 노동자 열명당 한명이 코카인 산업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노동자들 가운데는 에보 모랄레스의 가족도 있었다. 그는 강경한 코카인 조합의 전직 대표로 훗날 볼리비아의 대통령이 된다. (198쪽)

 

십년전에 프리드먼이 산티아고로 운명적인 여행을 떠난 이래 쇼크요법은 늘 독재와 죽음의 캠프라는 악취를 풍겼다. 이제 삭스 덕분에 그러한 악취를 떨칠 수 있게 되었다.(중략) 사스는 자유시장 운동을 더욱 자비롭고 평화로운 시대로 진입시킨 완벽한 인물이었다.(중략) 볼리비아의 기적은 신문, 잡지기사, 삭스의 프로필, 삭스가 저술한 베스트셀러, PBS의 3부작 다큐멘터리 <세계경제 패권(Commanding Heights : The Battle For the World Economy)>를 통해 계속해서 들려왔다.(중략) 그러나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볼리비아는 선거를 치른 국가에서도 쇼크요법이 적용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탄압없이 민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는 않았다.(200쪽)

 

가장 큰 문제는 볼리비아 유권자들이 파즈 대통령에게 경제구조를 전면 개조할 권한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선거에서 민족주의 강령을 내세웠다. 그러더니 이후 밀실거래에서 이를 갑자기 포기했다. 몇년 후 저명한 자유시장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은 파즈의 행동을 주술 정치(voodoo politics : 정부가 공약과 정책을 내걸지만 실제로 효과가 없거나 의도와 다른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로, 국민을 상대로 한 기만행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정치-옮긴이)라는 용어로 나타났다. (200~201쪽)

 

1980년대에 그러한 기회는 수없이 많았다. 남미만이 아니라 개도국 상당수가 하이퍼인플레이션에 휩쓸려 있었다. 두가지 요인이 원인인데, 둘 다 워싱턴의 경제기관에서 나온 것들이다. 첫번째 원인은 독재정권 때 축적된 비합법적인 채무를 민주주의 신정권이 물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두번째는 프리드먼의 영향을 받아 이자율이 치솟는 것을 방치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결정이었다. 그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부채가 엄청나게 늘었다.(205쪽)

 

채무는 민주주의 신정부에 버거운 짐이 되었다. 그러나 더 막중한 부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유형의 충격이 뉴스에 나오고 있었다. 바로 볼커 쇼크(Volcker shock)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폴 볼커의 결정에 따른 여파를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는 미국 이자율을 거의 21퍼센트나 상승시켜, 1981년에는 최고점에 달했다. (중략) 가장 극심한 고통은 외국에서 나타났다. 채무가 많은 개도국에게 볼커쇼크는 워싱턴에서 발사한 거대한 테이저건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개도국 세계를 격변으로 몰아넣었다. (209쪽)

 

프리드먼의 위기 이론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의 처방을 받아들인 글로벌 경제는 이자율이 치솟고 가격 규제가 철폐되었으며 수출 지향적인 경제가 되었다. 그럴수록 각국의 경제 시스템은 위기에 더욱 취약해졌다. 그 결과 그의 급진적 조언을 수용하기 쉬운 환경인 붕괴상황이 만들어졌다. (210쪽)

 

라울 알폰신은 볼커쇼크가 한창인 1983년에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했다. (중략) 가령 아르헨티나의 엄청난 채무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할 수도 있었다. 또는 비슷한 위기에 처한 이웃 국가들과 연합해 채무자 카르텔을 형성할 수도 있었다. (중략)그러나 민주주의 신정부는 공포체제의 잔재를 상대해야 하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1980~1990년대, 개도국들은 일조의 공포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중략) 독재의 어둠에서 벗어난 뒤 국민이 선출한 정치가들은 1970년대에 큰 인기를 끈 정책들을 다시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이 언제 또다시 자금을 대서 쿠데타를 일으킬지 모를일이었다. 특히 그들을 괴롭혔던 군부 관계자들은 대부분 감옥에 가지 않았고, 오히려 면책을 주장하며 군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서 채권자인 워싱턴의 재정기관들과 전쟁을 피하려는 것은 당연했다. (중략) 군부독재는 굳이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구조조정' 시대의 시작이었다. 채무가 독재정권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211~212쪽)

 

1980년대 각국은 위기의 악순환에 빠졌다. 세계은행과 IMF 외에는 달리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들은 바로 정통파 시카고 보이즈의 문을 두드린 셈이다. 이들 기관은 경제적 재앙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자유시장의 개척지를 확보할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213쪽)

 

위기에 처한 국가들은 환율안정을 위한 긴급자금이 절실했다. 그런데 민영화와 자유무역 정책들은 긴급자금과 패키지로 묶여 있었다. 따라서 각국은 패키지 전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경제학자들은 자유무역이 위기 종식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보는 교묘하게 '감추어졌다.' (중략) 당시 세계은행과 IMF는 각국 정부들이 희망을 발견하고 워싱턴 컨센서스가 유일한 안정화 해법이자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중략) 로드릭은 심지어 민영화와 자유무역은 안정화 창출과 직접적 관련이 없음을 시인했다. (216~217쪽)

 

(아르헨티나 경제부장관인) 카발로의 프로그램은 아르헨티나에 재앙이었다. 그의 환율 안정화 방법, 즉 페소를 미국 달러에 연동시킨 방안은 국내에서 제품생산비용을 너무 높여놨다. 때문에 공장들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값싼 수입품과 경쟁할 수 없었다.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져 전체 국민의 절반이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보자면 그 계획은 원하던 바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카발로와 메넴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충격에 빠져있는 동안 슬며시 민영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220쪽)

 

남미에서 그랬듯 무엇보다도 폴란드는 부채탕감과 당면한 위기에서 벗어날 원조자금이 필요했다. 이론상 경제적 재앙을 막기 위한 안정화 자금을 제공하는 일은 IMF의 의무였다. (중략) IMF와 미국 재무부는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따라서 폴란드 문제를 쇼크 독트린의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았다. (중략) 게다가 경제적으로 걸려 있는 판돈은 남미보다 더 크다. 소비자 시장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동유럽은 서구 자본주의에서 비켜나 있었다. 때문에 가치있는 자산들은 여전히 국가 소유여서 민영화로 전환하기 가장 좋은 후보들이었다.(231~232쪽)

 

이런 상황에서 당시 서른네살이던 제프리 삭스는 자유노조의 자문위원을 일하기 시작했다. (중략) 그는 자유노조가 승리하기 전부터 공산주의 정부의 요구로 폴란드에서 일을 시작했다. (중략) 삭스가 실질적인 역할을 하도록 후원한 사람은 조지 소로스였다. (232~233쪽)

 

자유노조는 삭스의 인맥과 협상력을 얻었지만 폴란드의 언론이 삭스 플랜 혹은 쇼크요법이라 부른 것을 먼저 채택해야 했다. 그것은 볼리비아보다 더 급진적인 것이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가격통제를 철폐하고 보조금을 대폭 삭감했다. 삭스 플랜에 따르면 국영 광산, 조선소, 공장들을 사기업에 매각해야 했다. 자유노조의 노동자 오너십 경제프로그램과는 정반대였다. (233쪽)

 

마침내 최종 결정이 발표되었다. 폴란드 경제는 극심한 피로를 쇼크요법으로 치료할 것이다. '예산 삭감, 국영산업의 민영화, 주식시장 및 자본시장의 창설, 변동 환율제, 중공업에서 경공업으로의 전환' 같은 급진적 과정이었다. (237쪽)

 

후쿠야마는 사실상 자유시장과 자유로운 국민이 하나의 프로젝트라는 프리드먼의 주장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의 주장덕에 시너지 효과가 생겼다. 후쿠야마는 프리드먼의 이론을 과감히 새로운 영역으로 가져갔다. "정치영역의 자유민주주의와 합쳐진 경제영역의 규제없는 시장은 인류의 역사적 진화에서 종착점을 의미한다. (중략) 한마디로 정부의 최종 형태다."(중략) 좌익 독재 혹은 우익독재에서 탈출한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중요한 결정에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떤 이념을 일방적인 무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다시 말해 후쿠야마가 '국민의 주권'을 표현한 보편적 원칙에는 국가의 부를 어떻게 분배할지 선택할 국민의 권리가 포함되어야 한다.(241쪽)

 

1989년 역사는 멋진 전환점을 맞이해 진정한 개방성과 가능성의 시대로 들어섰다. 국무부의 후쿠야마가 그 순간을 이용해 역사책을 닫고자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세계은행이나 IMF가 불안정한 시대를 골라 워싱턴 컨센서스를 드러낸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자유시장이론이 아닌 다른 경제사상에 관한 논쟁이나 토의는 모두 종식시키려는 시도였다. (242쪽)

 

덩샤오핑의 개혁의 상당부분은 성공을 거두며 인기를 끌었다. (중략)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덩샤오핑은 도시 노동자들이 반기지 않는 조치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가격통제가 사라져 물가가 치솟고, 직업 안정성이 사라지면서 실업 물결이 밀어닥쳤다. (중략) 1988년 중국 공산당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자 가격 규제를 철폐하려는 정책을 일부 취소해야만 했다. (중략) 자유시장 실험이 위기에 처할 무렵 밀턴 프리드먼은 다시 한번 중국을 방문해달라는 초청을 받는다. (중략)  프리드먼이 장쩌민에게 해준 조언은 칠레 프로젝트가 파한 직전이었을 때 피노체트에게 해준 조언과 같다.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묵인하지 말라.(244~245쪽)

 

(천안문) 시위대가 경제개혁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단지 프리드먼식 개혁의 속도와 무자비함에 저항했다.(중략) 그(왕후이)는 선거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자들의 요구는 사실 경제적 불만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요구한 이유는 당이 광범위한 변혁을 대중의 동의없이 추진했기 때문이다.(246쪽)

 

폴란드는 18개월에 걸쳐 '비정상적인 정치'를 펼쳤다. 자유노조의 노동자들은 참을 만큼 참았으니 실험을 끝내라고 요구했다. (중략) 폴란드 노동자들이 산업의 민영화를 중지시켰다는 것은 개혁이 고통스러웠던 것 만큼 더 심한 행동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중략) 흥미롭게도 폴란드의 경제는 이 시기에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중략) 거리에서든 선거에서든 폴란드에서 민주주의는 자유시장에 대항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반면에 중국은 제한없는 자본주의를 추진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의 민주주의를 탄압했다. 그 결과 충격과 두려움이 근대 역사상 가장 수익성높고 지속 가능한 투자붐을 일으켰다. 학살을 통해 태어난 또다른 기적이었다.(252~253쪽)

 

드클레르크 정부는 협상에서 이중전략을 취했다. 우선 경제를 운영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어버린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지했다. 그러면서 무역정책이나 중앙은행 같은 경제정책 입안의 핵심을 '기술적인' 또는 '행정적인' 문제로 표현했다. 또한 국제무역협정, 헌법변경, 구조조정 프로그램 같은 폭넓고 새로운 정책도구들을 사용했다. (중략) ANC는 음흉한 전략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다. 자유헌장의 경제조항과 정반대인 치밀한 대비계획이 남아프리카에서 법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261쪽)

 

감옥에서 나온 만델라는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석방되자마자 남아프리카 주식시장은 패닉현상을 보이며 붕괴되었다. (중략) 변덕스런 시장은 석방된 만델라의 사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중략) 당의 최고관리가 자유헌장을 정책으로 삼을 거라는 불길한 암시를 줄 때마나 시장은 랜드를 하락시키는 충격으로 반응했다. (중략) 일단 국가가 글로벌 시장의 변덕스러운 환경에 문을 개방하면 시카고학파의 정설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즉시 뉴욕과 런던의 트레이더들이 환율을 공격함으로써 처벌을 받는다. 그러면 심각한 위기가 찾아오고, 더 많은 차관이 필요해지고 더 많은 부가조건이 붙는다. (270쪽)

 

1996년 6월 음베키는 결과를 발표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위한 신자유주의적 쇼크요법 프로그램이었다. (중략) 음베키는 뉴욕과 런던의 트레이더들에게 메시지를 더욱 크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나를 대처주의자로 부르시오"라고 농담처럼 말하여 계획을 개시했다. (중략) 음베키의 커다란 제스처는 장기투자를 끌어오지 못했다. 투기자본들 때문에 통화가치만 더욱 떨어졌을 뿐이다. (273쪽)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과 페레스트로이카(개혁)라는 두 정책으로 상당한 민주화를 이루었다. (중략) 최종 목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모델에 근거한 사회민주주의, 즉 '모든 인류를 위한 사회주의 등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서구도 고르바초프가 소비에트 경제의 규제를 풀어 스웨덴의 경제모델과 유사한 체제로 전환하기를 원했다. (중략) 때문에 1991년 G7 회담에서 일어난 일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각국 정상들로부터 경제쇼크요법을 즉각 수용하지 않는다면 밧줄을 잘라 그를 떨어뜨리겠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체제전환의 속도와 방법에 대한 제안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라고 고르바초프는 그날에 대해 기록했다. (284~285쪽)

 

러시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키고 학파 경제프로그램과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중국 지도부는 민주주의가 자유시장계획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국민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달랐다. 민주적 혁명은 고르바초프가 시작해 이미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시카고학파 경제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평화롭고 희망찬 민주화과정은 폭력적으로 중단되고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285쪽)

 

1990년 '이코노미스트'는 고르바초프에게 "강자의 힘을 보여주는 정책을 사용해 중대한 경제개혁에 대한 저항을 박멸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중략) '이코노미스트'는 고르바초프에게 냉전 시대의 가장 악독한 살인자 모델을 따르라고 권하며, '미하일 세르게이비치 피노체트?'라는 표제로 기사를 냈다. 유혈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자유경제에 대한 피노체트의 접근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286쪽)

 

옐친은 러시아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1년간 절대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즉각 경제학자들로 팀을 구성했다.(중략) 러시아 언론들은 옐친의 팀을 '시카고 보이즈'라고 불렀다. (중략) 서구는 그들을 '젊은 개혁가들'이라고 불렀는데, 예고르 가이다르가 그들을 이끌었다. (중략) "그들의 정책은 매우 분명했다. '쇼크요법' 처방전에 따른 '엄격한 재정안정화'였다."(러시아 신문 '네자비시마야 가제타') 옐친은 그들을 임명함과 동시에 악명높은 실력자 유리 스코코프에게 안보와 탄압부서를 맡겼다.(중략) 기사는 예상대로 결론을 냈다. "만약 국내판 피노체트 시스템을 세우려고 하면 가이다르의 팀이 시카고보이즈 역할을 하는 건 당연하다."(288~289쪽)

 

미국은 옐친의 시카고보이즈에게 이념적 기술적 후원을 제공했다. 민영화 법안을 만드는 작업부터, 뉴욕 스타일의 주식시장을 시작하고 뮤추얼 펀드 시장을 만드는 작업까지, 전환 전문가들에게 돈을 대주었다. (289쪽)

 

1991년 10월28일 옐친은 가격통제를 철폐한다고 선언하며 가격 자유화가 모든 것을 정상상태로 돌려놓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중략) 이는 세가지 정신외상적 쇼크들 가운데 두번째 쇼크이다. 프로그램에는 자유무역정책들과 22만5000개의 국영회사들을 단번에 민영화하는 첫단계도 포함되었다. (중략) 옐친은 6개월 정도는 상황이 악화되겠지만 곧 경제가 회복되어 경제적 거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중략) 1991년에 비해 러시아인들은 1992년에 평균적으로 40퍼센트 소비를 줄였다. 전체인구의 3분의 1이 빈곤층으로 떨어졌다.(중략) 러시아인들은 폴란드에서처럼, 참을만큼 참다가 결국엔 가학적인 경제모험을 끝내라고 요구했다. 옐친의 권력장악을 지원했던 의회는 유권자들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중략) 1991년 12월 의원들은 예고르 가이다르를 사퇴시키기 위해 투표를 했다. 그리고 석달후인 1993년 3월 의회는 법령만으로 경제법을 실시하게 해준 특별권력을 취소하기 위해 투표했다. (중략) 의회의 반란이 일자 그는 텔레비전에 나가 긴급사태를 선언함으로써 제왕적 권력을 되찾기 위해 대응했다. (중략) 그런데도 서구는 배후에서 옐친에 힘을 실어주었다. (중략) 서구언론들은 의원들을 민주적 개혁을 되돌리려는 '강경파 공산주의자'로 폄하했다. (291~292쪽)

 

의회가 쇼크요법의 속도를 늦추자 강력한 압력이 가해졌다. 미국 재무부 차관 로렌스 서머스는 "러시아 개혁의 모멘텀을 반드시 되살려야 하며, 다자적 지원으로 강화시켜야 한다"고 경고했다. (중략) IMF의 익명의 한 관리는 러시아의 개혁후퇴에 대한 불만으로 약속한 15억 달러의 차관이 취소되었다고 언론에 흘렸다.(중략) IMF의 누설사건이 있고 나서 옐친은 서구의 지원을 확신했다. 그래서 '피노체트 옵션을 향해 단호하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1400개의 법령을 발하고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해산을 선언했다. 이틀후 특별회기에서 635대 2로 옐친의 권력남용을 탄핵했다. (293~294쪽)

 

옐친과 의회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중략) 미국 의회는 25억달러의 원조를 옐친에게 제공하는 법안에 동의했다. 이에 고무된 옐친은 군대를 보내 의회를 포위하고, 의회건물의 전기와 난방과 전화선을 끊었다. (중략)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일화를 책으로 낸 카갈리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10월3일 의회를 지지하는 군중들은 오스탄키노 텔레비전 센터로 행진해 뉴스를 내보내라고 요구했죠. 일부 무장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군중 대부분이 비무장상태로, 어린애들도 있었지요. 그런데 옐친의 군대는 총격을 가했습니다." 시위자 백명과 군인 한명이 사망했다. 이후 옐친은 러시아 전역의 모든 시의회와 지역의회를 해산시켰다. (294~295쪽)

 

워싱턴이나 유럽연합은 옐친에게 의원들과 진지한 협상을 맺으라고 분명한 신호를 보낼수도 있었다. 그러나 옐친은 오히려 의회탄압에 대한 격려를 받았다. 1993년 10월4일 아침, 옐친은 오랫동안 정해진 운명을 완성시키듯, 러시아의 피노체트가 되어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중략) 그는 망설이는 군대에 의회 건물을 공격해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중략) 옐친은 군인 5000명, 탱크 수십대, 무장수송차량, 헬리콥터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엘리트 쇼크부대를 소집했다. (중략) 하루가 끝날 무렵에 보니, 전면적인 군사공격으로 500명이 사망하고 1000명이 부상을 입었다. 1917년 이래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가장 잔혹한 폭력사태였다. ( 295~296쪽)

 

그런데도 제프리삭스는 급진적인 자유시장 개혁이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칭찬했다. 그는 옐친이 의회를 공격한 이후에도 그를 계속 지지하며, 옐친의 정적들을 '권력에 중독된 과거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일축했다.(297쪽)

 

국가가 쇼크공격으로 몸부림치고 있을 때, 옐친의 시카고 보이즈는 가장 논란적인 조치를 취했다. 바로 예산 대폭삭감, 빵을 포함한 생필품 가격통제 철폐, 더욱 많은 분야의 신속한 민영화였다. 이 모두 즉각 상당한 비극을 불러올 정책들이었다. 따라서 폭동을 진압할 경찰국가가 필요해 보였다. (298~299쪽)

 

러시아는 시카고학파 정설의 보기 드문 이례적 사례였다. 옐친과 경제팀은 외국계 다국적 기업들이 러시아의 자산을 직접 매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먼저 러시아인들을 위한 상품으로 내건 뒤 과두재벌 소유의 민영화된 회사들을 외국인 주주들에게 개방했다.(299쪽) 

 

과두재벌과 외국 투자자들에게 한가지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옐친의 인기가 추락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략) 역사상 절박해진 지도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으레 그랬듯, 1994년 12월 옐친은 전쟁을 시작했다. (중략)국방장과은 몇시간만에 분리된 체첸 공화국 군대를 장악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중략) 단기적으로 옐친은 체첸과 모스크바에서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300쪽)

 

단지 러시아의 공공자산이 헐값에 팔린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한 자산들은 조합주의 방식에 의해 공적자금으로 구매되었다. (중략) 옐친의 여러장관들은 국립은행이나 재무부에 들어갈 막대한 공적자금을 과두재벌이 급조해 차린 은행들로 이체했다. 그러고는 석유매장지나 광산의 민영화 입찰계약을 바로 그 은행들과 체결한다. 입찰을 주관하는 은행들은 동시에 참가도 한다. 당연히 과두재벌이 소유한 은행들이 공공자산의 새로운 소유주로 결정된다. (302쪽)

 

러시아의 주요자산을 장악한 과두재벌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회사를 유망한 다국적 기업에게 개방해 그들도 상당하 몫을 챙기게 해주었다. (중략) 매우 수지맞는 투자였지만 러시아에서 부의 배분은 외국 파트너가 아닌 러시아인 관계자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IMF와 미 재무부는 장차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의 민영화 입찰에서는 이러한 실수를 바로잡는다. 그리고 침공 이후의 이라크에서 미국은 더욱 앞서나간 조치를 취했다. 수지맞는 민영화 거래에서 이라크 엘리트들은 완전히 배제된 것이다.(302쪽)

 

조지 소로스가 동유럽에서 보인 박애주의적인 행동도 논란을 피해 갈 수 없다. 삭스의 여행경비를 대준 것도 그에 포함된다. 소로스가 동유럽에서 민주화의 목적에 헌신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민주화에 수반되는 경제적 개혁에서 경제적 이득을 본 것도 사실이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환율 트레이더다. 따라서 국가가 변동환율을 채택하고 자본 규제를 철폐할 때 상당한 이득을 얻는다. 그는 또는 국영회사들이 경매에 나왔을 때 참가한 유력인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305쪽)

 

1998년 아시아 경제위기가 확산되었을 때, 극심한 투기를 벌인 러시아는 무방비 상태였다. (중략) 그들은 경제 프로젝트를 구하기 위해 또다른 충격을 가하려고 했다. (중략) 1999년 9월 러시아는 경악할만한 테러공격을 받는다. 난데없이 아파트 건물 4채가 한밤중에 폭파되어 거의 300명이 사망했다. 이후 상황은 2001년 9월11일이후의 미국과 비슷하게 전개된다. 공포로 인해 테러이외으 사안들은 정치적 영역에서 묻혀버렸다. (중략) '짐승같은 놈들'을 잡아들일 적임자는 냉정하고도 사악한 러시아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아파트 폭발사건 이후 즉각 푸틴은 체첸 공화국에 공중폭격을 가하고 시민 거주지를 공격했다. (중략) 보호자 푸틴은 옐친의 뒤를 이을 대통령으로 적격이었다. (중략)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옐친은 피노체트 각본에서 마지막 장을 뜯어내며 면책을 요구했다. 대통령이 된 푸틴은 옐친을 모든 범죄 기소로부터 보호해주는 법안부터 서명했다.(306~307쪽)

 

옐친은 민주주의를 닮은 건 뭐든지 가혹하게 파괴했다. 그런데도 서구는 그의 통치를 '민주주의 전환'의 일부로 보았다. (중략) 러시아에서 1990년대 중반 '개혁가들'의 지혜에 감히 의문을 품는 자는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로 치부되었다. (중략) 러시아에서 쇼크요법 프로그램의 실패는 더이상 숨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비난은 러시아의 부정부패 문화로 향했다. (중략) 그들은 '마피아 자본주의'라고 폄하하면서 그것이 마치 러시아에서만 나타나는 고유한 현상처럼 말했다. (310~311쪽)

 

윌리엄슨이 위기 '조성'의 의견을 밝힌지 2년이 지났다. 세계은행 발전경제학의 수석 경제학자 마이클 브루노는 언론의 눈초리를 피해 다시 한번 비슷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했다. 1995년 튀니지에서 열린 국제경제학회 모임에서 그는 강의를 했다. 68개국에서 온 경제학자들 500명에게 "큰 위기는 주저하는 정책 입안자에게 충격을 주어 생산성을 높이는 개혁을 하게 만든다"라는 합의가 점차 커지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중략) 그는 국제기관들이 워싱턴 컨센서스를 추진하려면 경제위기를 이용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즉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원조 차단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로인한 '역충격(정부수입 감소나 대외거래 감소)'은 개혁 전에 지체되는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복지를 증진시키는 셈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현 상황을 악화시켜야 한다'라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중략) 사실 비교적 덜 심각한 위기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보다는 높은 인플레이션의 위기가 국가를 더 나은 상황으로 이끈다."(333~334쪽)

 

아시아의 위기는 전형적인 공포의 악순환 때문이었다. 공포를 잡을 유일한 방안은 1994년 데킬라 위기 때 멕시코의 환율을 구했던 조치와 같았다. 간단히 말해 즉각 신속하고 단호하게 제공된 차관 뿐이었다. 미국 재무부는 멕시코가 붕괴되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시장에 보여주었다. 그러한 시기적절한 조치가 아시아의 앞날엔 없었다. 사실 위기가 닥치자마자 놀랍게도 영향력있는 재정기관들은 단합된 목소리를 냈다. 요컨대 아시아를 돕지 말란느 것이다. (341~342쪽)

 

IMF와 새로 설립된 WTO의 압력 속에서 1990년대 중반 아시아 정부들은 정책 조율에 동의했다. 외국인이 국영기업을 소유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법은 그대로 유지했다. 또한 주요 국영회사들을 민영화하라는 압력에도 저항했다. 그러나 금융분야의 장벽은 제거해야 했다. 요컨대 환율거래와 증권투자를 허락한 것이다. (343쪽)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우, IMF는 위기가 정부의 과다지출과는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위기가 준 특이한 지렛대를 이용해 고통스런 긴축정책을 이끌어냈다. 훗날 피셔(IMF 협상담당자 스탠리 피셔)도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 '뉴욕타임즈'는 IMF의 행동을 이렇게 비유했다. "수술이 한창인 상황에서 심장 전문의는 갑자기 폐와 신장도 같이 수술하기로 했다."(346쪽)

 

IMF의 협상이 마무리되던 시점은 우연히도 대선과 겹쳤다. 두 명의 후보자가 IMF에 반대하는 강령으로 선거에 나섰다. 그러자 IMF는 주권 국가의 정치 과정에 개입하는 비정상적 행동을 했다. 즉 네명의 주요 후보자들이 당선될 경우 IMF의 새로운 규칙을 지킨다고 약속해야 돈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중략) 경제문제에 민주주의가 개입하지 못하게 하라는 시카고학파의 임무가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었다. (347쪽)

 

다국적 자본은 아시아에서 마음껏 힘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의 새로운 분노를 유발했다. 결국 대중은 제한없는 자본주의 이념을 펼치는 조직에 정면 대항했다.(중략) 그 결과 사절단은 더 이상 예전처럼 안락한 익명성을 누릴 수 없었다. IMF의 스탠리 피셔는 협상 초반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서울 힐튼 호텔 주위는 서커스같은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중략) 결국 그들은 5성급 호텔과 회의센터에서 죄인처럼 지내는 경험을 하게 됐다.(중락) 1998년 이후부터 평화적 수단으로는 쇼크요법 스타일의 개조가 어려워졌다. (중략) 남반구의 새로운 저항 분위기가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9년 시애틀에서 WTO 회담이 실패했을 때 많은 언론은 대학생 연령의 시위자들을 기사로 다루었다. 그러나 진짜 반란은 회의센터 내부에서 일어났다. 개도국들은 서로 단결해서 의결권 블록을 형성했다. (358~359쪽)

 

럼스펠드는 대규모 정규군 대신 핵심 인력을 선호했다. 이는 배후에서 예비군과 국가수비대 같은 싼 임시직 군인들이 지원해주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블랙워터와 핼리버튼 같은 계약업자들이 위험한 운전 업무, 죄수 심문, 물자 수송, 의료 서비스를 맡았다. 럼스펠드는 군대와 탱크를 줄이고 최신 위성과 사기업의 나노테크놀로지에 돈을 쓰려고 했다. (365~366쪽)

 

럼스펠드는 국민들의 세금을 아끼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예산을 11퍼센트 늘려달라고 의회에 요구했다. 그는 큰 정부와 큰 비지니스가 힘을 합쳐 자금을 재분배하려는 조합주의 반혁명의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공공자금을 사기업의 금고로 직접 이체했다. 반면에 직원들에게는 돈을 덜 쓰려고 하면서, 자기만의 '전쟁'을 개시했다. (367쪽)

 

1990년대 무렵, 핵심 기능은 민영화 대상이 아니라는 금기를 깨뜨리려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었다. (중략) 러시아의 석유 매장지, 남미의 텔레콤, 아시아의 산업은 1990년대 주식시장에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 중ㅆ다. 이제 그러한 경제적 역할을 미국 정부가 하고 있었다. (중략) 이제껏 재난과 위기는 급격한 민영화계획을 추진하는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재난을 창출하거나 그에 대처하는 힘을 가진 군대, CIA, 적십자사, 유엔, 재난 '응급대처' 기관들은 공공부문의 마지막 보루였다. 기업들은 이런 핵심 분야를 먹어치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369~370쪽)

 

(럼스펠드는) 항공기 제조업체 걸프스트림 이사로 재직했으며 스위스의 거물급 엔지니어링 회사인 ABB의 이사회에 있으면서 연봉 19만달러를 받았다. 북한에 플루토늄 생산기술을 포함해 핵기술을 판 사실이 드러나 뜻하지 않게 주목을 받았던 회사다. 원자로를 판매한 2000년 당시 럼스펠드는 ABB이사회에서 유일한 북미인이었다.(371쪽)

 

럼스펠드가 역병을 통해 호황의 시장을 봤다면, 체니는 전쟁의 미래를 바탕으로 해서 돈을 벌었다. (중략) 체니는 군대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민간 계약업자에게 맡기는 비중은 대폭 높였다. (중략) 펜타곤은 예전부터 무기 제조업자들과 엄청난 금액의 계약을 맺어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사기업이 군대에 장비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작전 매니저로 일하는 것이었다. (373쪽)

 

낙찰을 받은 회사가 미군을 위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펜타곤에서 모든 비용을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윤도 보장되어 있었다. 바로 '비용 플러스' 계약이었다. (373쪽)

 

핼리버튼은 병참 지원의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었으며, 해외 미군기지 전체를 건설할 책임까지 맡게 되었다. 군대는 단지 군인과 무기만 제공할 뿐이다. (중략) 그 결과는 발칸 반도에서 처음 나타났는데, 해외 파병은 일종의 중무장한 패키지 휴가 같은 모습이었다. "발칸 반도에 군사들이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맞아준 사람은 우리 회사 직원들이었습니다." 핼리버튼의 대변인이 설명했다. 마치 회사 직원들이 군수 병참 지원담당자가 아니라 크루즈 여행의 총책임자인 듯 말했다.(374쪽)

 

클린턴은 발칸반도에 병력 1만9000명을 파견했다. 그리고 핼리버튼이 지은 미니 도시들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단정하고 보안시설이 잘 갖춰진 교외지역 같은 모습이었다. 핼리버튼은 군대에 고국의 안락함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패스트푸드 아울렛, 슈퍼마켓, 영화관, 최첨단 헬스장도 있었다. (374쪽)

 

1990년대 중반, 록히드는 미국 정부의 정보기술 부문을 맡기 시작해 컴퓨터 시스템과 수많은 데이터를 관리했다. (중략) 2004년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록히드마틴이 미국을 경영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놀랄 정도로 많은 부문을 돕고 있다. 여러분의 우편물을 정리하고, 세금을 합산하고, 사회보장수표를 처리하고, 미국의 인구통계를 계산하며, 우주 비행을 관리하고, 항공 교통을 통제한다." (375쪽)

 

911테러사건의 안보실패는 지난 20년간 공공부문을 잘라내어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에 아웃소싱을 맡긴 결과였다. (중략) 911테러사건 당시, 뉴욕 경찰들과 소방관이 쓰는 무선통신은 구조작업이 한창인 중에 고장이 났다. 항공교통통제소는 비행기의 이탈을 제때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테러리스트들은 계약직 직원들이 일하는 공항 보안대를 그냥 통과했다. 항공통제소의 계약직들 가운데는 푸드 코트에서 일하는 직원보다 더 적은 월급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378쪽)

 

미국에서 프리드먼주의 반혁명의 첫번째 승리는 로널드 레이건의 항공교통통제소 노조 탄압과 항공사의 탈규제화였다. 그로부터 20년 후 항공통행 시스템은 민영화되어, 탈규제화와 인원감축이 이뤄졌다. 항공안보는 대체로 훈련이 제대로 안된 저임금 비노조 계약직들이 맡았다. 테러 공격이후 교통부의 감찰관은 비행기 안보를 책임진 항공사들이 모두 비용 절감을 위해 날림식이었다고 증언했다. (378~379쪽) 

 

친기업적 합의에 대한 반발은 엔론 사건 같은 새로운 스캔들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중략) 특히 수개월 전 캘리포니아의 대규모 정전사태가 엔론의 에너지 가격 조작을 생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그랬다. (중략) 그러나 노조화된 공공부문의 노동자들은 대중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략) 911 테러사건의 최고 영웅들은 블루칼라의 응급대원인 소방관, 경찰관, 구조요원이었다. (379~380쪽)

 

부시의 뉴딜정책은 오직 미국 기업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한 해에 수천억 달러의 공적자금이 사기업들에게 전해졌다. 많은 경우 은밀히 제의된 계약 형태였으며, 경쟁이나 감찰도 없었다. 관련 산업네트워크는 테크놀로지, 언론, 커뮤니케이션, 교도소사업, 엔지니어링, 교육, 의료분야까지 점점 확대되었다. (381쪽)

 

철저한 프리드먼 성향인 부시팀은 국가에 퍼진 공포를 즉각 이용해, 전투부터 재난구조까지 모든 것을 영리 추구사업으로 보는 공동정부의 꿈을 추진했다. (중략) 첫 번째, 백악관은 911 테러사건 이후 사회에 널리 퍼진 위기의식을 이용해 고위 부서의 정책, 감시, 감금, 전투수행에 관한 권력을 증가시켰다. (중략) 두번째, 풍족한 지원을 받은 안보, 침입, 점령, 재건 분야는 사기업에 아웃소싱으로 넘겨져 영리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이 목적이라고 말은 했지만, 진짜 목적은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를 창설하고자 함이었다. 국토안보, 민영화된 전쟁, 재난 이후 재건이라는 새로운 경제가 국내외에서 민영화된 안보국가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이었다. (382쪽)

 

워싱턴 주변의 교외지역에는 국토안보와 관련된 '신생회사'들과 '창업지원' 회사들이 입주한 회색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실리콘 밸리처럼 누구나 할 것 없이 뛰어들었고, 엄청난 속도로 자금이 몰려들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런 열띤 시기에 돈을 마구 쓰는 벤처자본가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90년대엔 경쟁상품을 제치고 시장을 평정할 상품을 개발해 마이크로소프트나 오라클에 팔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용의자를 찾아서 체포하는 기술, 즉 테러리스트를 잡는 기술을 구상해 국토안보부나 펜타곤에 판다.(386쪽)

 

결국 (테러) 용의자들은 관타나모로 끌려가 핼리버튼이 지은 최대 200명까지 수용하는 새로운 감옥에 수감된다. (중략) 호화로운 비지니스 제트기처럼 만들어졌지만, 실상은 범죄자 이송 목적으로 개조된 보잉 737기가 두건을 씌운 죄수들을 실어 나른다. (중략) 목적지에 도착한 죄수들은 심문관들을 만난다. 일부는 CIA나 군인들이 아닌 민간 계약업자가 고용한 사람들이다. (중략) 프리랜서 심문관들이 고수익의 계약을 계속 유지하려면, 워싱턴의 고용주들이 찾고 있는 기소 가능한 정보를 죄수들에게서 빼내야 한다. 그러니 학대가 일어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중략) 테러와의 전쟁에는 시장적 해결방안을 적용한 로우테크도 사용된다. 즉, 테러리스트 용의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침공당시, 미국 정보요원은 알카에다 또는 탈레반 전사를 넘겨주면 3000~2만5000달러를 주겠다고 널리 알렸다. (중략) 얼마 가지 않아 바그람과 관타나모의 감옥은 양치기, 택시운전사, 요리사, 점원들로 넘쳐났다. (390~391쪽)

 

관타나모 죄수의 86퍼센트가 현상금이 발표된 이후 아프가니스탄인과 파키스탄인 전사들이나 요원들에 의해 넘겨진 사람들이였다. 2006년 12월 펜타곤은 관타나모의 죄수들 가운데 360명을 석방했는데, AP통신사가 그들 가운데 245명을 추적해봤다. 그중 205명은 귀국한 후에 석방되거나 모든 혐의가 풀렸다. 테러리스트 검거를 시장적 접근법으로 다룰 경우 정보의 질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알 수 있다. (391쪽)

 

테러와의 전쟁을 설계한 사람들은 최초의 재난 자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이전의 전임자와는 다른 부류다. 즉 전쟁과 재난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는 록히드, 핼리버튼, 칼라일, 질리드에 이로운 것을 미국과 세계에 이로운 것으로 융화시켰다. 그러한 태도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나을 수 있다. 이러한 회사들의 순익을 올려주는 것은 전쟁, 역병, 자연재해, 자원 부족 같은 재난이기 때문이다. (397쪽)

 

사담 후세인은 미국 안보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미국 에너지기업들에 대한 위협이었다. 당시 이라크는 러시아 석유 재벌과 계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의 토털과 협상 중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오일회사들에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말이다. (중략) 미국은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을 제거한 뒤 엑슨모빌, 셰브런, 셸, BP 같은 회사들에게 새로운 개척지를 열어주었다. (중략) 이러한 회사를 에너지 서비스와 설비를 판매할 최적의 위치인 두바이로 옮긴 핼리버튼도 포함된다. 이라크 전쟁 자체가 핼리버튼의  역사상 가장 고수익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400쪽)

 

가장 신랄한 비판가들조차도 네오콘을 미국과 이스라엘의 우위 확보에 목을 맨 열성파로만 본다. 따라서 '안보'를 위해서라면 경제적 이득을 기꺼이 희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억지인데다 역겹기까지 하다. 무한정한 이윤을 추구할 권리는 항상 네오콘 이념의 핵심이었다. 911 테러사건 이전부터 네오콘은 급진적 민영화와 사회복지비 삭감을 열띤 목소리로 요구했다. 철저한 프리드먼주의 성향의 미국기업연구소, 헤리티지 재단, 카토 연구소 등의 싱크탱크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412쪽)

 

사람들 대부분은 이라크 전쟁을 자신을 왕으로 착각한 한 대통령과 역사의 승자 편에 서려고 했던 영국인 동료의 사기 행위로 정의한다. 반면에 매우 이성적인 정책 결정을 통해 이라크 전쟁이 나왔다는 주장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라크 침공의 입안자들은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다. 평화적인 수단으로는 중동의 폐쇄경제를 개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공포를 사용할지는 걸린 판돈에 따라 정해진다. (418쪽)

 

아랍권을 단번에 정복할 수는 없다. 따라서 먼저 한 나라가 촉매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이론의 미디어 전도사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미국이 한 국가를 침입해 '아랍 무슬림 세계의 심장부에 전혀 다른 모델'을 세워놓으면 중동 전체에 민주적인 신자유주의 물결이 확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이 이론의 내부논리를 보면 테러리즘과의 전쟁, 개척지 자본주의의 확산, 선거 실시라는 세가지 요소가 하나의 프로젝트로 묶여 있다. 즉 중동에서 테러리스트를 없애고,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한 뒤, 사후 선거로 모든 것을 변경 불능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419쪽)

 

전쟁 입안자들은 약탈이 외국군대가 아니라 이라크인들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지적했다. 물론 럼스펠드가 약탈을 계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예방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으며, 약탈이 시작된 후에도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중략) 펜타곤은 저명한 고고학자들로부터 박물관과 도서관을 보호할 치밀한 전략을 공격 전에 세우라는 경고를 받았다. (중략) 그러나 럼스펠드는 그 제안을 무시했다. (중략) 무장차량을 탄 미군 병사들이 약탈품을 실은 트럭이 사라지는 걸 그냥 지켜만 보았다는 보도가 여러차례 있었다. (중략) (430쪽)

 

"사람들이 국가의 자산을 가져가고 국가 소유의 트럭을 몰고 갈 때, 자연스럽게 일종의 민영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레이건 행정부의 베테랑 관료이자 시카고경제학파의 열성신도인 그(폴 브레머의 고위급 경제조언자인 피터 맥퍼슨)는 '약탈'을 공공부문이 공식적으로 축소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431쪽)

 

이라크에서 손쉽게 수십억달러의 이윤을 올린 당사자는 미국 회사들이었다. 이라크 국내회사, 유럽회사, 러시아회사, 중국회사들은 끼지 못했다. 그리고 극도로 고통스런 경제변화를 막을 장치는 전혀 없었다. 과거 소련, 남미, 아프리카의 상황과는 달리, IMF 관리들과 국내 정치인들 간의 조율된 협력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재무부가 전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결정했다. (437~8쪽)

 

재건자금은 이라크 공장에 전혀 유입되지 않았다. 그랬다면 공장을 다시 열어 자립 가능한 경제의 토대를 만들고, 국내 일자리를 창출하고, 사회안전망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라크인들은 사실상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미국 연방정부는 USAID와 관련된 업체들과 계약을 맺었다. (442~443쪽)

 

외국기업들이 들어오고 있을 때 이라크의 200개 국영회사에 있는 기계들은 만성적인 정전으로 멈추어 서 있었다. (중략) 이라크 회사들이 노다지 광풍에 참여하려면 비상발전기와 기본적인 기계 수리가 필요했다. (중략) 그러나 이라크 회사들은 계약을 맺거나 발전기를 공급받지 못했다. (중략) 그리고 브레머는 이라크의 중앙은행이 이라크 국영기업에 자금을 제공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경제법령을 제정했다(이러한 사실을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445쪽)

 

이념적 맹목성은 구체적으로 세가지 효과를 냈다. 숙련된 사람들을 직위에서 쫓아내는 바람에 재건에 지장을 주었고, 탈종교적인 이라크인들의 입지를 약화시켰으며, 분노한 사람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브레머가 해고한 군인 40만명의 상당수가 곧장 저항단체로 갔다. (448쪽)

 

그린존에 경험많은 공무원들이 부족한 것은 부주의한 탓이 아니었다 이라크 점령은 처음부터 공동(空洞)정부를 만들려는 급진적 실험이었다. 싱크탱크 직원들이 바그다드에 도착할 쯤, 중요한 재건작업은 핼리버튼과 KPMG에 아웃소싱된 상태였다. 때문에 공무원으로 온 그들의 임무는 단지 현금관리 뿐으로, 수축 포장된 백 달러 지폐다발을 이라크에서 계약업자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즉 조합주의 국가에서의 정부 역할을 보여준 것이다. 정부는 공적자금을 사기업 손에 쥐어주는 컨베이어 벨트인 셈으로 세심한 현장 경험보다는 이념적 충성이 요구되는 직업이다. (452쪽)

 

젊은 시아파 성직자 모크타다 알 사드르는 브레머가 추진한 민영화된 재건의 실패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바스라까지 시아파 빈민가에서 재건 작업을 통해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사원의 기부를 통해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나중엔 이란의 도움을 받아 재건센터를 차렸다. (중략) 또한 그는 브레머 치하의 이라크에서 직업도 희망도 찾지 못한 젊은이들을 데려와 검은 옷을 입히고 러시아제 기관총으로 무장시켰다. 그 결과 마흐디군이 창설되었다. 미흐디는 이라크의 분파 전쟁에서 가장 잔인한 부대다. (중략) 만약 재건작업이 이라크인들에게 일자리, 안보, 서비스를 제공했다면 알 사드르는 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많은 추종자들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457~458쪽)

 

브레머는 민주주의가 조금이라도 생기려고 하면 어디든 제거했다. 임무를 맡은지 6개월도 안되어 그는 헌법의회를 취소해 헌법 작성자들을 선출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리고 수십 군데의 지역 및 지방선거르 무효화하거나 취소했다. 또한 총선이라는 괴물도 제거했다. (중략) 브레머의 총선 취소는 이라크 시아파에 심한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중략) 처음에 시아파의 저항은 대규모 평화시위로 표출되었다. 바그다드에서 10만명이 시위를 벌였고 바스라에서도 3만명이 참여했다.(중략) 평화시위는 아무 효력이 없었다. 이제 많은 시아파 사람들은 다수가 지배하는 민주주의를 현실로 이루려면 투쟁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464~4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