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집에 굴러다니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사실은 딸이 독서 모임 때문에 먼저 읽은 뒤에 재밌다며 추천해 용기를 냈다. 카뮈라고 하면 <이방인>을 만화로 읽었을 뿐이고, 프랑스 문학이라고 하면 어딘지 지루하고 사변적이라는 인상 탓에 책을 잡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페스트>는 생각 외로 재미있었다. 서사가 빠르고 박진감있게 전개되는 소설은 분명 아니고, 등장인물과 이 ‘연대기의 서술자’가 늘어놓는 사변이 꽤 분량을 차지하기 때문에 다소의 인내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페스트 창궐이라는 소설의 설정과 코로나19가 휩쓸고 있는 지금 상황의 유사성 때문에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도시 곳곳에서 쥐들이 죽어나가는 장면 묘사로부터 소설이 시작되는 장면은 코로나의 창궐 과정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적에 가끔 볼 수 있던 쥐가 도시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이 쥐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페스트에 감염돼 숨진 사람의 숫자가 주기적으로 보도되고, 바깥으로 통하는 도시의 출입문이 봉쇄되고, 학교 시설에 거대한 수용소가 마련되는 등의 상황 묘사는 코로나 시대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페스트는 짧게 휩쓸고 사라지는 습격이 아니라 지겹도록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의사 리유가 진료실 건물 계단에서 죽은 쥐를 발견한 것이 4월16일이고 페스트로부터 해방이 선언된 것이 이듬해 2월이다) 페스트에 대한 카뮈의 묘사는 벌써 1년 반째 코로나를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공명한다.
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이다.(236쪽)
팬데믹이 너무도 길기 때문에, 오랑에 사는 이들은 절망에 습관이 들어버린다. ‘절망에 습관이 들어버린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238쪽)
도시는 안정감을 잃었고, 사람들은 부유한다.
이제는 길 모퉁이에서, 카페나 친구네 집에서 평온하고도 무심한 표정을 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게다가 또 어찌나 따분해하는 눈길인지 시 전체가 마치 하나의 대합실만 같았다.(239쪽)
페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 가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말해야겠다. 왜나하면 연애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미래가 요구되는 법인데, 우리에게는 이미 현재의 수간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239쪽)
이 전염병의 창궐에 등장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응한다. 출장왔다가 팬데믹을 겪게 된 신문기자 랑베르는 도피적 태도를, 파늘루 신부는 신의 뜻이라며 체념적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결국 이 재앙에 정면으로 맞서는 ‘반항’(반항은 역자 김화영이 작품해설에서 제시한 어휘다)으로 등장 인물들의 태도가 수렴된다. 이는 카뮈가 던지는 메시지인데, 예심판사 오통의 어린 아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가는 장면에서 이 메시지는 뚜렷해진다.
그 어린애를 기다리는 영생의 환희가 능히 그 고통을 보상해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로서는 쉬운 일이겠으나, 실상은 그 점에 대해서 자기는 아는 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 준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다는 말인가. (292쪽)
민음사판 <페스트>의 역자 김화영은 작품해설에서 ‘이제 문제는 더 이상 신의 벌이나 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면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있다’고 설명한다.
작품의 시대배경은 1940년대다.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는 수모를 겪었던 시대다. 카뮈의 레지스탕스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항’은 그로서는 가장 윤리적인 선택이다. 페스트가 전쟁(독일 침공)의 은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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