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돈의 위기

서의동 2008. 5. 17. 18:54
 지금은 위세가 다소 바랬지만 일본 엔화의 힘은 막강하다. 기축통화인 달러화에는 못미치지만 엔화는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주요화폐다. 하지만 일본 본토에서 멀찍이 떨어진 오키나와(沖繩)현 사람들은 엔화에 대한 불신이 강하다. 50대 이상은 엔화에 대한 애착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왜 그럴까.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때 미국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일본군의 마지막 보루였다. 1945년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은 1972년까지 무려 27년간 오키나와에 대해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이 27년간 오키나와의 화폐는 부침을 거듭했다. 군정 초기에는 엔화가 미 군정이 발행한 ‘B엔화’란 화폐와 함께 통용됐다. 지폐의 바탕에 큼직하게 ‘B’라는 문양이 찍혀 있는 ‘군표’같은 투박한 돈이다. 미군은 군기지 건설에 필요한 물자를 쉽게 조달하기 위해 엔화와 ‘B엔화’의 교환비율을 3대1로 해 ‘B엔고(高)’를 유지했다. 그러자 미 군정하에서 상대적으로 물자가 풍족한 오키나와의 물자를 구입하기 위해 물자 부족을 겪던 본토로부터 엔화가 급격히 유입됐다. 돈이 풀리며 물가가 치솟자 군정부는 1948년 엔화유통을 전면금지하고 ‘B엔화’만을 법정통화로 유통시켰다.

미군은 10년 뒤인 1958년 오키나와에서 법정통화를 달러로 바꾸고 ‘B엔’의 통화를 전면금지시켰고 이후 1972년 오키나와의 본토 반환으로 법정통화는 달러에서 다시 엔화로 바뀌었다. 통화정책이 자주 바뀌면서 이에 편승한 악질적인 가격 인상으로 1972년부터 1년간 물가상승률이 17%나 치솟으면서 서민들은 곤경에 처했다(니혼게이자이신문 2008년 1월14일).

오키나와의 사례는 특수한 예지만 ‘통화불안’이 가져올 충격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통화불안은 화폐가 바뀔 때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물가상승으로 화폐가치가 하락할 경우 커지게 된다. 돈이 제값을 하지 못할 경우 임금 근로자를 비롯, 별다른 실물자산이 없는 서민들은 생활고를 겪기 마련이고 바닥민심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물가불안은 경제체제에 대한 불신을 낳는 것이다.

올들어 물가가 심상치 않다. 유가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고 최근 들어 식량부족 사태마저 일고 있는 한편으로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으로 기축통화인 미 달러화의 가치가 하루가 멀다 하고 추락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16일 발표한 ‘4월중 수출입 물가동향’에 따르면 3월 수입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31.3%급등, 10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소비자 물가는 ‘마의 벽’이라는 4%대를 지난달 돌파했다. 달러값이 하락하면 원화가치는 올라가야 하는데도 1달러에 대한 원화환율은 연초 938.2원에서 16일 현재 1049.4원으로 10% 이상 뛰었다. 

환율이 그만큼 오르면 수출업체들은 덕을 볼지 모르지만 개방시대에 저렴한 외국산 물품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서민가계에 막대한 충격을 미친다. 물가상승과 환율상승(원화가치 하락)이 겹치면서 서민들은 최근 들어 유례 없는 ‘춘궁기’에 신음하고 있다. “남편 월급만 빼고 다 올랐다”는 주부들의 푸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이런 가운데 현 정부 경제팀은 성장에만 치중한 나머지 물가는 뒷전인 인상이 짙다. 올해 정부의 경제정책 우선순위는 분명하다. 우선 물가를 잡아 돈의 가치를 안정시키고 서민들이 경제체제와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부 출범 첫해 정책 신뢰를 잃을 경우 그 후유증은 나머지 4년 내내 지속된다. 물가를 잡지 못하면 민심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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