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중앙은행論

서의동 2008. 4. 17. 18:55
 1950~60년대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의장을 지낸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주니어는 연준의 역할을 “파티가 달아오를 때 펀치볼을 치우도록 지시하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펀치볼은 포도주에 레몬주스, 얼음 등을 섞은 것을 담은 커다란 주발이다. 펀치볼을 파티장에서 치우면 흥청대던 분위기도 일시에 가라앉기 마련이다. 

 중앙은행은 시중에 돈이 풀리고 경기가 과열될 때 금리를 올리거나 돈줄을 죄어 경제에 거품이 끼는 것을 막는다. 물론 물가상승 우려가 없다면 금리를 내려 경기회복을 뒷받침하는 역할도 맡지만 가끔은 경기침체에도 불구,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면 금리를 묶어야 하는 ‘악역’도 맡는다. 

 사정이 이런 만큼 중앙은행은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에게 인기가 있을 리 없다. 경기가 더 확장되고 성장률이 더 올라가길 바라는 이들에게 “잔치는 끝났다”며 흥을 깨는 중앙은행은 성가신 존재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권위와 신뢰성을 인정받고 있는 연준조차 1950년대만 해도 미 행정부와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마틴 의장의 ‘펀치볼’ 발언도 이런 배경을 깔고 있다. 

 1979~87년 연준의장을 지낸 폴 볼커는 고금리 초긴축 통화정책으로 두자릿수에 달하던 물가상승률을 2년만에 한자릿수로 안정시켜 1990년대 호황의 기반을 닦았고 후임인 앨런 그린스펀 못지 않은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볼커 역시 당시엔 행정부로부터 엄청난 미움을 샀던 것 같다.

 그린스펀의 회고록 ‘격동의 시대(The Age of Turbulence)’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뒤 볼커와 대면하자마자 한방 쏘아붙인다. “이상하죠. 사람들은 도대체 왜 우리에게 연준이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걸까요?” 

 부드러운 어조지만 가시가 잔뜩 돋친 이 말은 레이건의 ‘어록’리스트에도 올라 있다.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볼커는 레이건에게 중앙은행이 왜 필요한지를 차분하게 납득시켰다. 볼커의 설명에 만족한 레이건은 이후 그를 신뢰했고 임기 내내 연준을 비난하는 일도 없었다. 1983년 볼커의 임기가 끝났을 때 레이건은 볼커가 야당인 민주당의 당원임에도 연임하도록 했다.

 볼커의 뒤를 이은 그린스펀도 행정부와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연준 통화정책의 신뢰성을 높였다. 그린스펀의 탁월한 역량이 작용했지만 레이건-부시(아버지)-클린턴-부시 등 역대 대통령들의 인내심과 연준에 대한 배려도 큰 힘이 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부터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간에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둘러싼 공방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통화정책을 둘러싼 마찰음이 쏠림경향이 강한 금융시장을 요동치게 하고 있다. 옛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로 불리기도 했던 한국은행이 정부의 통제에서 독립한 지 10년밖에 안됐기 때문일까. 중앙은행을 대하는 관료들의 태도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한은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지난달 발언이 대표적이다. 

 성장을 바라는 관료집단과 경제안정에 무게를 둔 통화당국간의 마찰은 숙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린스펀도 회고록에서 “백악관과 연준 사이의 공개적인 의견 불일치는 투자자들의 신뢰를 흔들리게 할 수 있는 데다 경기회복을 더디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앙은행의 권위는 균형있는 정책판단과 집행에서 시작하지만 정부가 중앙은행의 소신과 의견을 존중하고 배려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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