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1 = 7년전인 2000년 6월 13일 한반도는 온통 흥분에 휩싸였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포옹을 나누던 장면을 TV를 통해 보던 시민들은 일제히 눈시울을 붉혔다. 서울 롯데호텔에 차려진 임시 프레스센터에서 대형화면을 지켜보며 취재하던 기자도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손수건으로 붉게 변한 눈자위를 꾹꾹 눌러가며 기사송고를 위해 노트북을 두드리던 동료기자들의 모습, TV화면이 바뀔 때마다 ‘와’하는 탄성이 장내를 휘감던 일도 생생하다. 정상회담 수행기자로 평양을 다녀온 선배기자는 “자꾸만 가슴이 뭉클해지고 코끝이 찡해오고 눈가에 이슬이 맺히려 했다”로 시작되는 장문의 취재기를 싣기도 했다.
# 장면 2 = 경제계 고위인사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 북한에 다녀온 직후 통일부 기자실을 찾았다. 그들에게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본 소감을 묻자 어떤 인사는 “김 위원장은 눈이 다정하면서도 예리해 보였다”면서 “충분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또다른 인사는 “김 위원장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하겠습디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에이 설마’라고 의심할지 모르겠지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첫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라는 엄청난 회오리가 한국사회를 휘감던 당시엔 그랬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간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사실이 발표된 지난 8일 한국사회의 반응은 7년전에 비해 지나치리 만큼 차분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환영하지만 성과를 지켜보자’는 분위기다. 첫 정상회담 개최합의가 발표됐던 2000년 4월10일 종합주가지수는 32.79포인트(3.92%)나 폭등했지만 8일 주식시장에서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2.34% 오르는 데 그쳤다. 시장 전문가들은 정상회담 호재보다 전날 미국주가의 반등소식이 더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했다.
2000년에 장문의 논평을 냈던 전경련은 8일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평화분위기가 정착된다면 한반도 지정학적 리스크가 해소되고 경제 활력 회복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요지의 짧은 논평만 냈다.
지난 7년간 한국사회는 북한을 많이 배웠고 흥분도 많이 가라앉았다. 남북교류가 늘어나면서 이제 남북합작 드라마까지 공중파를 탈 정도가 됐다. 그 7년간의 학습결과는 ‘남북관계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였다. 실제로 7년의 세월동안 남북간엔 아직 이렇다할 가시적 성과물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이어질 줄 알았던 남북철도 운행도 한차례 시험운행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시장의 담담한 반응 때문에 이번 회담이야말로 오히려 기대해 볼 수 있다. ‘실질적 성과없는 이벤트성 남북대화는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남측사회의 메시지가 북한을 대화에 진지하게 나서도록 하는 ‘지렛대’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북핵문제의 진전과 북·미 관계의 개선이라는 큰 흐름속에 이뤄지는 이번 회담에서 북측은 그간 보여줬던 ‘양치기 소년’같은 면모를 일신해야 한다. 남측 당사자들도 남북관계의 바닥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로 이번 회담을 이끌어갔으면 한다.
증시에 견주면 2000년의 남북관계는 거품이 잔뜩 낀 버블장세였다. 거품이 가라앉고 조정을 거쳐 7년간 바닥을 다진 뒤 성사된 이번 회담은 그만큼 안정적 상승세를 탈 가능성이 높아졌다. 회담에 참여하는 양쪽 당사자들이 ‘작전’에 나서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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