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장생(長生)리스크’

서의동 2007. 6. 26. 14:03
오래 사는 리스크라고? 10여년전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말이다. 지금도 그리 낯익은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오래 사는 리스크’는 분명히 있다. 그것도 외환위기 이후 직장인들에게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리스크임에 틀림없다. 평균수명은 늘어났지만 회사는 빨리 떠나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가 팽창일로에 있던 외환위기 이전만 하더라도 60세에 퇴직한 뒤 10여년치 생활비만 있으면 족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평균수명이 73.96세였다. 하지만 2005년 평균수명은 78.63세로 5세 가까이 늘어났다. 9년만에 5세 가까이 늘어나는 추세를 감안하면 10년쯤 뒤엔 80세를 훌쩍 넘길 게 분명하다. 그러나 직장정년은 평균 10년이상 단축됐다. 회사를 떠난 뒤 적어도 25년, 많게는 40년이상을 더 ‘견뎌야’ 하는 시기가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현역 시절 저축해둔 돈은 인생 후반부에 충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이래서 ‘오래 사는 리스크’란 말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퇴직후 인생 후반부를 설계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외환위기 전만 해도 10%가 넘던 금리가 요즘엔 5%안팎에 머물러 은행이자로는 지탱할 수 없다. 부동산 투자도 정부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운 시장이 돼가고 있다. 최근의 ‘주식광풍’은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하지만 돈만 충분하다고 노후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어떤 노후를 보낼 것인가’이다. 

투자자 교육에 힘쓰고 있는 한 자산운용 회사의 임원은 강연 때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생 현역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현업에서 최대한 능력을 발휘해 퇴직압력에 시달리지 않고 길고 오랫동안 일하는 것이 최상의 재테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결국은 퇴직 이후 인생 후반기의 일터를 찾아나서야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선 여러가지 문제가 걸린다. 번듯한 사무실에서 책상물림을 하다 퇴직한 뒤 주유소나 편의점, 할인점에서 홀가분하게 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미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체면 리스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류 직장의 고위직에서 은퇴해 돈 걱정이 없고 건강에도 문제가 없지만 체면 때문에 헬스클럽이나 주중 골프로 소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임원은 “얼마전에 은퇴한 한 회사의 전직 임원은 은퇴후 자가용을 몰 운전사가 없어지자 자신의 부인에게 운전을 시키고 자신은 뒷좌석에 타고 다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자 아예 바깥 출입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전했다.

현역시절과 꼭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직장은 세상에 없다. 결국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가까운 일본에서 퇴직자들이 편의점이나 선술집에서 허드렛일에 땀방울을 흘리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용돈 정도를 벌면서 자원봉사에서 노후의 보람을 찾는 사례도 일상적인 일이다. 기자가 일본에 체류하던 3년전 일본 도쿄(東京)의 오오타(大田)구청의 소개로 가입한 일본어 서클에는 60~70대 노인 여성들이 교사를 하고 있었다. 1인당 한달 회비가 1만원 안팎이라 돈이 될 리 없지만 도쿄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가와사키(川岐)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이 가르친 외국인이 낯선 타국생활에 적응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들의 표정에서 노년의 무기력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체면을 버리면 기회는 늘어난다. 한국사회도 ‘체면 리스크’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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