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유민(流民)의 시대

서의동 2007. 10. 2. 13:59
“동트는 새벽에 나는 달리고 있어요. 붉게 물들기 시작한 어느 하늘 아래를. 태양이여 나를 이민국에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멕시코계 미국인 여가수 티시 이노호사가 부른 ‘돈데보이(Donde voy·어디로 가야 하나요)’의 앞소절이다. 우수 짙은 음색과 애절한 선율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노래지만 스페인어에 익숙하지 못했던 기자는 뒤늦게 가사의 뜻을 알고 나서 전율했다. 미국 국경 순찰대의 눈을 피해 장벽을 넘어야 하는 가난한 멕시코인들의 절박한 삶의 현장을 여과없이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월경자들은 애리조나주의 사막이나 리오그란데 강을 건넌다고 한다. 고열의 사막에서 탈수증세로 죽어가거나 강에 빠져 목숨을 잃는 이들이 태반이고 용케 강을 건넜더라도 이민국 관리들과의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기다리고 있다.

‘돈데보이’가 담은 현실은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3국이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미·멕시코 국경에서 미국측 국경순찰대에 체포된 밀입국자는 무려 110만명에 달했다. FTA가 자본의 이동은 자유롭게 풀어준 반면 노동력의 이동에는 제약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미 FTA 반대진영에선 멕시코의 현실을 들어 ‘한·미간 노동력 이동의 보장’을 FTA협상에서 제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전지구적으로 본다면 미·멕시코간 장벽이 예외로 간주될 정도로 노동력의 물결이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자본과 상품은 물론 노동력까지 자유롭게 이동토록 한 통합정신에 따라 유럽연합(EU)에선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는 이민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9월 중순 한·EU 자유무역협정 3차 협상이 열렸던 벨기에엔 북부의 플레미시(플랑드르) 지방을 중심으로 이민자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다. 과거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콩고를 비롯, 동유럽과 터키 등의 인력들이 눈에 띈다. 협상취재를 위해 브뤼셀 거리를 다녀보면 이민자들이 많은 북부거리에는 이민자들에게 국제전화와 팩스를 빌려주는 가게들이 눈에 띄곤 했다.

EU에는 몇해전 ‘폴리시 플러머(polish plumber)’라는 용어가 EU내 갈등의 키워드로 등장했다. ‘폴란드인 배관공’이란 뜻의 이 말은 가난한 이민자들이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3D)’업종에 대거 몰려들면서 이민모국의 실업률을 높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폴리시 플러머’로 상징되는 ‘반(反) 이민’ 정서는 EU의 정치통합을 위해 추진된 헌법조약이 부결되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력 이동에 따른 실업률 증가는 그다지 크지 않고 이데올로기화한 측면이 있다는 평가들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다소의 저항과 반동은 있겠지만 ‘유민(流民)의 시대’는 앞으로 좀더 시간이 흐르면 전 지구적 현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과 분단이라는 정치적 환경이 겹쳐 한국은 해방이후 한동안 순혈주의의 틀안에서 지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인력이동’이라는 전지구적 현상에서 우리도 점차 예외일 순 없게 됐다. 이미 수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우리 산업현장의 빈구석을 채우고 있고 농촌마을엔 베트남 여성이 이장을 하는 곳도 생겨났다. 앞으론 의사·간호사들이 선진국으로 떠나고 그 자리를 외국인이나 북한 인력들이 채우게 될 수도 있다. 순혈주의로 뭉친 일본도 필리핀 간호사와 조무사 인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상품과 자본에 이어 노동력의 이동이 대세가 되는 시대를 우리는 별탈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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