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거 본거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반란

서의동 2010. 7. 2. 14:23
 미셸 캉드쉬. 한국인을 트라우마에 휩싸이게 하는 이름이다. 국가 부도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1997년 캉드쉬 총재는 한국에 초긴축 정책과 구조조정 등 감내하기 힘든 조건들을 요구했다. 연 20%대의 살인적인 고금리에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고,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대량해고 사태를 몰고 왔다. IMF의 처방에 대해 당시에도 가혹하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캉드쉬 총재와 협상했던 임창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우리나라는 물가가 안정돼 있고 재정도 건전해 고금리 정책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호소했지만, 캉드쉬는 “고금리 정책은 IMF의 전통적 처방이라 뺄 수 없다”며 강경입장을 보였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6월초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가 “당시 어떤 실수가 없었다고 말하지 않겠다”며 한국 외환위기 당시 IMF의 정책에 일부 잘못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4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캉드쉬가 IMF 총재로 있을 때 한국에 외환위기가 왔으며 당시 IMF는 일방적인 룰을 일괄적으로 적용하고 초긴축 정책을 취해 한국 국민이 많이 어려웠다”고 지적한 데 대한 화답인 셈이다.

 어려움에 처한 개발도상국에 IMF가 구제금융을 해주는 대가로 내세운 경제정책이 성장의 발목을 잡고, 위기를 촉발시키며 경기침체를 불러왔다는 비판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낮은 인플레이션과 긴축재정, 민영화와 자유화를 강조한다. 급전을 받는 나라들은 경제체질을 바꿔야 한다.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사회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는 경제관료와 학계 전반에 걸쳐 경제철칙으로 군림해왔다. 구제금융 직후의 처방에 대한 비판은 있었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경제정책에 대해 체계적인 반론을 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이단의 경제학>(시대의창)은 워싱턴 컨센서스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경제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2000년대 중반 정책대화구상(IPD)을 결성해 수년간 진행한 논의 결과를 정리한 책이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와 호세 안토니오 오캄포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사무차장, 리카르도 프렌치-데이비스 칠레대학교 교수 등이 참여했다.

 책에는 기자가 가져왔던 통념을 뒤집는 대목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재정적자를 줄이면 투자가 늘어나 경제의 활력이 회복된다’는 통설이 개발도상국에서 효과를 발휘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이 책은 지적한다. 특히 금리인상론을 ‘보수파들이 인플레이션 위협에 대처하는 상투적인 정책’으로 규정한 대목은 충격이다. 6월 한국사회에서 금리인상론자들은 개혁진영이고, 보수진영이 금리동결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만저만한 인식의 착종(錯綜)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렇다 할 모범답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 책은 경제정책 수행과정에서 대화와 소통을 주문한다. ‘장기적인 사회후생을 공평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극대화하는’ 경제의 본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주체들과의 협치(協治)가 중요함을 일깨운다. 이 책에 비춰본다면 본다면 4대강 사업 등을 의견수렴없이 밀어붙이는 이명박 정부하에서 ‘경제정책’이라고 할만한 행위는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