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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다르다]경제 위기마다 반복되는 뻔한 소리

서의동 2010. 8. 5. 22:26
2007년의 기억을 잠깐 떠올려보자. 

코스피지수가 2000을 넘어서자 증권사들은 한국증시가 1980년대 일본과 흡사한 대세 상승기를 맞았다는 등의 리포트를 쏟아내며 투자를 부추겼다. 
한 자산운용사가 내놓은 펀드에 가입하려는 투자자들이 길게 줄을 서는 일도 드물지 않은 풍경이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는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회사들이 하나둘씩 파산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초 IT 거품붕괴가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우려들도 조금씩 흘러나왔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라는 낙관론에 묻혀 버렸다.

금융위기는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의해 빚어진다. “이번엔 다르다”는 신드롬은 여기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역할을 한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에도 이번엔 다르다는 논거들이 지배했다.

①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신뢰할 만하고 혁신적인 금융시스템과 가장 큰 자본시장을 갖고 있다 
②개발도상국들은 자신의 자금을 안전하게 투자할 장소를 찾는다 
③글로벌 금융통합으로 자본시장은 더욱 발전했고 각국 정부가 더 많은 부채를 조달할 수 있게 됐다 
④새로운 금융신상품들은 새로운 채무자들이 모기지(주택대출) 시장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이런 논거들은 미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이후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번지면서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이후 투자은행이 자본금의 3배까지 빌릴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규제를 푸는 등 미 금융감독당국의 직무유기들이 확인됐다. 미국의 회계시스템이 불투명하다는 점들도 지적됐다. 그보다는 당시엔 느끼지 못했던 위험성이 뒤늦게 부각된 것에 불과하다.

1929년 대공황 이상으로 세계경제에 타격을 준 미국발 금융위기는 과다한 차입에 의해 쌓아올린 경제는 반드시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된다는 진리를 재확인시켰다. 지속되는 경기 호황이 거품을 낳고, 낙관에 기초한 과도한 부채 증가가 금융위기로 이어진다. 
하지만 금융전문가와 고위관료들은 늘 과거의 실수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었다고 강조하면서도 “지금의 호황은 과거와 달리 기술 진보와 훌륭한 기반 위에 세워졌고 구조개혁이 완성됐다”며 당대의 거품을 합리화한다.

금융위기는 현대 자본주의 시대 특유의 산물이 아니라 은행이 처음 등장하던 13세기부터 세계사 곳곳에서 출몰해왔다. ‘이번엔 다르다’는 신드롬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위기의 장식물이다. 
예를 들면 1929년 대공황 직전 미국의 한 신문광고에는 “1917년의 미시시피 버블과 같은 공황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투자하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와 카르멘 라인하트 메릴랜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800년간 66개 국가에서 일어났던 금융위기들을 다양한 데이터를 통해 입증한 책이 <이번엔 다르다>(다른세상)이다.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금융위기에 대한 설명적 접근보다는 풍부하고 다양한 데이터들을 통해 지난 800년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대신 금융전문가들도 쉽게 접하기 어려운 국가 채무 데이터 등 귀중한 자료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미덕이다.

저자인 로고프 교수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금융위기가 수년내 재발할 가능성은 낮을 것이라며 “사람들의 기억속에 최근의 위기가 너무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사람들의 뇌리에 위기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는 10~15년쯤 후에는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