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 쓴 글

금융위기 2년 일본은 지금

서의동 2010. 9. 17. 11:18

서의동
 

지난 2일 오후 도쿄시내 JR 다마치 역. 평소 2~3분이면 오던 열차가 10분 넘게 지연됐다. 잠시후 “인명사고 때문에 열차가 늦어지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울렸다. 

인명사고란 자살사고를 의미한다. 열차를 기다리던 시마다 아사코(62·여)는 “JR 노선 중에서 특히 외곽을 잇는 노선에서 인명사고가 많다”며 “금융위기 이후 더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도쿄 시내 중심가의 지하통로에는 70대로 보이는 노숙인이 섭씨 30도가 넘는 온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통로바닥에 누워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도쿄 인근 사이타마의 빈곤지원단체인 호토포토의 후지타 다카노리 대표이사(28)는 “금융위기 이후 네트카페(PC방) 숙식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단체의 상담건수는 2007년 147건에서 금융위기 이후인 2009년 805건으로 4배 이상 늘었다. 

금융위기 이후 2년이 지났지만 일본 경제는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지난해 잠시 회복세로 돌아서는가 했더니 올 들어 다시 하강 우려가 커지고 있다. 뚜렷한 성장동력이 없는 상태에서 수출에 비해 수입이 크게 줄어 초래되는 ‘불균형 흑자구조’가 고착화하면서 엔고현상을 부르는 악순환도 재연되고 있다. 

일본경제의 고전은 지표에서도 확인된다. 

5월 기계수주는 시장의 예상치(전월대비 2.5%)를 크게 밑도는 9.1% 감소했고, 6월 광공업생산지수도 마이너스 1.5%를 기록했다. 지난해 V자 회복을 한 일본경제가 올들어 다소 둔화될 것으로 예상되긴 했지만 최근 지표들은 시장의 예상치를 크게 밑돌면서 우려가 커졌다. 

도이츠증권 아다치 세이지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엔고현상과 아시아 수출감소, 개인소비 둔화 및 저축률 증가가 예상치 못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의 긴축정책으로 일본의 대중수출이 올들어 급감한 데다 엔고현상이 강화된 것이 기업 경쟁력 약화를 가져온 것이다. 

민간소비도 최근 들어 둔화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정부의 세금우대 조치로 일었던 내구재 소비붐이 외식·숙박 등 서비스 부문으로 옮아붙을 것이란 예상이 빗나간 셈이다. 지난 5월 민간소비 지표를 보면 음식서비스업은 전달대비 1.3%, 숙박업은 2.4% 감소했다. 

민간소비는 금융위기 이후 급감한 뒤 다소 회복되긴 했지만 여전히 부진한 편이다. 

대학강사인 이와사키 요시코(59·여)는 “금융위기 이후 가계에서 여행과 외식비, 강습비를 줄였다”며 “아이가 있는 집에서 가정교사비를 줄이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말했다. 
도쿄 인근에 거주하는 회사원 이토오 마사토시(39)는 “일본 국민들은 ‘잃어버린 10년’ 이후 특히 금융위기 뒤 적극적인 소비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이번 엔고로 다시 한번 실직이나 경제위기가 닥쳐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관광산업도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한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불어닥친 엔고로 관광산업은 또 한번 직격탄을 맞았다.도쿄 인근 유명 온천지역 닛코에서 일하는 노무라(32)는 “엔고로 한국과 중국 및 유럽인들의 관광이 크게 줄었다”면서 “골프장도 고객이 줄어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긴축정책을 지속하게 되면 대기업들의 설비투자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도 커진다. 수출·내수·설비투자 등 3가지 지표가 모두 둔화되면서 회복세가 다시 꺾일 가능성이 있다. 

아다치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상태가 지속될 경우 더블딥 가능성도 있다”며 “더 큰 문제는 중국 등 해외의 긴축완화를 기대하는 것 외에 경기 대응수단이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우에노의 아메요코초 copywrite by 서의동


 
전문가들은 엔고현상은 경상수지 흑자폭이 커질수록 심화된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는 수출이 증가하거나 수입이 감소할 때 커지는데, 일본의 최근 엔화 강세는 수입감소형 불황형 흑자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져 실업률이 높아지고 소비가 줄면서 수입이 감소한 것이다. 

우에노 히사시(45)는 “과거와 같이 젊은 남성들이 자동차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80년대에 나온 음향기기인 워크맨처럼 사고 싶은 일본 제품이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중국기업이 탄탄한 기술력을 가진 일본업체들을 인수하는 현상도 확산되고 있다. 

일본 제국 데이터뱅크의 조사에 따르면 8월 현재 중국기업이 출자한 일본기업은 611개사에 달한다. 경영난을 겪었던 교토의 태양전지 부품생산업체인 에바테크가 올초 중국 랴오닝고과능원집단에 45억엔(약 630억원)에 인수됐다. 
터치패널의 필름 제조업체인 나고야시의 토산필름도 중국계 펀드에 인수됐다. 박근호 시즈오카대 교수(경제학)는 “일본 기업들은 물건만들기에는 강하지만 전략적인 판단에는 서투르다”며 “최근 중국이 정보기술(IT) 분야의 경쟁국인 대만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면서 일본경제의 입지가 더 좁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 민주당 정부는 저소득층 가계의 소득증대에 따른 내수확대로 경제를 선순환시키겠다는 목표아래 각종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올해 최저임금이 8년만에 가장 큰 폭으로 인상된 것은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막대한 재정적자와 엔고에 따른 기업 해외이전,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내수감소 등 산적한 경제과제를 해결하려면 세제개혁을 비롯한 근본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오학수 일본 노동정책·연수기구 주임연구원은 “일본경제가 안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소비세를 선진국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