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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 될 수도 있었던 소리바다의 수난사

서의동 2010. 10. 14. 17:03
 

‘랜선’으로 불리는 광통신망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2000년대 초반의 어느날. 사무실 동료를 통해 ‘소리바다’라는 사이트를 알게 됐다. 자신이 보유한 파일을 인터넷을 통해 주고받는 P2P방식의 이 서비스에 흠뻑 빠져 며칠동안 밤낮으로 음악을 다운받던 기억이 새롭다. 

2000년 5월 등장한 소리바다는 4개월 만에 가입자가 75만명, 이듬해에는 600만명, 3년만에 2000만명을 기록했다. 음반이 절판돼 유통되지 않는 음악, 제3세계 음악 등 기존의 유통망에선 구할 수 없는 음악을 소리바다를 통해 공유하게 되자 네티즌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소리바다는 그저 평범한 인터넷 음악서비스의 하나일 뿐이다. 지난 10년간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리바다는 왜?>(현실문화)는 이 과정을 추적한다. 

P2P서비스는 대중들에게는 환영받지만 음반제작자들과 저작권자들에게는 용서못할 존재였다. 이들은 소리바다를 불법 서비스라며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법정공방을 포함해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네티즌들이 소리바다를 옹호하기 위해 뭉쳤고, 소리바다도 권리자들과의 상생방안을 찾아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터넷 음악서비스 시장은 거대 이동통신사들의 승자독식을 위한 장으로 변질됐다. 정부도 대기업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게임규칙을 만들면서 소리바다를 규제했다. 

소리바다가 추진해왔던 서비스 혁신은 결국 좌초됐다. 세계시장을 목표로 삼성전자와 함께 추진하려 했던 모바일 전용 음악서비스 사업은 2007년 10월 서울고법의 ‘소리바다5’ 서비스 중단 판결로 접어야 했다. 한달 뒤 노키아가 거의 같은 서비스를 ‘컴즈위드뮤직’이란  이름으로 출시해 유럽 시장을 장악했다.  

김대중 정부 당시 범정부 차원의 지원으로 한국은 세계최고 수준의 초고속통신망을 갖췄고, 이를 기반으로 혁신적인 인터넷 서비스들이 속속 등장했다. 
하지만 소리바다의 좌절이 보여주듯 국내 디지털 콘텐츠 사업은 활력을 잃어갔다. 이동통신사와 몇몇 대기업들이 수익 극대화를 위해 중소기업과의 경쟁을 차단하고, 소비자들에게 불합리한 서비스를 강요하면서 변화의 싹을 차단해 버렸기 때문이다. 
디지털 콘텐츠는 통신망이 아니면 유통되기 힘든 상황에서 우월적 지위를 가진 망 사업자들이 콘텐츠를 팔도록 하는 불공정 행위마저 허용됐다. 이통사들은 심지어 벨소리와 통화 연결음 같은 자잘한 사업까지 싹쓸이하며 국내 모바일 생태계를 고사시켰다. 

이런 환경에서 중소벤처기업이 창의력과 아이디어로 승부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소리바다를 둘러싼 일련의 분쟁 과정을 다룬 이 책은 우리나라 디지털 콘텐츠 산업의 일그러진 과거를 되돌아볼 기회를 준다. 이 책 후반부에 실린 소리바다 양정환 대표의 지적은 음미할 만 하다. 

“미국은 냅스터가 사라진 이후에도 구글이라는 걸출한 서비스가 등장했고, 페이스북과 트위터 같은 혁신 서비스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네이버 이후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는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취약하다. 모바일이든 인터넷이든 대기업이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어 중소기업과 개인 개발자들에게까지 기회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