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도 정책의제가 개발에서 복지로 바뀌는 변화의 흐름이 뚜렷해졌다. 6월 지방선거의 무상급식 이슈는 선별적 복지에서 보편적 복지로의 정책전환을 요구하는 민심의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이런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는지 한나라당내에서 잠시 감세 철회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역시나’ 본질은 변할 수 없는 법,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어쨌건 한나라당 내의 복지담론, 감세철회나 정부의 ‘친서민’정책은 보수진영도 복지요구를 끌어안아야 할 상황임을 잘 드러낸다.
얼마 전까지도 정부와 여당은 복지확충 요구에 “국가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포퓰리즘이자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는 논리를 펴왔다. 숫자에 약한 진보진영들는 반박논리를 찾지 못해 속수무책이었다. 국가재정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디테일’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마침 이 ‘디테일’을 메워줄 만한 책이 나왔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이 쓴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레디앙)는 국가재정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다.
‘국가재정 3총사’로 통하는 일반회계, 특별회계, 기금 등의 역할과 쓰임새와 국가재정이 어떤 방식으로 운용되는지, 조세체계의 문제점, 국가재정을 좀먹는 부실한 예비타당성 조사의 문제점 등을 해설한다.
2004년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 보좌관으로 근무하면서 국가재정을 처음 접한 저자가 전화번호부만한 예산서들과 일일이 씨름해가며 깨우친 ‘공력’이 바탕에 깔려 있어 독자 눈높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나라 재정건전성 문제의 근본원인은 ‘과다지출’이 아니라 ‘적은 수입’이라고 지적한다. 국가재정 규모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 비해 110조원이나 부족하다. 특히 비중이 GDP대비 4.4%로 OECD평균(9.4%)에 비해 무려 5%포인트(약 50조원)가 낮은 소득세가 문제다. 고용보험이나 건강보험 등 사회보장기여금 비중도 GDP대비 5.5%로 OECD평균 9.1%에 비해 크게 낮다.
문제해결을 위해선 증세가 답이지만 ‘부자증세’만을 부르짖는 타성으론 어렵다. 중간계층 이상이 어느 정도 부담을 지면서 부유층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62%에 불과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높이기 위해 가입자들이 보험료를 더 내는 방안이 ‘국고지원 확대’ 요구보다 현실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하기 위해 1인당 월 1만원씩을 더 내자는 시민운동이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월 1만원이면 4인 가구로 치면 연간 50만원 가까이를 더 내야 하는 부담스러운 제안이긴 하다. 하지만 진보진영이 복지재정을 ‘국가와 기업이 책임지고 늘리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동안 사보험이 세상을 장악해가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방치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복지재정 확충을 위해서도 조세저항이 예상되는 소득세 인상보다 사회복지세를 신설해 ‘복지확충 특별회계’(가칭)에서 관리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이 역시 상위 5%만을 대상으로 부과하는 대신 중간계층의 자발적 참여 방식으로 부자들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내라’보다는 ‘내자’ 운동이다.
복지해결을 위해서는 ‘부자증세’ 등 국가와 기업을 상대로 한 ‘요구투쟁’보다는 ‘참여재정’으로 운동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게 노동운동 출신이자 재정전문가인 저자가 내린 결론이다. 숫자에 약한 진보진영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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