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등이 아니면 안되는 겁니까? 2등이면 안되나요?”
모델 출신으로 일본 민주당 정권의 각료가 된 렌호(蓮舫) 행정개혁상은 민주당 정부가 주도한 공개 예산심사에서 불필요한 예산의 삭감을 주도해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2009년말 슈퍼컴퓨터 개발 예산의 타당성을 심의하면서 이렇게 물었다가 보수세력들의 반발에 휩싸여 예산삭감에 실패했다.
이 에피소드는 오래전 경제대국이 됐지만 만족할 줄 모르는 일본의 초조감을 드러낸다. ‘버블붕괴’ 이후 장기불황에 중국 경제의 부상 등을 거치면서 ‘일본은 계속 1등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협정(TPP)협상을 두고 “이번 버스에 타지 않으면 뒤처지고 만다”는 논리도 이런 심리를 한껏 자극한다.
<성숙일본, 경제성장은 더 필요없다(成熟ニッポン,もう經濟成長はいらない>(아사히신문출판)은 일본이 이런 불안심리 때문에 사회격차를 키우는 ‘자기궁핍형 성장’으로 치닫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책은 도시샤(同志社)대에 함께 재직 중인 다치바나기 도시아키(橘木俊詔·경제학부) 교수와 하마 노리코(浜矩子·비지니스연구과) 교수간의 대담집이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채권 보유국이자 풍부한 자산과 경제사회 인프라를 갖춘 성숙경제 국가이기 때문에 성장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대담자들의 주장이다. 하마 교수는 국내총생산(GDP)과 국민총생산(GNP)의 개념 비교를 통해 일본경제를 설명한다.
국내에서 생산된 부가가치가 GDP라면 여기서 외국인이 생산한 부가가치를 뺀 뒤 일본인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더한 총액이 GNP다. 일본은 GNP가 GDP를 월등히 앞서 있으며 수출에 목을 매는 개발도상국과 차원이 다른 경제수준에 진입한 지 오래다.
이런 본모습을 깨닫지 못한 채 일본은 ‘간바레(열심히)’를 외치며 개도국들과 수출경쟁을 벌이고, 그 결과 ‘유니클로형 성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 임금을 낮추면, (근로자이기도 한) 소비자의 구매력이 낮아지고, 그래서 가격을 더 낮추는 ‘제살 깎아먹기’가 반복된다.
대담자들은 일본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우아한 노령국 모델’을 제시한다. 현역에서 물러나 다달이 들어오는 이자수익으로 정원을 가꾸며 여생을 즐기듯 우아하게 쇠퇴하는 길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대신 해외투자로 벌어들인 부를 나누어 격차를 해소하고, 지역경제와 지역공동체의 내실화로 ‘도쿄 일극체제’를 탈피하는 데 힘을 쏟자는 것이다. 하마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일본에 필요한 것은 외적팽창이 아니라 ‘내적 세포분열’이다.
최근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경제학자인 하마 교수지만 “연 1~2%의 저성장도 좋고, 1등이 아니라 5등, 10등도 좋다”는 제안은 일본에서 아직 소수의견에 속한다. 해외에서 쌓은 부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 등의 ‘세밀화’도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일본형 시스템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그의 생각은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저성장 체제 진입이 머지않은 한국으로서도 눈여겨 볼만한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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