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후쿠 대지진이 발생한지 2주일이 됐지만 일본사회에 깊이 팬 상흔은 치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재해지역에서는 필요한 조치를 받지 못해 죽어가는 이들이 있고, 후쿠시마 원전은 아직도 수리중이다. 아무리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라지만 사회 시스템이 잘 짜여진 것으로 믿었던 선진국 일본의 현재 모습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특히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신화를 창조한 당사국이 이 위험한 물건을 얼마나 허술하게 다뤄왔는지도 드러나고 있다. 경제발전의 모범국가에서 ‘불신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전락한 일본의 실패는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일본형 시스템의 문제점을 진단한다.
#지난 17일 이와테현 오오후나토시의 한 대피소 앞 광장에 갑자기 미군 헬기가 착륙했다. 헬기에서 내린 미군들이 식료품과 음료수 등 지원물자를 운동장에 내려놓자 먹을 것이 없어 어려움을 겪던 피해주민들은 어안이 벙벙해 했다. 한 피난주민은 “예고없이 찾아와 깜짝 놀랐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다”고 말했다. 대재난을 당한 일본에 세계 각국이 식료품과 비상물자들을 보냈지만 일본 정부가 “관련 매뉴얼이 없다”는 이유로 전달을 늦추자 미군이 직접 물자를 전달한 것이다. TV를 통해 방영된 이 화면은 유투브에 올라 1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고 수십개의 댓글도 붙었다. 일본어로 올라온 댓글중에서는 미군에 감사를 표시하면서 “정부는 보신주의에 ‘검토’만 하고 있다”며 늑장대응을 질타하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을 관리하고 있는 도쿄전력은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원전에 바닷물 투입을 미루다가 화를 키웠다. 도쿄전력은 지진 발생 다음날인 12일 오전부터 원자로에 대한 해수투입을 늦추다가 간 나오토 총리의 불호령이 떨어진 뒤에나 실행에 옮겼다.
지난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발생한 매그니튜드 9.0의 초대형 지진과 쓰나미는 불가항력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대재난 이후 일본 정부가 보여준 대처능력은 낙제점이었고 구조와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숨져가는 국민들이 속출하는 등 ‘2차 재난’도 늘어나고 있다. 매뉴얼에만 의존하다 보니 시급을 요하는 상황에서 늑장대처하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사태수습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뿌리깊은 관료주의와 ‘매뉴얼’ 의존 시스템의 맹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국토교통성은 지진 발생 5일만인 지난 16일 구호물자 부족에 한파가 몰아친 도후쿠 지방 지원을 위해 미야기현 센다이시와 이와테현의 가마이시, 미야고시의 항구를 긴급복구하고 17~18척의 수송선박도 확보했다. 하지만 어떤 물자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총리실 ‘긴급재해대책본부’의 결정이 늦어지면서 구호물자 보급을 늦춰야 했다. 민간차량이 고속도로 통행허가증을 받으려면 해당 경찰서에 직접 가서 수속을 밟는 까다로운 절차도 1주일 가까지 유지됐다. 어떤 국가는 재해지역 실종자 수색을 위해 구조견 5마리를 파견하려다 일본 당국이 ‘광견병 청정지역’이라며 난색을 표해 하는 수 없이 1마리만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외교소식통은 “외국 구호대원 중 의사가 포함돼 있자 ‘외국인의 의료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규정을 들어 따지는 바람에 입국절차가 지연됐다는 이야기도 있다”며 “몇만명씩 행방불명된 나라에서 절차를 따지고 있는 일본 당국을 보면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일본은 전자기기의 정밀회로처럼 촘촘하게 짜인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설계자 격인 관료들은 복잡한 작동 매뉴얼들을 만들어냈고 이를 지키면 별 문제 없이 작동되는 체제가 구축됐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지만 일본인 특유의 근면성은 이런 비판을 잠재웠다. 매뉴얼에 나와 있지 않은 초유의 대재난이 닥쳤지만 관료들은 매뉴얼에 집착하고 있다. “매뉴얼 대로 했다”는 변명과 책임회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관료주의의 벽을 허물고 상황을 이끌어야 할 리더십이 없다는 점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1955년 이후 형성된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는 고도성장기가 끝나면서 효용을 상실했다. 이를 대체할 새로운 리더십이 태동하지 않은 것이다. 2009년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관료주도’에서 ‘정치주도’로의 이행을 다짐했지만 기성체제의 저항에 부딪쳐 진퇴위기에 몰려 있다. 국민의 지지를 개혁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민주적 리더십이 기대됐지만 이내 정치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일본 고쿠시칸대 신경호 교수는 “일본은 패전 이후 관료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지만 하지만 그 바람에 사회전체가 집단화됐고 창의력과 상상력이 결핍됐다”며 “변화를 가져올만한 리더십이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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