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식량과 약품입니다. TV를 보시는 여러분들 도와주세요….”
24일 오후 NHK 화면에 비친 미야기현의 한 대피소. 재난 이후 2주가 다되도록 가족과 연락이 끊긴 피해지역 70대 노인은 TV카메라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전기는 들어왔지만 가스는 여전히 끊긴 대피소에서 영하의 날씨를 담요 한장으로 견뎌야 하는 피난민들이 적지 않다.
도코 오오타구에 사는 고바야시 다카코(40)는 3살과 7살 난 딸을 당분간 간사이 지방의 친척집에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 도쿄 수돗물에서도 방사성 요오드가 검출된 뒤 아이에게 물을 먹이기가 겁이 나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이미 나고야나 간사이의 친척집으로 대피한 아이들도 있다. 다카코는 “원전 때문에 도쿄와 간토지방이 패닉상태에 빠져들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대지진을 겪은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 일본인들이지만 이번은 다르다. 자연재해의 불가항력적인 위력 앞에서, 더딘 복구작업과 물자지원 때문에 두번, 세번 운다. 대부분 20년에 걸친 불황속에서도 묵묵히 일에 전념해온 서민들이다. 그들이 흘린 눈물 만큼 목소리도 낼 수 있을 것인가. 이번 대지진이 일본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조금씩 제기되고 있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교수는 최근 한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지진이 젊은 세대를 주축으로 하는 사회개혁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일본인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신력을 되찾는다면 그간 못했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바루시카 나이(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라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능동적 개혁 움직임이 본격화 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지진 이후 우선 원전중심의 에너지정책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을 설계한 오구라 등은 지난 17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부실공사 의혹을 제기하며 원전정책에 대한 반대입장을 밝혔다. 트위터에서도 “이러고도 원전건설을 계속한다면 과연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라는 의견들이 올라오고 있다.
관료와 대기업이 이끄는 고성장 체제가 구축한 일본형 시스템은 1990년대 ‘거품붕괴’ 이후 한계에 봉착했다. 너도 나도 중산층이라는 ‘1억 총중류(중산층)’ 사회는 ‘격차(양극화)사회’로 퇴행했다. 2000년대 중반 노동규제 완화로 저임금 불안노동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기성체제에 대한 청년층의 불만이 팽창했다. 2008년 금융위기를 전후로 불안정 노동과 빈곤에 대한 반성이 일면서 불안노동을 규제하려는 노력들이 진행됐고 이런 자각을 바탕으로 2009년에는 선거를 통해 최초로 정권교체가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개혁에 대한 기성체제의 저항이 끈질기게 이어지면서 민주당 정권은 지지기반이 크게 약화된 상황이다.
물론 당장 개혁요구의 움직임이 본격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게 현지 분위기다.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해야 할 시점에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은 지지를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작가 겸 사회운동가인 아마미야 가린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진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불만도 많지만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면서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 정부비판을 하다가 ‘비국민’ 취급을 당할 수도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후지TV가 지난 17일 수도권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간 내각 지지율이 35.6%로 직전 조사(3월3일) 때의 24%에 비해 11.6% 높아진 것도 이런 분위기를 드러낸다.
개혁추진의 구심점이 없는데다 자칫 엉뚱하게 우경화로 치달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일본학과)는 “일본 국민의 불만과 사회개혁 요구를 수렴할 만한 대안세력이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며 “위기의식을 틈타 정치권에 국민주의 같은 형태의 내셔널리즘이 강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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