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도호쿠 대지진의 충격은 미국의 ‘9·11’ 테러 이상으로 일본에 근원적인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1945년 8월15일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펼쳐진 일본의 전후(戰後)질서가 막을 내리는 시대구분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대지진을 계기로 일본은 ‘전후’에서 ‘재후(災後)’체제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다. 단순한 재해복구나 복원이 아니라 신질서를 창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대지진을 1868년 메이지유신, 1945년 패전에 이은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들이다.
미쿠리야 다카시 도쿄대 교수(일본정치사)는 최근 요미우리신문 기고에서 도후쿠 대지진은 복원이나 부흥차원이 아닌 ‘국토창조’를 상정해야 할 정도의 사태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후 정치’라는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쿠리야 교수는 “대지진 사태는 재정·금융은 물론, 산업·에너지 구조, 정보통신, 외교·안전보장, 환경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차원의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며 “전후 정치의 상식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고 ‘재후 정치’라는 대담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쿠리야 교수는 대지진이 일본이 벗어나고자 해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고도성장형 체제에 종막을 고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전국민이 겪은 대지진의 강렬한 공통체험이 새질서의 전환에 탄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1980년대 이후부터 전후 체제를 청산하기 위해 다양한 모색을 벌여왔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점령군 미국에 의해 조성된 질서 속에서 고도성장을 구가해 왔지만 한계점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뿌리깊게 자리잡힌 고도성장형 시스템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데다 90년대초 경제의 거품이 꺼지면서 진작 폐기됐어야 할 전후 체제가 불가피하게 지속돼 왔다. 이 때문에 도호쿠 대지진이 가져온 충격은 전후 질서를 ‘강제 종료’하는 긍정적 효과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대재진의 충격은 자연스럽게 전후 체제 하의 모순을 일거에 드러낸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25일 ‘세번째의 기적’이란 연재기사에서 “대지진은 수도권 집중현상 등을 비롯한 일본의 모순을 끄집어낸 계기”라면서 “사태의 수습이 일본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진정한 복원 또는 ‘창조’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나카니시 히로시 교토대 교수(국제정치)도 이날 신문 기고에서 “일본이 지난 20년간 도쿄에 자원을 집중해 경제효율화를 꾀하고 경제전반의 수준을 높이는 정책을 취했지만, 중앙-지방간 격차를 확대시키고 신흥국에 추격을 허용하는 결과만 초래했다”며 대지진을 계기로 수도권 집중의 경제구조를 탈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에너지 분야에서도 관료주의적 원전중심 정책에서 지방분권형 에너지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가와카쓰 헤이다 시즈오카현 지사는 지난 24일 아사히신문 기고에서 “일본 전체로 40만ha에 달하는 경작포기 농지에 태양광발전 패널을 설치하는 등 대체 에너지 정책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와가쓰 지사는 전력부족 사태를 계기로 가정과 직장단위에 태양열 발전설비 보급을 늘리는 등 전력회사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음달 10일 실시되는 지방선거에서도 에너지와 방재대책, 식품 안전성 확보 등 다양한 쟁점을 둘러싸고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기성 정치권이 재난이후 불거진 문제점과 각 사회계층의 이해와 요구를 골고루 반영해 새 질서를 이끌어갈 역량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재후정치’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정치적 ‘이단아’가 필요하다(미쿠리야 교수)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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