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 쓴 글

정부가 푼 돈으로 간신히 경기 지탱

서의동 2009. 5. 14. 18:11

시중에 풀린 800조원이 주식·부동산시장 호황 이끌어

최근 우리 경제에는 두 가지 신호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외국의 경제 전문가들이 한국 경제에 대해 호평을 늘어놓고, 주식시장도 과열이 우려될 정도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4월 실업자 수가 100만 명이 넘어갈 것이라는 기획재정부 장관의 경고가 나오는가 하면, 하반기 경기가 다시 침체 기미를 보이며 더블딥(Double dip)이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경제에 대한 신호가 이처럼 혼재한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한국 경제의 실제 모습이다. ‘동전의 양면’ 혹은 ‘야누스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이 현상의 근저에는 ‘지나치게 많이 풀린 돈’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 경제의 체력은 좋은가

한 나라의 경제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은 환율이다. 한국은행 김성 과장은 “한 나라의 경제에 대한 평가는 결국 돈으로 바꿀 때 비율로 나타난다”며 “평가가 좋으면 높은 비율로 쳐줄 것이고, 낮다면 디스카운트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환율 급등(원화 가치 폭락)의 이유도 따지고 보면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고유가 등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되고, 자본수지마저 나빠졌다. 이명박 정부가 초기에 수출 대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고환율 정책을 쓴 것도 작용했다.
하지만 환율은 지난해 한때 1500선을 넘어 고공행진하다 최근 들어 1260원대로 떨어지며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달러화에 대한 원화의 강세는 최소한 한국 경제가 미국에 비해 회복 속도가 빨라지고 있고, 세계 주요국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나은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 한국의 원화가 기축통화, 혹은 중국의 위안화처럼 역내에서 통용될 정도의 힘이 없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할인율까지 감안한다면 흐름이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환율 한 가지로는 경제 체력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환율 안정은 외국인의 국내 주식투자가 늘어나는 것과 상관관계가 크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주식투자가 늘어난 것은 한국 기업들을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이긴 하지만 경제의 주체는 기업만이 아니라, 정부와 가계도 포함되느니만큼 주식시장만으로 전체 경제 상태를 파악하는 데 무리가 있다.   
이런 이유로 경제 분야에서 흔히 쓰는 용어인 ‘펀더멘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제 기초 여건’으로 풀이되는 펀더멘털은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 실업률, 경상수지 등 주요 거시 경제지표들의 상태를 가리킨다. 경제성장률은 알다시피 바닥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분기 성장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마이너스 4.3%를 기록했다. 3월 취업자 수는 2311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19만5000명 감소해 10년 만에 최악의 수준을 보였다. 3월 경상수지는 66억5000만 달러로 사상 최대 흑자를 보였지만 수입이 수출보다 더 큰 폭으로 줄어서 생긴 ‘불황형 흑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상승하고 부동산 시장이 꿈틀거리는 것은 시중에 풀린 800조 원의 유동성 때문이다. 지난해 금융 위기가 발생하자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파격적으로 내렸고, 정부도 대규모 재정지출을 하면서 시중에 자금이 많이 풀렸다. 이 돈들이 생산적인 투자로 흐르지 않고, 자산시장에서 거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자산시장으로 불리는 주식·부동산 시장은 풀린 돈의 힘으로 활황세를 보이고 있을 뿐 실물경제 회복은 아직 불투명하다.
7일 청와대에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경제연구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논의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경제의 봄기운을 느낄 수 없다. 참석자들은 경기 회복 강도가 미약하고, 대외 여건이 불확실해 경기 회복 추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정부의 확장적 거시정책 효과를 제외한 민간의 자생적인 경기 회복력은 아직 미흡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다시 말해 정부가 재정 적자를 감수하고 대규모로 자금을 풀어 실물경기를 부축해야 간신히 경기가 굴러가는 정도라는 것이다.
실제로 기획재정부의 분석에 따르면 2007년과 2008년의 성장률을 합한 평균이 3.7%인데 이중 정부 부문의 기여도는 0.6%포인트였다. 하지만 올 1분기 성장률 마이너스 4.3% 중 정부 부문의 기여도는 1.5%포인트에 이르고 있다. 정부가 재정집행을 하지 않았다면 올 1분기 성장률은 마이너스 5.8%로 내려갔을 것이라는 뜻이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자동차업체인 제너럴모터스(GM)이 파산할 가능성, 석유와 원자재 가격의 불안 요인이 상존하고 있다는 점도 위험 요인으로 거론됐다. 급등했던 환율이 내려가면서 우리 기업의 가격경쟁력이 나빠지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하반기 글로벌 경기 회복은 가능한가
최근 영국 정부는 연소득 15만 파운드(약 3억 원) 이상인 고소득자에 대한 세율을 40%에서 50%로 인상하기로 했다. 이는 세계 주요국이 금리인하와 재정 확대라는 ‘양적 확대’ 정책으로 경기 회복을 꾀하고 있지만, 그 반작용으로 재정 이슈가 등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파이낸셜타임즈>는 영국의 재정 적자 심화와 국채 발행을 통한 경기 부양 재원 조달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움직임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 소비가 줄어들면서 글로벌 금융 위기 공조화로, 간신히 안정권에 접어든 시장이 재차 균열될 수 있다. 또 한국 경제가 상반기 대규모 경기 부양으로 경제를 떠받친 뒤 하반기쯤 가시화될 선진국의 경기 부양 흐름을 탄다는 전략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선진국 공조화된 경기부양책이 재정 이슈 탓에 기대 이하로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며 “상반기 집중된 재정 지출로 하반기 정책 공백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기 회복 기조 유지가 어려운 여건에 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에서 글로벌 경기 회복의 지연은 우리 경제에 치명타를 안겨줄 수 있다. 지난해 국내 경제의 무역의존도를 나타내는 명목 국민총소득(GNI) 대비 수출입 비중이 110.6%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GNI 대비 수출입 비중이 높다는 것은 우리 경제의 내수 부문이 취약하고, 대외의존도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뜻한다.
다만 지난해 미국의 투자은행인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에 맞먹는 글로벌 시스템 위기는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은행의 파산은 제조업체 수십 곳이 동시에 쓰러지는 것에 맞먹는 충격을 안겨준다.
우리투자증권 강현철 투자전략팀장은 “미국 현지의 분석가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리먼 브라더스를 파산시켰던 것에 대해 정책당국자들 내부에서 비용만 더 키우는 ‘정책 오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며 “은행 파산과 같은 형태의 충격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 경기 침체가 ‘관리 가능한’ 범위에 있다면 한국 경제는 길고 더디지만 회복세로 돌아설 것으로 관측된다. 다만 그 시점은 아직 가늠하기 힘들고, 하반기 회복 여부도 장담하기 힘들다.  

2009-5-14 [위클리 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