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야코에게. 매일 아침 네 엄마가 불단의 꽃과 물을 갈아놓고, 밥을 올리면 애비는 차를 올린다. 치야코는 커피를 좋아했지만 차를 올리는 건 이유가 있다. 시커멓고 짠 바닷물에 휩쓸려 괴로웠을테니 중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야.
너에게 용서를 빌게 있다. 행방불명이 된 뒤 네가 근무하는 슈퍼와 시신안치소 주변을 매일 찾아 다녔지. ‘바지 주머니에 열쇠가 두개 들어있는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은 건 쓰나미 이후 1개월이 지난 때였어. 치야코가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슈퍼의 락카 열쇠가 아닐까 싶어 확인하러 갔다. 시신번호는 214번이었어. 하지만 얼굴이 시뻘겋고 머리칼도 곱슬거려 알아볼 수 없었다. 몸도 물에 잔뜩 불어 마른 체형에 머리가 긴 치야코가 아닌 줄 알았지. 4월29일 화장할 때도 가보지 않았다. 5월20일 혹시 몰라서 의뢰했던 유전자 감식 결과가 나왔는데 214번이 치야코로 확인됐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화장할 때 왜 가보지도 않았을까? 미안하다.(중략)
지난해 회사에서 처음으로 여성 점장이 된 너를 두고 사람들은 책임감이 강하다고 했고 우리는 미소를 지었다. 쓰나미 때 ‘일단 피했다가 동료들을 구조하러 갔다가 변을 당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네 엄마와 이 애비는 믿고 있다…. 고지대에 있는 집은 무사하니까 안심해라. 쓰나미 이후에는 쓸쓸해서 한동안 피난소에 머물다가 너를 찾은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40년이상 함께 살던 집이라 그런지 내가 ‘치야코’라고 부르면 ‘네에’라고 대답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외동딸인 너는 ‘부모님을 모시며 살겠다’며 결혼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 결혼하는게 좋았던 걸까? 이런 식으로 가버릴 거였다면 (결혼하지 않아) 슬퍼할 이가 많지 않아 좋은 거일까? 생각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지….”
이와테(岩手)현 가마이시(釜石)시 하코자키(箱崎)에 사는 어민 사사키 기쿠마쓰(佐佐木菊松·76)가 3·11 동일본대지진 당시 쓰나미에 휩쓸려 숨진 외동딸 치야코(智也子·44)를 생각하며 쓴 글이다.(마이니치신문 12월28일자)
3월11일 오후 2시46분. 일본 동북부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台) 동쪽 179㎞지점의 산리쿠오키(三陸沖) 해역에서 규모 9.0의 초대형 강진이 발생했다. 도호쿠(東北) 지방과 간토(關東) 지방은 물론 도쿄와 홋카이도에서도 강한 지진이 관측됐다. 몇초후에 진정될 것으로 예상됐던 흔들림은 6분이 넘는 강력한 요동으로 이어졌고 이른 봄의 평온한 일상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30분쯤 뒤 도호쿠 해안일대에 쓰나미가 밀려왔다. 치야코처럼 미처 피난을 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렸다. 2011년 12월29일 현재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희생자는 사망 1만5844명, 실종 3469명 등 모두 1만9313명. 2만명에 가까운 생명이 시커먼 물결에 휩쓸려 사라졌다. 5890명이 부상했고, 최대 47만명이 2417개의 피난소에 몸을 맡겼다. 가옥 12만7057채가 완전히 파손됐고, 반파, 부분파손까지 합하면 100만7238채가 피해를 입었다.
센다이와 나토리(名取)시 해안에 상륙한 쓰나미는 제방을 넘어 수십만평에 이르는 센다이 평야를 순식간에 덮쳤다. 죽음의 물결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자동차들을 잇따라 삼켰다. 미나미산리쿠초에서는 쓰나미 사흘 뒤 1000여명의 주민이 마을 해변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해안을 달리다 습격당한 열차들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뒹굴었고, 항구에서 밀려 올라온 수천t크기의 컨테이너 선박이 제방을 넘어 마을을 덮친 초현실적인 광경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동일본대지진은 일본 역대 최대규모였고, 쓰나미의 높이는 최고 15m에 달했다. 아오모리(靑森)현에서 지바(千葉)현까지에 이르는 태평양 해안 수천㎢가 침수됐다. 일본은 지난 수십년간 쓰나미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고, 바다속에도 콘크리트 제방을 만들었지만 자연의 폭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해안을 달리다 습격당한 열차들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뒹굴었고, 항구에서 밀려 올라온 수천t크기의 컨테이너 선박이 제방을 넘어 마을을 덮친 초현실적인 광경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동일본대지진은 일본 역대 최대규모였고, 쓰나미의 높이는 최고 15m에 달했다. 아오모리(靑森)현에서 지바(千葉)현까지에 이르는 태평양 해안 수천㎢가 침수됐다. 일본은 지난 수십년간 쓰나미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고, 바다속에도 콘크리트 제방을 만들었지만 자연의 폭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원전열도’(原電列島) 일본을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는 ‘판도라의 상자’를 기어이 열어젖혔다. 지진 다음날 3월12일 오후 3시36분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1호기에서 수소폭발이 발생했다. 이틀 뒤인 3월14일에는 3호기가, 15일에는 4호기가 폭발했다. 원자로의 냉각기능이 상실되자 핵연료봉을 식히기 위해 막대한 양의 물을 뿌려댔고, 이중 상당수가 방사능 오염수로 변해 지하와 바다로 흘러들었다. 후쿠시마 원전 반경 20㎞ 안에는 사람이 들어가질 못했고, 일본 열도 태반에 ‘죽음의 재’가 흩뿌려졌다.
대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한 3월11일 도호쿠 지방의 밤하늘은 별이 유난히 가깝게 보였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서 부유물을 붙잡고 버티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던 그 사람들은 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강상중 도쿄대 교수는 9개월의 시간이 흐르면서 숫자로만 기억되는 희생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시사주간지 아에라 최근호 칼럼에 썼다.
“별을 보며 아미타여래가 이끄는 극락정토를 떠올린 이들도, 생을 마감하려는 이 때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것은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그저 가족들의 이름만을 부르짖던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중략) 희생자들이 생의 마지막에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상태로 있었을까를 우리는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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