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일본 언론의 자기비판
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난 다음날인 2011년 3월12일 원전에서 가까운 나미에마치(浪江町) 주민 수천명이 모였다. 정부가 특별한 피난지침을 내리지 않아 주민들은 막연히 쓰시마(津島) 지구로 일제히 몸을 피했다. 주민들은 그곳에서 사흘을 머물렀고, 아이들은 낯선 동네에도 아랑곳없이 뛰어놀았다. 하지만 원전에서 방출된 방사성물질은 바람을 타고 정확히 쓰시마 지구를 향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운영하는 ‘긴급시신속방사성물질영향예측시스템(스피디·SPEEDI)’은 당시 쓰시마 지구 쪽이 위험하다는 예측을 내놓고 있었지만 주민들이 대량 피폭하도록 방치한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과정에서 일본 정부의 무책임함을 보여주는 이 사태는 한달쯤 지나서야 조금씩 일본 언론에 보도됐다. 사실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몇 달 전 일본 정부가 원전사고에 대비해 벌인 가상훈련에서 ‘스피디’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실제상황이 벌어지자 ‘스피디’의 존재는 까맣게 잊혀졌다. 정부는 감췄고, 언론들은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 출신의 마키노 요(牧野洋)는 최근 펴낸 <관보복합체(官報複合體)>(고단샤·講談社)에서 일본 저널리즘의 후진성이 후쿠시마 사고를 악화시켰다고 지적한다. 24년간 다니던 신문사를 2007년 그만두고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일본 신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스피디’의 데이터를 입수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주민들의 피해도 줄어들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사고 초기 일본 언론은 도쿄전력과 정부가 하는 발표를 받아적기에 급급했다. ‘다이혼에이(大本營·일본군 통합본부)’가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적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언론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일본 기자들이 게을러서일까? 그보다는 ‘갈라파고스’화되고 있는 언론 구조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권력이나 기업이 던져주는 정보에 의존하는 보도, 언젠가 발표될 내용을 타사보다 한발 앞서 보도하는 데 열중하지만 권력이 감추고 있는 정보를 캐내고, 독자적인 분석기사를 쓰는 데는 약하다. 그러다 보니 권력이나 기업이 쳐둔 프레임에 갇힌 채 국민과 독자를 외면하는 보도를 하고 만다는 것이다.
2002년 발생한 오사카지검 공안부장 ‘미쓰이 다마키(三井環)’ 사건은 전형적인 사례다. 미쓰이 부장은 검찰 내부에서 연간 수억엔의 조사활동비가 직원 회식과 골프비용 등으로 전용되는 사례를 내부고발하기 위해 일본 TV와 인터뷰하기로 했다. 하지만 인터뷰가 예정된 날 그는 폭력단의 뒤를 봐줬다는 혐의로 검찰에 전격 체포된다.
이런 잘못이 되풀이되는 예로 마키노는 출입처와 ‘기자클럽’에 의존하는 일본의 취재관행을 비판한다. 이 책에 인용된 일본 근대사가가 묘사한 1910년대 일본 기자클럽 풍경은 100년이 지난 지금과 거의 다를 바 없다. ‘기자들은 집에서 기자클럽으로 바로 출근한다. 짬이 나면 동료와 담소를 하며 차를 마시거나, 바둑·장기를 둔다. … 기자들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쓰도록 하기 위해 관청이나 기업들은 충실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클럽소속 기자는 해당 관청의 충실한 대변인이 될 수밖에 없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낡아버린 일본형 시스템이 빚어낸 참사지만 그 책임주체로 언론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일본 언론에 대한 자기비판이지만 여전히 닮은꼴인 한국 언론을 성찰할 기회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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