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원전제로'로 가는 일본...전력대란은 없다

서의동 2012. 3. 30. 17:05

일본 규슈의 대표적인 온천휴양지인 오이타(大分)현 유후인(湯布院). 한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이 온천가의 ‘유후인 쇼야노다테’ 여관에서 올해 흥미로운 사업이 벌어진다. 온천수의 열을 활용해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온천발전’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이타마현청 공무원들이 절전운동 차원에서 조명을 절반만 켠 채 근무하고 있다./경향신문DB


섭씨 70~95도가량의 온천수가 있으면 평균가정(4인가족 기준) 100가구의 소비전력량에 해당하는 70㎾의 전력을 24시간 생산할 수 있다. 사업비는 6000만엔(약 8억원)이지만 오는 7월부터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를 전력회사가 의무적으로 전량 매입하는 제도가 시행되면 5~10년 안에 투자비를 회수할 수 있다. 발전장치를 개발한 고베제강소 관계자는 “경관과 온천수를 중시하는 온천가의 특성에 맞춰 대규모 공사가 필요없는 최소한의 설비만으로 온천발전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3월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에서는 원전으로부터 자립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온천발전은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탈(脫) 원전의존’ 움직임의 작은 예에 불과하다. 태양광·지열·풍력 등 다양한 대체에너지 개발이 속속 추진되고 있고, 절전형 상품도 등장하고 있다.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절전형 제품으로 바꾸자’는 소비자 의식이 확산되면서 가전업체들은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원전가동률이 제로를 향해 치닫고 있지만 일본 경제가 큰 문제 없이 굴러가고 있는 이유들이다.

▲ 재생에너지 개발 박차

국민은 절전형 소비 붐

“원전 재가동” 힘 못 써


■ “원전제로라도 문제없다” 정부 관료의 천기누설 해프닝

현재 일본 전체 원전 54기 중 단 한 곳을 제외하곤 모든 원전이 멈춰 있다. 지난 26일 일본 니가타(新潟)현의 가시와자키가리와(柏崎刈羽) 원전 6호기가 가동을 중단했다. 다음달 말 가동을 멈출 예정인 홋카이도(北海道)의 도마리(泊)원전 3호기만이 유일하게 돌아가고 있다. 일본은 원전사고 이전인 2009년까지 원전비중이 29.2%에 달했다. 원전사고 이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일본 정부 각료가 ‘천기누설’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전력산업을 책임지고 있는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경제산업상은 지난 1월26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올여름에 전국 원전이 완전히 멈추더라도 지난해처럼 전력사용제한령을 발동하지 않아도 전력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화력·수력발전을 총가동하고, 절전을 하면 감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원전의 재가동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다시 말을 바꿨다. ‘원전 재가동’ 여부를 놓고 정부 내에서 치열한 노선투쟁이 벌어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에피소드다.

■ 일본의 화두 된 절전·재생에너지

‘원전이 없으면 경제가 올스톱될 것’이라는 으름장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수력·화력 등의 비중을 늘리기도 했지만 대체에너지 개발과 절전운동 등이 본격화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절전과 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기업들은 저에너지 산업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이데미쓰(出光)흥산 등 9개 기업은 후쿠시마현의 반다이아사히(磐梯朝日) 국립공원 내에 발전용량 27만㎾ 규모의 지열발전소를 건설하기로 했다고 지난 23일 발표했다. 지열발전을 위해 국립공원 내 굴착을 허용하기로 정부가 규제를 풀면서 1999년 이후 처음으로 지열발전이 추진되는 것이다. 태양광발전과 해상풍력발전 등도 추진이 한창 진행 중이다.


전력소비를 줄이는 기술개발에서도 성과가 잇따르고 있다. 도시바는 디지털가전의 대기전력을 제로에 가깝게 줄이는 에코칩을 만들었고, NEC도 대기전력을 없애는 반도체 기술을 개발했다. 도시바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지난해부터 3년간 설비에 1조3000억엔을, 연구·개발에 1조700억엔을 투자해 스마트그리드(차세대 송전망) 사업을 강화하기로 했다. 태양광과 지열로 전력소비를 최소화하는 스마트 빌딩, 제로에너지 빌딩도 속속 보급된다. 미쓰비시상사는 태양광발전과 전기자동차(EV)의 충전시스템을 이용해 지바(千葉)현 후나바시(船橋)시 일원의 17만㎡ 부지에 태양광발전을 통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34% 줄인 스마트시티를 2014년까지 짓기로 했다.

원전사고 이후 ‘현명한 소비’를 하려는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런 기술개발을 뒷받침하고 있다. 가전제품을 소비전력이 적은 ‘쇼(省)에네(절전형)’ 제품으로 바꾸려는 ‘절전소비’에 힘입어 일본 내 2월 중 에어컨과 발광다이오드(LED) 전구 판매량은 전년에 비해 각각 37%와 86%가 늘어났다.

일본 미쓰비시종합연구소 와세다 사토시(早稻田聰·45) 주임연구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재생에너지 산업붐은 1970년대 오일쇼크와 1990년 교토의정서 채택에 이은 제3의 물결”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 원전이 더 비싸다

재계 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과 전력회사들은 비싼 화력발전 가동으로 경제에 부담이 늘어나는 만큼 하루빨리 원전을 재가동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009년 전체 전력공급의 61.7%를 점하던 화력발전 가동률이 78% 안팎으로 올라섰다. 원전을 재가동하지 않을 경우 화력발전에 쓰일 원자재 수입비용으로 연간 3조엔이 더 들어간다는 추계도 나온다. 하지만 사고비용과 핵연료 처리비용까지 포함하면 원전의 발전단가(1㎾h당 6.7엔)가 화력(5.7~6.2엔)보다 비싸다는 정부 위원회의 발표가 나오면서 반론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일본 정부가 올여름 전력부족이 7%에 달할 것이라며 ‘원전 재가동’의 명분을 제공하고 있지만, 높아진 절전의식에 힘입어 감당할 수 있다는 관측도 많다. 지난해 여름 정부가 15%의 절전목표를 세웠지만 도쿄 등 수도권의 절전규모는 21.9%로 목표를 초과달성했다.

기술혁신과 절전 등을 감안할 때 20년 뒤 에너지소비가 4분의 1 가까이 줄어들게 된다는 추계도 나오면서 ‘원전 재가동’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일본 환경성 중앙환경심의회소위원회는 기술혁신과 절전시책 도입 등을 감안할 때 2030년까지 일본 내 에너지소비가 현재보다 최대 23%까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최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