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공산당이 청년층을 겨냥해 제작한 포스터. 젊은이에게 일자리를, 정부와 대기업은 책임을 다하라라고 쓰여있다./일본공산당 제공
통합진보당 경선부정 사태에 종북주의 논란이 겹치면서 한국의 진보세력이 위기를 맞고 있는 요즘 이웃 일본에선 진보세력의 간판격인 일본공산당이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일본공산당은 최근 1년간 당원을 1만명 늘렸다. 연수입의 1%를 당비로 내고 기관지 ‘아카하타(赤旗)’를 구독하는 진성당원이다. 세계 금융위기 여파로 대량해고가 이뤄진 2008년의 입당러시 만큼은 아니지만 일본 사회의 보수화 바람 속에서도 상승세는 유지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지진피해가 집중된 도호쿠(東北)지방에선 현의원(광역의원)이 배로 늘었다.
오는 15일로 창당 90주년을 맞는 일본공산당은 재난기에 특히 ‘강하다’. 지하당 시절인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때엔 체포 위험을 무릅쓰고 피재민들을 구하다 처형된 당원도 있었다. 공산당은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혁명 노선을 버리고 생활정치를 표방하며 ‘풀뿌리 정치’에 천착해왔고, 이런 공산당을 대지진을 맞아 다시 보게 됐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달 28일 도쿄 나가타초(永田町) 일본 중의원(하원) 의원회관에서 만난 시이 가즈오(志位和夫·58) 공산당위원장의 말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났다.
일본 중의원 회관사무실에서 만난 시이가즈오 공산당위원장/by 서의동
-민주당이 장기 집권해온 자민당을 물리치고 정권을 교체한지 올해로 3년이 되지만 일본 국민은 바뀐 게 없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3·11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일본 사회에서는 일종의 폐색감이 감지됩니다.
“2009년 여름 정권교체 당시엔 국민의 기대와 열망이 대단했습니다. 공산당도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에게 협력을 약속했지만 3년이 지나면서 국민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소비세를 인상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법까지 통과시키고, 원전사고 직후 잠시 ‘탈원전’을 내걸었다가 결국 오이(大飯) 원전을 재가동했습니다. 민주당도 자민당처럼 미국과 대기업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공산당은 소비세 증세에 의존하지 않고도 사회보장을 충실히 할 수 있고, 재정난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놨는 데 반응이 좋습니다.”
공산당의 대안은 불필요한 토목공사와 방위예산을 줄여 세출을 삭감하고 대기업과 부유층 과세강화로 세입을 늘린다는 내용이다. 이상하리 만큼 ‘부유층 과세’ 논의가 없는 일본 사회에서 공산당이 유일하게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당은 세계 금융위기 때 당원이 크게 늘어난 바 있고, 최근에도 당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동일본대지진 때 피해지역에서 당원들이 피해자 지원에 헌신한 덕분에 도호쿠 지방에서 입당자가 크게 늘었습니다. 지난해 하반기 도호쿠 3개현에서 현의원이 6석에서 11석으로 늘었습니다.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미야기현 이시노마키(石卷)시에서도 현의원이 나왔고, 피해주민의 가설주택촌에서 6개 지부가 생겼습니다.”
-일본공산당이 어렵고 곤란한 사람들의 의지처라는 평가는 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공산당은 ‘국민의 고난을 덜고 사회를 보다 낫게 하자’는 창당정신을 90년간 지켜왔습니다. 그 덕에 ‘곤란할 땐 공산당에’라는 말이 일본 사회에 정착됐습니다. 당지부의 생활·노동상담 창구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고리대에 시달리는 이들이 경찰서에 가면 “공산당에 가서 상담하라”고 안내할 정도입니다.”
-시이 위원장의 대중강연 동영상을 봤더니 간토대지진 당시 공산당원들의 활동상을 언급하셨더군요.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때 공산청년동맹 초대 위원장인 가와이 요시토라(川合義虎)는 당시 21살이었는데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쿄에서 구조활동을 벌이다 경찰에 잡혀 학살됐습니다. 1933년 산리쿠 대지진 때도 공산당이 탄압을 무릅쓰고 의료활동을 벌였습니다. 공산당이 불법이던 시절이지만 국민의 고난을 덜어주자는 창당정신을 실천한 것이죠.”
-공산당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방사능 오염실태 조사를 적극 벌이기도 했습니다.
“지바현의 가시와(柏)시 주변에 방사능 오염도가 높은 ‘핫스팟’ 지역을 당원들이 조사해 실태가 드러났습니다. 이런 작업이 호평을 받았고, 그 참에 입당한 주민들도 적지 않습니다. 지바현에서 가장 입당자가 많은 곳이 핫스팟 지역들입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대지진이 공산당으로서는 기회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식으로 말할 순 없지요. 다만, 대지진을 겪으며 연대와 유대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들이 늘어났고, 이런 생각의 변화와 공산당의 활동이 공명하면서 당원이 증가하는 것 같습니다. 이시노마키 지부에 입당한 인쇄업 사장은 ‘공산당원들의 헌신을 지켜보면서 남을 위하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대지진을 계기로 공산당을 다시 보게 됐다는 말은 많이 듣습니다.”
일본공산당 포스터. 젊은이의 힘이 이 나라를 바꾼다라고 쓰여있다/일본공산당 제공
그의 말을 종합하면 지역과 주민들에 밀착하는 ‘풀뿌리 정치’의 구현이 진보정당의 필수덕목이면서 가장 유력한 무기인 셈이다. 그는 또 당 노선과 정책을 외부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자주독립’의 원칙도 강조했다.
“1950년대 소련의 스탈린이 일본공산당에 ‘중국식 무장투쟁을 하라’고 간섭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이 분열됐고 후유증도 심각했습니다. 1957년 당대회에서 ‘일본공산당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립했습니다. 우리 노선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원칙이 공산당을 지탱해온 힘이었습니다. 우리가 소련이나 중국 편에 붙어 눈치를 살폈다면 국민 앞에 떳떳하게 고개를 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과는 1983년 ‘아웅산테러’를 강하게 비판한 것을 계기로 관계가 단절됐다.
자민당도 민주당도 국민의 외면을 받고 있으니 다음 총선거에서 공산당이 유리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공산당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이 엄존하고, 하시모토 도루(橋下徹)오사카시장 등이 주도하는 ‘우익선풍’에 국민 시선이 쏠리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녹록치 않다.
“일본의 주요 언론들은 한결같이 공산당을 외면합니다. 국민의 선택을 자민·민주의 2대 정당으로 묶어놓는 체제를 기득권층과 언론이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두 정당이 (소비세 증세법안 처리에서) 담합하자 ‘둘다 안된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의 정치는 지금 대변혁의 ‘전야(前夜)’ 상태입니다. 공산당이 정치의 비전을 확실히 보여주면 약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재무장을 걱정하고 있고, 한·일관계도 과거사 문제가 다시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공산당은 일본의 재군국주의화를 단연코 반대합니다. 한·일 두 나라 국민이 마음으로부터 친구가 되려면 과거사 전면 청산이 필요합니다. 위안부 문제도 일본 정부가 사죄와 보상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시이 위원장에게 마지막으로 진보정당의 길을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간섭에 맞서 자주노선을 지켜온 일본공산당의 전통에 비춰보면 ‘우문’이었던 셈이다. 그는 답변 대신 “우리는 지금까지 해온 방식대로 열심히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50분간의 인터뷰에 답이 다 들어 있었다.
일본공산당은 돈문제에서 가장 깨끗한 정당이다. 기업이나 단체로부터의 정치자금은 물론 정부의 국고보조금도 받지 않는다. 주된 수입원은 당원들이 내는 당비, 기관지인‘아카하타(赤旗)’의 판매수입과 개인모금이다. 시이 가즈오 위원장은 정당보조금을 받지 않는 이유에 대해 “국민이 자기가 지지하지도 않는 정당에 돈을 쓰게 되는 셈이니 사상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일본공산당은 국회에서는 중의원 의원 9명, 참의원 의원 6명으로 제4당이지만 지방의회에서는 제1당(대부분 무소속이 많다)으로 의원수가 2700명에 달한다. 공산당은 회사, 학교를 포함해 2만개 지부를 두고 있다. 과거 ‘세포’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으로 불리던 지부조직이 ‘풀뿌리 정치’의 튼튼한 토대가 되고 있다.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해왔으나 2004년 당 강령을 개정해 의회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하고, 경제체제도 ‘자본주의 틀내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을 추진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일본공산당은 일본 정당 가운데 한·일관계에 대해 가장 전향적이다. 지난해 이뤄진 조선왕실의궤 반환은 가사이 아키라(笠井亮) 공산당 중의원이 주도했다. 또 한일병합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명확히 할 것을 주장하고 있고, 재일한국인 참정권 부여문제에도 적극적이다.
2000년 취임한 시이 위원장은 도쿄대 물리공학과 재학시절 입당해 1990년 35살에 당 중앙위 서기국장에 취임하는 등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2006년 일본 공산당 위원장으로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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