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가족의 나라> 만든 양영희 감독 "관객들 보기 불편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서의동 2012. 8. 3. 17:06

“관객들이 영화를 불편해서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디어 평양>으로 알려진 재일동포 2세 양영희 감독(47)이 만든 극영화 <가족의 나라> 시사회가 지난 1일 도쿄시내 한국문화원에서 열렸다. 시사회에 참석한 양 감독은 “관객들이 그저 영화를 보다 화를 내기도 하고, 분개하면서 영화가 갖는 묵직함을 느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양 감독은 “재일동포들이 선술집 같은 데서 소곤대던 (북송사업)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관객들의 질문에 답하는 양영희 감독/by 서의동


4일부터 도쿄 등에서 개봉되는 <가족의 나라>는 북송사업으로 북에 건너갔다가 지병치료를 위해 25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오빠와 일본에 남은 여동생 및 가족의 짧은 재회를 다루고 있다. 영화 줄거리는 양 감독의 가족이 겪은 실제 이야기이다. 


1964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양 감독은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열성 간부인 아버지를 둔 총련계 집안에서 자랐다. 오빠 셋은 중·고생 때 귀국사업으로 북한에 건너갔고, 큰오빠는 3년 전에 사망했다. 이 가운데 막내 오빠가 1999년 종양치료를 위해 3개월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했으나 북한당국의 갑작스러운 지시로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되돌아간다. 지난 2월 제6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예술영화관연맹상을 받은 영화는 소설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현실을 차분하게 재구성했다.

 

-영화의 내용은 모두 사실인가. 

“대부분 사실이다. 좀 다른 것은 북에 간 오빠가 3명이었는데 극중에서는 한 명으로 단순화했다. 막내 오빠가 종양이 생긴 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5년간 북한을 여러 차례 드나들면서 손을 써 일본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오빠가 3개월 일정으로 왔으나 2주일 만에 북한당국의 명령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큐멘터리로는 담을 수 없는 좀 더 깊고 아픈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빠가 북으로 돌아가는 영화 막바지 장면에서 여동생이 승용차 문짝을 잡고 버티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오빠가 돌아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빠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던 당시의 심정을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북한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가.

“내 가족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 뿐 북한이나 재일동포를 그리려고 한 것은 아니다. 북한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정치범이란 말이 사라지면 좋겠고, 추운 나라니까 사람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 갈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게 되는데 그때마다 같은 민족이 경계선 북쪽에 있는 그들과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으로는 (북한에 대해) 비관도 기대도 하지 않는다. 과거 김일성 주석이 죽고, 그럴 때마다 바뀌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별로 크게 바뀌지 않더라. 별 기대 없이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다.”

 

-관객들에게 영화를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는가.

“그냥 영화이니 편하게 감상하면 좋겠다. 북송사업이니 자이니치(在日)니 총련이니 이런 말은 몰라도 상관없고, 그저 영화를 보면서 화도 내고, 분개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느끼면 될 것 같다. 영화를 본 뒤에 (북송사업이 뭔지를) 인터넷 같은 데서 찾아봐 주면 기쁜 일이다. 1959년 시작된 북송사업으로 많은 재일동포들이 북한에 갔지만 ‘지상낙원’이 아님을 알게 된 뒤에는 모두 입을 다물었고,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 돼 버렸다. 북송사업 50년이 됐을 때 일본 몇몇 신문들이 특집기사를 쓴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영화 덕에 일본의 패션잡지에조차 ‘북송사업’이란 용어가 나올 정도가 됐다. 한국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되고 일반 개봉은 연말이나 내년 초쯤 할 예정이다. 관객들이 영화의 묵직함을 느끼면 좋겠다. 관객들을 힘들게 하고 싶었고, 한 번 더 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스스로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국적은 한국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코리안 메이드 인 재팬’이라고 소개한다. 또 한국 친구들이 ‘넌 일본인이구나’라고 이야기하면 ‘응 그래’라고 대답한다. 뉴욕에 1997년에 갔다가 6년을 살았고 당시 한국국적을 취득했다. 하지만 특별히 어느 나라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없다. <디어 평양>을 만든 뒤에는 아버지가 ‘일 때문에 여러 나라를 다녀야 하니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라’고 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