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先物)거래는 주식시장에서도 전문적인 투자영역에 속한다. 기초자산을 미래의 일정한 시점에 사거나 팔기로 하는 거래방식으로 주식은 물론 금이나 곡물 등도 대상이 된다. 자신이 쥐고 있는 실물이나 주식의 가격이 장래에 얼마에 팔리는 것이 유리할지를 판단해 거래하는 방식인 만큼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그 때문에 현물주식을 투자하는 이들은 꽤 늘어났지만 선물에까지 손을 대는 이는 흔치 않다. 이른바 ‘꾼’들의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선물거래는 꽤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일대로 광풍처럼 휘몰아쳤던 튤립거래가 세계최초의 선물거래였고 오사카에서는 쌀 선물거래소가 18세기에 만들어졌다. ‘인간의 욕망’을 존중하기 시작한 자본주의와 거의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에드워드 챈슬러가 쓴 ‘금융투기의 역사’에 따르면 오스만투르크에서 전래된 튤립이 네덜란드의 귀족과 부유층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자연스럽게 투기대상으로 등장했다. 꽃이 필 때까지는 무늬와 색깔을 예측할 수 없다는 특성이 투기의 우연성을 극대화했고 뿌리들이 땅속에 묻힌 겨울철에는 현물거래가 어렵다는 점 때문에 ‘장래의 일정시점에 정해진 종류의 튤립뿌리를 거래하는’ 선물거래가 생겨났다. 열풍이 한창일 때는 튤립 한뿌리 가격이 집 한채에 맞먹을 정도가 됐지만 순식간에 열풍이 꺼지면서 부도사태가 속출하는 등 후유증이 극심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德川)막부의 집권 이후 지방영주인 번주(藩主)들을 수도인 에도(현재의 도쿄)에 머물도록 한 산킨고다이(參勤交代) 정책이 실시되면서 번주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수확될 쌀을 담보로 증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수도에서의 호사스러운 생활에 젖어 낭비가 심해진 번주들이 증권을 남발하면서 나중에는 증권만을 사고파는 환거래상이 등장할 정도가 됐지만 결국 번주들의 몰락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선물거래는 일제 조선강점기를 전후로 국내에도 흘러들어 미곡항인 인천에 1896년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 즉 ‘미두장’(米豆場)이라고 불리는 쌀 선물거래소가 개설됐다. 쌀값안정을 꾀하고 쌀의 품질을 고르게 한다는 취지였지만 얼마 안가 투기꾼들의 집결지가 됐고 가산을 탕진한 이들이 속출했다. 일제시대 소설가 채만식은 1930년대 미곡항이던 전북 군산을 무대로 한 ‘탁류(濁流)’에서 ‘미두’투기로 가산을 탕진한 소시민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올들어 주식시장이 활황세를 보이면서 손쉽게 돈을 벌려는 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빚내서 투자’로 분류되는 증권사 신용거래 규모가 지난 2월 7750억원에서 10월19일 현재 4조6555억원으로 무려 6배로 증가했고 한국증권업협회의 설문결과 직접투자자들 중 15.1%가 돈을 빌려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남부러울 것 없던 대기업 간부가 주식에 손을 댔다가 2년도 채 안돼 가산을 탕진하고 독서실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탁류’같은 사연들이 등장하고 있다.(문화일보 10월24일자 5면 참조)
증권가에서는 한국증시의 대세상승을 점치는 전망들이 춤을 추지만 ‘개미(개인투자자)’들은 상승장에서도 돈을 잃기 십상이다. 저성장 시대 삶에 지친 서민들일수록 ‘대박’환상을 좇지만 대체로 돈을 버는 쪽은 부자들이다. 지금 주식을 들고 있거나 주식투자에 입문하려는 이들은 대대로 전해오는 격언들을 떠올리며 잠시 성찰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돈은 그리 쉽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선물거래는 꽤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일대로 광풍처럼 휘몰아쳤던 튤립거래가 세계최초의 선물거래였고 오사카에서는 쌀 선물거래소가 18세기에 만들어졌다. ‘인간의 욕망’을 존중하기 시작한 자본주의와 거의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에드워드 챈슬러가 쓴 ‘금융투기의 역사’에 따르면 오스만투르크에서 전래된 튤립이 네덜란드의 귀족과 부유층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자연스럽게 투기대상으로 등장했다. 꽃이 필 때까지는 무늬와 색깔을 예측할 수 없다는 특성이 투기의 우연성을 극대화했고 뿌리들이 땅속에 묻힌 겨울철에는 현물거래가 어렵다는 점 때문에 ‘장래의 일정시점에 정해진 종류의 튤립뿌리를 거래하는’ 선물거래가 생겨났다. 열풍이 한창일 때는 튤립 한뿌리 가격이 집 한채에 맞먹을 정도가 됐지만 순식간에 열풍이 꺼지면서 부도사태가 속출하는 등 후유증이 극심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德川)막부의 집권 이후 지방영주인 번주(藩主)들을 수도인 에도(현재의 도쿄)에 머물도록 한 산킨고다이(參勤交代) 정책이 실시되면서 번주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수확될 쌀을 담보로 증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수도에서의 호사스러운 생활에 젖어 낭비가 심해진 번주들이 증권을 남발하면서 나중에는 증권만을 사고파는 환거래상이 등장할 정도가 됐지만 결국 번주들의 몰락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선물거래는 일제 조선강점기를 전후로 국내에도 흘러들어 미곡항인 인천에 1896년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 즉 ‘미두장’(米豆場)이라고 불리는 쌀 선물거래소가 개설됐다. 쌀값안정을 꾀하고 쌀의 품질을 고르게 한다는 취지였지만 얼마 안가 투기꾼들의 집결지가 됐고 가산을 탕진한 이들이 속출했다. 일제시대 소설가 채만식은 1930년대 미곡항이던 전북 군산을 무대로 한 ‘탁류(濁流)’에서 ‘미두’투기로 가산을 탕진한 소시민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올들어 주식시장이 활황세를 보이면서 손쉽게 돈을 벌려는 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빚내서 투자’로 분류되는 증권사 신용거래 규모가 지난 2월 7750억원에서 10월19일 현재 4조6555억원으로 무려 6배로 증가했고 한국증권업협회의 설문결과 직접투자자들 중 15.1%가 돈을 빌려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남부러울 것 없던 대기업 간부가 주식에 손을 댔다가 2년도 채 안돼 가산을 탕진하고 독서실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탁류’같은 사연들이 등장하고 있다.(문화일보 10월24일자 5면 참조)
증권가에서는 한국증시의 대세상승을 점치는 전망들이 춤을 추지만 ‘개미(개인투자자)’들은 상승장에서도 돈을 잃기 십상이다. 저성장 시대 삶에 지친 서민들일수록 ‘대박’환상을 좇지만 대체로 돈을 버는 쪽은 부자들이다. 지금 주식을 들고 있거나 주식투자에 입문하려는 이들은 대대로 전해오는 격언들을 떠올리며 잠시 성찰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돈은 그리 쉽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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