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일본의 각종 영화상을 휩쓴 <기리시마, 부카쓰 그만둔대(桐島, 部活やめるってよ)>는 일본 지방 고등학교의 부카쓰(部活·동아리활동)를 소재로 한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다. 배구부 주장에 학교에서 가장 인기있는 기리시마가 배구부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소식을 계기로 학생들사이의 미묘한 인간관계가 표면화되는 과정을 묘사했다. 영화 줄거리도 흥미로웠지만 더 눈길을 끌었던 것은 고교생들이 수업이 끝난 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배구·배드민턴 연습을 하며 땀을 쏟거나 관현악부에서 연습에 몰입하는 장면들이다. 영화부원들은 학교건물 옥상이나 건물 뒤 공터에서 열심히 8㎜카메라를 돌린다.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고 입시학원으로 직행하는 ‘귀가조’도 없지 않지만 소수에 속한다.
일본에서는 명문대학 진학을 꿈꾸는 학생들도 동아리활동에 참가한다. 지난해 도쿄대에 203명을 진학시킨 일본최고의 진학명문 가이세이(開成)고교에는 50개의 공식클럽과 15개의 동호회가 활동하고 있다. 중·고 일관교인 이 학교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동아리에 가입한다. 학창시절 입시공부에만 전념하는 이들을 비꼬는 ‘가리벤(ガリ勉)’이란 일본말이 있지만 ‘가이세이고 학생=가리벤’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지난해 도쿄의 중위권 사립대학에 진학한 한 재일교포의 딸은 고교시절 리듬체조 동호회를 했다고 한다. 대회에 입상할 정도의 실력도 아니고, 학교에서 정식 클럽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지만 입시준비가 한창인 고3때에도 거르지 않고 연습을 계속했다. 사립명문 와세대(早稻田) 대학을 졸업한 한 일간지는 고교시절 록밴드 활동을 했다. 기타와 보컬을 맡아 시민회관에서 공연까지 했다는 그는 쉰이 넘은 나이에도 당시의 추억을 자랑스럽게 들려준다. 일본 학교에서 동아리활동이 활발한 것은 입시 스트레스가 한국보다 적다는 정도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아무리 바빠도 세수나 양치질을 생략할 수 없듯이 동아리활동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풍토가 정착돼 있다. 학교 다니며 공부만 해서는 별볼일 없는 인생이 된다는 생각이 일반화돼 있다.
<기리시마 부카쓰 그만둔대> 영화 포스터
동아리활동은 고교시절을 풍성하게 만들 뿐 아니라 대학이나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취미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 학업경쟁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땀을 흘리며 우정과 협동심을 쌓는 경험이 인생의 아름다운 자산으로 남는다. <기리시마…>가 일본 영화상을 휩쓸고, <스윙걸즈>나 <워터보이즈> 등 고교 동아리활동을 다룬 영화가 많은 것은 이 시절을 추억하려는 수요층이 그만큼 두텁기 때문이다. 고교시절이 일본의 사회와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시공간인 셈이다.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킨 입시업체 메가스터디의 ‘우정파괴’ 광고는 기막힌 한국고교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좋은 대학이 인생을 결정하는’ 교육현실 속에 한국의 고교시절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모라토리엄’의 시공간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박근혜 정부가 ‘학생들의 꿈과 끼를 살리기 위해’ 자유학기제 정책을 내놓았다. 절망상태의 학교교육을 개선해보겠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중소기업에 취직하더라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대기업 독식의 기업생태계를 바꾸고,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하는 ‘경제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의 동아리활동이 활발한 데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이 한국에 비해서는 숨쉴 공간이 있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우리 아이들이 우정과 꿈이 넘치는 학창시절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경제민주화는 필수불가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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