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 11

[여적]시노포비아(2020.1.31)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공포는 기원후 5세기 아틸라가 이끈 훈족의 침략에서 비롯됐지만, 유럽이 세계패권을 틀어쥔 근대 이후에는 서양 주도의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띠어갔다. 19세기 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주창한 ‘황화론(黃禍論)’은 급부상하는 일본을 견제하고, 유럽의 중국 침략을 뒷받침하는 국제정치적 담론이었다. 2차 세계대전 패전의 충격을 딛고 전후 고도성장을 일군 일본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미국 기업을 사들이던 1980년대 황화론은 다시 등장하며 플라자 합의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1985년 주요 5개국 장관들이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엔화가치를 올리고 달러가치를 떨어뜨리는 데 합의하면서, 일본 경제는 거품처럼 부풀다 꺼져버렸고, 황화론도 다시 잠잠해졌다. 황화론은 2..

여적 2020.01.31

[여적]기후 행동주의 투자(2020.1.17)

지난해 12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25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는 인류 공동의 과제인 기후대응에 대한 국제사회의 합의체제가 얼마나 무력한 ‘거버넌스(지배구조)’인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총회의 목표는 2015년 채택된 파리협정을 이행하기 위한 17개 규칙을 완성하는 것이지만, 회기를 이틀 연장하고도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기후대응이 차일피일 늦어지는 가운데 세계 곳곳의 자연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희생돼가고, 자연은 기후이변으로 복수하고 있다. 세계정부 대신 국가들 간의 연맹체를 만들자는 칸트의 구상은 세계평화는 물론 기후대응에도 무력하기만 하다. 그런 점에서 기후 대응을 위한 강력한 주체가 금융계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수백조~수천조원을 굴리는 글로벌 거대 기관투자..

여적 2020.01.31

[여적]자위권 행사(2020.1.15)

제3차 중동전쟁은 1967년 6월5일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이날 새벽부터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의 비행장을 공습해 이집트 공군전력의 80%를 괴멸시키며 하루 만에 제공권을 장악했다. 지상전에서도 이스라엘군은 파죽지세로 요르단에 있는 예루살렘,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했고, 골란고원에서 시리아군을 몰아냈다. 이스라엘로서는 두차례 중동전쟁 이후 아랍국가들의 보복 위협이 상존하는 가운데 “당신을 죽이러 오는 자가 있으니 일어나서 그를 먼저 죽이라”는 히브리 속담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동분쟁의 씨앗을 뿌린 셈이 됐다. 이 선제공격론은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미국 안보전략의 중심에 서게 된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2002년 국가안보전략에서 테..

여적 2020.01.31

[여적]코알라(2020.1.10)

산불은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현상이지만 기후변화 탓에 지구가 감내할 범위를 넘어선 재앙이 돼버렸다.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올라가고 가뭄이 길어지면서 화재가 더 자주, 더 크게 발생하는 것이다. 호주 대륙에서 지난해 9월부터 다섯달째 지속되며 남한의 절반이 넘는 6만㎢를 태운 대형 산불은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기록적 고온이 원인이다.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2년 연속 발생한 대규모 산불도 시베리아 지역의 온난화로 눈이 평소보다 빨리 녹는 바람에 지면이 건조해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2011년 보고서에서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대형 자연화재들이 이산화탄소 대량 배출과 산림 파괴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기후변화를 부추기는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호주 산불 현장에서..

카테고리 없음 2020.01.31

[여적]북한의 로펌(2019.12.12)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은 “중국 공산당은 법을 통해서 통치해야 한다. 법과 제도는 지도자가 교체된다고 해서 바뀌면 안된다”고 했다. 중국은 수차례 헌법개정을 통해 어떤 조직이나 개인도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특권을 갖지 못한다는 법치주의 원칙을 확립했다. 시장경제를 뒷받침하는 민법과 상법도 정비됐다. 중국 공산당이 법치주의를 강화한 이유는 해외투자 유치 때문이기도 하다. 투자자의 재산권이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법률로 제한하는 것은 경제성장의 마중물인 외국인 투자유치에 필수적이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법치주의 강화는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이와 유사한 움직임 김정은 시대의 북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 가족농 중심의 포전담당..

여적 2020.01.31

[여적] '혐한 증폭기' 일본 와이드쇼(2019.12.7)

일본에서 오전 또는 낮 시간대 TV를 켜면 어느 채널이건 예외 없이 ‘정보프로그램’을 방영한다. 사회자 외에 5명 안팎의 패널이 등장해 뉴스와 예능, 생활정보 등에 대해 제작진이 마련한 리포트를 보고 의견을 주고받는다. 테마가 다양하고 방송시간도 2시간이 넘기 때문에 ‘와이드쇼’로도 불린다. 1964년 일본교육방송이 미국 NBC의 뉴스·정보프로그램 를 본떠 만든 가 성공을 거두자 다른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도입했다. 와이드쇼는 시청률 확보를 위해 뉴스프로그램과 달리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이야기식으로 연출하며, 전문가 외에 입담 좋은 예능인들도 패널로 출연시킨다. 시청률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취재 가이드라인을 일탈하는 일도 심심치 않다. TBS 와이드쇼 제작진이 1989년 10월 옴진리교 비판에 앞장서온 ..

여적 2020.01.31

[여적]교도소 책 반입(2019.11.12)

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감옥은 대학이었다. 김 대통령은 1980년부터 2년반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청주교도소의 독방을 탐구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러셀의 , 플라톤의 , 아우구스티누스의 , 토인비의 를 비롯해 철학·신학·정치·경제·역사 등 다방면의 책을 읽었다. 푸시킨·투르게네프·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 등 러시아 문호들의 소설을 탐독했고, 등 동양 고전을 섭렵했다. 이 기간 중 이희호 여사가 구해 들여보낸 책만 600여권이다. 이 여사는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김 대통령을 위해 을 넣어주기도 했다. 영어실력을 결정적으로 다진 시기도 1976년부터 1980년에 걸친 수감·연금생활이었다. “내가 감옥에 있지 않았더라면 어찌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 감히 영어를 공부했겠는가.”(김대중 자서전) 국내 1세대 환경..

여적 2020.01.31

[여적] 베를린의 '마음 장벽' (2019.11.9)

엘베 강변에 형성된 독일 작센주의 주도(州都) 드레스덴은 옛 동독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힌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츠빙거 궁전을 비롯해 오페라극장인 젬퍼오퍼, 호프 교회와 레지덴츠 궁전 등 다양한 건축물이 황홀한 자태를 뽐낸다. 드레스덴은 이런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극우운동 조직 ‘페기다(서방의 이슬람화에 저항하는 애국적 유럽인들)’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페기다의 시위가 젬퍼오퍼 앞 광장에서 열리는 것도 아이러니다. 극우세력들의 발호가 심상치 않자 급기야 드레스덴 의회가 지난달 말 극우주의를 배격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작센주와 튀링겐주를 비롯한 동독 지역에서는 극우성향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부상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이 지났지만 독일의 동서 간..

여적 2020.01.31

[경향의 눈] 도로시의 북한 여행(2020.1.23)

패러글라이딩 도중 토네이도에 휩쓸려 북한 땅에 불시착한 여성 기업인 윤세리와 북한군 장교 리정혁이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 은 한국 드라마의 ‘운동장’을 넓혀 놨다. “일단 못 보던 광경이 풍물지적 흥미를 유발”한다는 평(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대로 북한이라는 금단의 공간을 무대에 편입시킨 것이 우선 득점 포인트다. 북한군 장교, 그것도 군부서열 1위인 인민군 총정치국장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설정도 전무후무하다. 상대는 재벌 2세인 여성 CEO. 남녀 주인공이 남북 체제의 파워집단 출신이라는 배역설정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트집을 잡자면 주인공인 북한군 장교가 지나치게 멋진 것부터 용납 못하겠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불온’해 보이는 드라마가 불시착은커녕 시청률 1위의 고공비행을 하는 ..

칼럼 2020.01.31

[경향의 눈] 문재인 정부의 '새로운 길'(2019.12.26)

북한이 준비한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은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고만으로도 북한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북한과 미국 간에 2년간 조성됐던 협상 국면이 종언을 고했음을 이보다 더 극적으로 알리기도 쉽지 않다. 이제 북·미관계는 수십년간 되풀이해온 경로를 다시 밟을 가능성이 커졌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협상 시작→갈등 재연→협상 중단을 무한 반복하는 폐곡선 경로다. 생각만 해도 폐소공포증이 느껴진다. 한반도의 운명이 바위 굴리기 천형(天刑)을 반복하는 시시포스와 다를 게 뭔가. 북한이 내년 초 신년사에서 밝힐 ‘새로운 길’이 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폐곡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나서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북한은 미국의 ‘절대반지’인 대북 제재를 무력화하는 쪽으로 국제질서 재편을 꾀할 가능성이 있다..

칼럼 2020.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