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코(赤穗)번의 사무라이들이 복수에 나선 날입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72) 전 총리가 다시 일본 정치의 핵으로 등장했다. 2005년 소속정당인 자민당이 자신의 우정민영화 정책에 반대하자 “자민당을 때려부수겠다”며 국회해산을 단행하고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던 그가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과의 정면대결에 나선 것이다.
고이즈미는 14일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76) 전 총리와 도쿄 호텔에서 만난 자리에서 불쑥 추신구라(忠臣藏) 사건을 꺼냈다. 추신구라는 도쿠가와 막부시대인 1700년대초 아코번의 무사 47명이 막부관료와의 싸움에서 밀려 자결을 강요당한 주군의 복수를 하고 전원 할복한 사건이다. ‘탈원전’을 내걸고 도쿄도지사 선거에 나서는 호소카와를 전폭 지원하기로 한 자신의 비장한 심경을 역사적 사건에 빗댄 것이다.
“이번 싸움은 원전 제로(zero)로도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룹과, 원전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는 그룹과의 싸움이다.” 50분간 회동을 마친 고이즈미는 기자들에게 이번 도지사 선거를 탈원전 찬반투표로 몰아가겠다는 전략의 일단을 드러냈다. 총리 재임중 중의원을 해산시킨 뒤 실시한 총선을 ‘우정민영화’의 찬반을 묻는 ‘우정개혁 선거’로 몰아가 압승을 거둔 2005년을 연상시키는 발언이다.
이날 회동을 기점으로 다음달 9일 치러지는 도쿄도지사 선거는 표면적으로는 자민당이 지원하는 마쓰조에 요이치(舛添要一) 전 후생노동상과 호소카와의 양자대결 구도가 됐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베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과 고이즈미의 결전이 된 셈이다.
고이즈미가 ‘친정’인 자민당, 정치적 제자인 아베 총리와 맞대결을 불사하기로 한 것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에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원전재가동에 나서려는 아베 정권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고이즈미는 지난해 8월 핀란드 온카로 방사능 폐기물 최종처분장을 방문한 뒤 지반이 불안하고 지하수가 많이 나오는 일본에서 핵폐기물 처리시설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이후 강연 등에서 탈원전 소신을 밝혔으나 아베는 지난해 11월 “지금 상황에서 원전제로를 약속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며 충고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고이즈미는 그런 아베를 ‘탈원전 저항세력’으로 간주하고, 정치적 인연을 떠나 직접 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고이즈미의 등장에 자민당은 전전긍긍하면서도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섣불리 자극할 경우 승부욕에 기름을 부어 더 큰 화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아는 자민당 간부들은 고이즈미에 대한 정면비판을 삼가하는 대신, 탈원전 이슈를 희석시키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달 중에 하려던 에너지기본계획의 발표도 연기했다. 자민당은 한때 고이즈미의 차남이자 차세대 총리감으로 대중적 인기가 높은 고이즈미 신지로 부흥정무관을 여당후보 응원에 투입해 ‘맞불’을 놓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지로도 15일 “지원에 나설 대의명분이 없다”며 ‘부자대결’ 가능성을 일축했다.
고이즈미의 참전으로 이번 선거는 일거에 아베 정권 중간평가로 바뀌게 됐다. 자민당이 패배할 경우 아베 정권의 원전재가동·수출 정책은 물론, 장기집권 기반이 붕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거꾸로 고이즈미가 패한다면 5년5개월 장수총리를 지낸 뒤 물러난 정치인생이 실패로 마무리될 위험성이 있다. 돌아온 승부사 고이즈미에 전 일본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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