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악역'을 버리면 경제가 죽는다

서의동 2010. 3. 17. 19:19
광우병 논란이 한창이던 1996년의 영국. 십수년간 정부에 조언해온 아일린 루베리 박사는 3월8일 광우병(BSE) 자문위원회 회의에 문건 하나를 제출했다. 루베리 박사는 이 문건에서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인간 광우병)이 소에서 발생하는 광우병인자가 종을 뛰어넘어 발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문건은 1985년 이후 11년에 걸쳐 광우병의 인간전염 가능성을 괴담이라며 외면해오던 영국 정부의 태도를 하루아침에 바꿔놨다. 
열흘쯤 지난 뒤 스티븐 도렐 보건부 장관은 영국 의회와 국민에게 “영국산 쇠고기가 안전하지 않다”고 실토했고, 광우병을 둘러싼 논란은 종료됐다. 루베리 박사의 소신있는 연구와 건의도 그렇지만, 이를 수용한 영국 정부의 태도도 인상적이다.

콤 케러허가 쓴 <얼굴없는 공포, 광우병>을 보며 영국에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궁금했는데, 내각책임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돌았다. 대통령제에 비해 권력이 분산돼 있어 소신이 통하는 '중립지대'가 자리하는 것 아닐까라는 추론이다. 중립지대의 존재는 사회적 갈등이나 논란에 대해 정파적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않는 해결방안이 생겨날 가능성을 높인다.

한국에는 이런 중립지대가 없다. 권력을 쥔 쪽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형 체제하에선 중립이 용납되지 않는다. 토론을 통해 지혜를 모으거나, 권위를 인정받는 중립적 인사의 도움으로 해법을 찾는 대신 ‘죽기살기’식의 맞잡이가 연출된다. 
더 큰 문제는 나라의 장래를 길게 보고 소신을 발휘하는 정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력자의 입맛에 맞도록 가공되지 않으면 정책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5년짜리 시한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수십년을 내다보고 짜야할 호흡 긴 정책들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중립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소신을 펴면 대가를 치른다. ‘4대강 사업의 실체는 대운하’라고 밝힌 국책연구기관의 한 연구원은 중징계를 받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정책의 문제점을 고발한 PD는 약혼자 앞에서 검찰에 연행됐다.

요즘 한국은행도 앞의 연구원이나 PD와 엇비슷한 처지다. 이명박 정부 2년간 한국은행은 성장주의자들로 채워진 경제팀의 노골적 반감에 시달렸다. ‘매파’로 소문난 이성태 총재도 조리돌림을 당했다. 
 
중앙은행은 시중에 돈이 넘치고 경기가 과열되면 금리를 올리거나 돈줄을 죄어 경제에 거품이 끼는 것을 막아야 할 임무가 있다. 가끔은 경기침체기라도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면 금리를 묶어야 한다. 성장률이 더 오르길 바라는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에게 중앙은행은 성가시고 밉살스러운 존재다. 
하지만 ‘악역’을 맡아 정부를 견제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숙명이다. 이런 경보음을 존중하지 않으면 경제가 한쪽 방향으로 쏠리게 돼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점을 그들도 알 것이다. 알고는 있으되 5년 뒤의 뒷감당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는 것 아닐까.

“(한은이) 국가운영의 책임자인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출신 김중수 한은 총재 내정자가 내정 직후 한 말들을 보면 ‘악역’은 커녕 정부와 오순도순 지낼 요량으로 보인다. 국민경제가 아니라 청와대를 보며 통화정책을 펴겠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한은의 힘은 돈을 찍어내는 발권력에 있다. 한은이 ‘악역’을 그만두면 중앙은행이 아니라 ‘기획재정부 발권국’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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