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천안함과 함께 침몰한 대북사업

서의동 2010. 5. 27. 10:25
대북사업은 가끔 ‘애국사업’으로도 불린다. 본래 조총련이 북한에 물자나 외화를 보내는 사업에 쓰이던 말이 대북사업을 가리키게 된 것은 투자금 회수가 쉽지 않고 숱한 리스크(위험)를 각오해야 하는 사업 속성과 관련이 크다. 잘해야 본전이고 자칫 돈을 떼일 가능성도 높아 신념없이 버텨내기 힘들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제정신이냐”는 핀잔과 오해도 받기 일쑤다.

1991년부터 북한과 교역을 해온 김영일 효원물산 회장도 사업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북한이 시멘트 납기일을 맞추지 않아 건설 성수기를 놓쳤는가 하면 서류 미비를 이유로 남한 당국이 통관을 시켜주지 않아 북한산 냉동명태를 6개월 넘게 항구에 보관하다가 폐기하기도 했다.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시장’에 도전해 보겠다며 뛰어든 김 회장은 “초창기엔 기업인으로 가장한 정보당국자인 줄 알고 북측이 잘 만나주지도 않았고 선박도 여의치 않아 물건값보다 운송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대북사업 현장에선 때론 첩보영화 같은 일들도 벌어진다. 영화배우에서 대북사업가로 변신한 김보애씨가 쓴 회고록의 한 대목. 김씨가 남북 예능인의 첫 합동공연인 평양 민족통일음악회를 성사시킨 뒤 공연 사흘 전 평양길에 오르던 99년 12월19일. 공항 세관원이 김씨의 가방을 뒤지다 20만달러나 되는 돈뭉치를 발견하고 용처를 물었다. “북에 전해줄 돈입니다. 평양 공연을 위해 정당하게 가져가는 돈입니다”라고 항변했지만 압류당했다. 돈을 빼앗긴 채 풀이 죽어 베이징에 도착한 김씨에게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관계자가 20만달러를 내밀며 “우리가 임시로 변통했으니 이걸 가지고 평양에 전해달라. 나중에 서울에서 돈을 보내주기로 했으니 받으면 된다”고 했다. 알고 보니 김씨를 후원하던 박재규 당시 경남대 북한대학원 원장이 마카오 루트를 통해 송금한 것이었다.

반세기 전 총구를 겨눴던 북한과 파트너를 이뤄 사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북한 사람들에게 하루아침에 등가교환의 시장 마인드가 생겨날 리도 만무하다. 가끔은 물건을 보지도 않은 채 견본만으로 계약을 해야하고, 물건 내용이 견본과 달라져도 클레임(시정 요구)하기 어렵다. 애국사업이란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이런 시행착오와 선구자들의 희생을 토대로 대북사업은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교류의 폭이 넓어지면서 상거래 원칙도 조금씩 틀이 잡혔다.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과 금강산 관광사업,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개성공단 사업이 전기를 마련했다. 지난 10년간 연평해전 등 크고 작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지난 정부가 정치·군사적 대응과 경제적 교류를 분리하는 ‘정경분리’ 원칙을 지켜온 영향도 대북사업의 리스크를 줄였다.

정부가 천안함 침몰 사고에 대해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증거들을 동원해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며칠 후엔 이명박 대통령이 남북 교역과 교류의 중단을 선언했다. 북에서 반출되는 물자의 남한 반입이 금지되고 북측 상선의 남측영해 통항도 금지됐다. 지난 10년간 지켜온 정경분리 원칙도 침몰했다.

남북 대결국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대북사업은 시작도 어렵지만 한 번 닫히고 나면 다시 열기가 더욱 어렵다. 대북사업가들이 20년간 키워온 남북공영의 꿈이 지금 서해의 시커먼 바닷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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