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상투적인 이야기부터. 금융의 본래 역할은 돈을 돌려 실물경제가 잘 굴러가도록 하는 데 있다. 사람 몸으로 치면 돈은 혈액이고, 실물경제는
근육과 살이다. 피가 흐르지 않으면 살이 썩거나 근육이 괴사한다. 반대로 혈액과다도 몸에 문제를 일으킨다.
역사적으로 보면 금융이 실물경제의 매개자 역할에서 벗어나 산업에 군림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공교롭게도 한 체제가 쇠퇴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영국의 패권시대가 막바지로 치닫던 20세기 초와 미국의 달러패권이 힘을 잃어가던 2000년대 초반이 그랬다. 그 시도들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금융은 물론 실물경제도 함께 망했다. 1929년의 세계 대공황과 ‘약탈적 대출’이란 별명이 붙었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대표적이다.
국내에선 연간 성장률이 7~8%를 넘던 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저성장 체제로 바뀔 무렵부터 금융산업 육성론이 등장했다. 골드만삭스 같은 대형 투자은행(IB)을 키우겠다며 자본시장법이 만들어졌고, 금융 중심지 건설이 추진됐다. 금융도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신화’와 ‘금융강국 코리아’, ‘금융허브’라는 말들이 춤을 췄다. 영어로 뒤범벅된 금융용어들을 한두 개쯤 주워 섬겨야 행세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 몇 년간 금융회사들이 과연 실력을 키워 우리 경제에 기여했을까. 그렇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몇 차례 인수·합병으로 4대 은행의 과점체제가 되면서 공공성과 소비자 편익은 줄어들었다. 장래성 있는 중소기업을 골라낼 실력이 없으니 주택담보대출만 늘려 자산 거품을 키웠다. 공공성 대신 수익성이 최고 덕목이 되자 어느 은행은 위험한 파생상품 투자에 나서 1조원이 넘는 돈을 날렸다.
은행들은 ‘글로벌화’를 부르짖었지만 정작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해외에서 1달러 한 장 꿔오지 못했다. 환차손에 특효가 있다며 은행들이 판매한 파생금융상품 키코(KIKO)는 멀쩡하던 중소기업들을 쓰러뜨렸다. 결국엔 국민 세금으로 조성한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이 은행들에 뿌려졌고, 무능력한 은행을 위해 정부가 해외에 보증을 서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은행들은 서민들에게 가산금리를 받아 챙겼다. 은행들이 실물경제에 민폐만 끼친 것이다.
올해 초부터 은행산업 재편이 거론된다. 몇 개 은행을 통째로 합치는 메가뱅크(거대 은행) 구상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은행산업 재편이 국민경제에 어떤 실익을 줄지 설명이 부족하다. “덩치가 커야 위기대응 능력도 커진다”고 하지만 거대 은행들이 위기에 더 취약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반 국민에겐 그저 동네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훤히 꿰뚫고 있고, 급전이 필요할 때 선뜻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 최상이다. 기술력은 있지만 자금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뒷배가 되어주면 족하다. 그 기업이 잘돼 고용을 늘리면 그만큼 국민경제가 발전한다. 금융의 부가가치가 달리 특별한 게 아니다.
태평양 건너에서 이뤄지고 있는 금융규제 논의는 금융회사들이 국민경제보다는 제 뱃속만 챙겼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은행들의 과점체제를 깨고 위험한 거래를 억제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정부는 아직도 금융이 더 커져야 한다며 국제적 논의에서 비켜나 있다. 금융 본연의 기능에 대한 성찰 없는 맹목적인 대형화는 괴물만 키울 뿐이다. 금융산업 재편 논의는 국민경제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금융이 실물경제의 매개자 역할에서 벗어나 산업에 군림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공교롭게도 한 체제가 쇠퇴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영국의 패권시대가 막바지로 치닫던 20세기 초와 미국의 달러패권이 힘을 잃어가던 2000년대 초반이 그랬다. 그 시도들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금융은 물론 실물경제도 함께 망했다. 1929년의 세계 대공황과 ‘약탈적 대출’이란 별명이 붙었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대표적이다.
국내에선 연간 성장률이 7~8%를 넘던 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저성장 체제로 바뀔 무렵부터 금융산업 육성론이 등장했다. 골드만삭스 같은 대형 투자은행(IB)을 키우겠다며 자본시장법이 만들어졌고, 금융 중심지 건설이 추진됐다. 금융도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신화’와 ‘금융강국 코리아’, ‘금융허브’라는 말들이 춤을 췄다. 영어로 뒤범벅된 금융용어들을 한두 개쯤 주워 섬겨야 행세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 몇 년간 금융회사들이 과연 실력을 키워 우리 경제에 기여했을까. 그렇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몇 차례 인수·합병으로 4대 은행의 과점체제가 되면서 공공성과 소비자 편익은 줄어들었다. 장래성 있는 중소기업을 골라낼 실력이 없으니 주택담보대출만 늘려 자산 거품을 키웠다. 공공성 대신 수익성이 최고 덕목이 되자 어느 은행은 위험한 파생상품 투자에 나서 1조원이 넘는 돈을 날렸다.
은행들은 ‘글로벌화’를 부르짖었지만 정작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해외에서 1달러 한 장 꿔오지 못했다. 환차손에 특효가 있다며 은행들이 판매한 파생금융상품 키코(KIKO)는 멀쩡하던 중소기업들을 쓰러뜨렸다. 결국엔 국민 세금으로 조성한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이 은행들에 뿌려졌고, 무능력한 은행을 위해 정부가 해외에 보증을 서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은행들은 서민들에게 가산금리를 받아 챙겼다. 은행들이 실물경제에 민폐만 끼친 것이다.
올해 초부터 은행산업 재편이 거론된다. 몇 개 은행을 통째로 합치는 메가뱅크(거대 은행) 구상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은행산업 재편이 국민경제에 어떤 실익을 줄지 설명이 부족하다. “덩치가 커야 위기대응 능력도 커진다”고 하지만 거대 은행들이 위기에 더 취약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반 국민에겐 그저 동네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훤히 꿰뚫고 있고, 급전이 필요할 때 선뜻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 최상이다. 기술력은 있지만 자금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뒷배가 되어주면 족하다. 그 기업이 잘돼 고용을 늘리면 그만큼 국민경제가 발전한다. 금융의 부가가치가 달리 특별한 게 아니다.
태평양 건너에서 이뤄지고 있는 금융규제 논의는 금융회사들이 국민경제보다는 제 뱃속만 챙겼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은행들의 과점체제를 깨고 위험한 거래를 억제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정부는 아직도 금융이 더 커져야 한다며 국제적 논의에서 비켜나 있다. 금융 본연의 기능에 대한 성찰 없는 맹목적인 대형화는 괴물만 키울 뿐이다. 금융산업 재편 논의는 국민경제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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