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경제에 꼭 필요한 싸움

서의동 2010. 8. 4. 22:22
사각의 링. 한 선수가 상대방을 기세좋게 몰아붙인다. 

코너에 몰린 선수는 가드를 잔뜩 올린 채 공이 울리기만을 기다린다. 상대방에게 결정적 ‘한 방’이 없어 곧 상황이 바뀔 것이라며 버틴다. 모처럼 파이팅이 벌어지자 관객들도 시선을 주긴 하지만 화끈한 승부에 대한 기대는 접는다. 공격수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합은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승부로 끝난다.



사진출처= www.boxnews.com


최근 전개되고 있는 정부와 대기업 간의 공방을 지켜보면 이런 맥 빠진 결말로 치닫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제대로 된 한 방이 나올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지만 그간의 경험에 비춰보면 ‘글쎄요’다. 

그 ‘한 방’이란 특별난 게 아니다. 대기업에 대해서도 정부가 예외없는 법집행에 나서라는 의미다.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모범으로 통해온 미국은 대기업에 대한 사법당국의 법집행이 엄정하기로 정평 나 있다. 

2000년대 초반 파산한 미국 2위 장거리전화업체 월드컴의 최고경영자(CEO) 버나드 에버스는 회계부정을 묵인한 혐의로 징역 25년을 선고받았다. 15억달러 규모의 분식회계를 저지른 에너지기업 엔론의 CEO 제프리 스킬링에게도 징역 24년이 선고됐다. 

미국 정부가 대기업에 대해 엄격한 이유는 두 명의 루스벨트가 대기업과 벌인 전쟁의 영향이 크다. 

26대 대통령(1901~1909년)을 지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무려 40개의 독점기업을 해체하면서 기업들의 부패와 불법행위에 맞섰다. 32대 대통령(1933~45년)을 지낸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문제에 팔을 걷어붙였다. 
루스벨트는 35년 의회에 보낸 서한에서 소수 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사적 사회주의’(private socialism)로 규정하며 근절의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좌파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의 개혁 이후 미국 경제는 건강성을 회복하게 된다.

반면 엔론에 버금가는 회계부정을 저지른 한국의 재벌총수는 대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수조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재벌총수에게는 형이 선고된 지 138일 만에 대통령 특별사면이 내려졌다. 

잘못을 저질러도 알아서 봐주는 정부, 이런 정부를 선출한 국민이 만만하게 보였던지 이 총수는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대·중소기업 관계는 그나마 현행법만 엄격하게 집행했더라도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쟁입찰을 통해 하도급업체를 선정해놓고 추가로 가격협상을 벌여 단가를 깎거나, 발주업체에서 현금을 받은 뒤 하청업체에는 어음을 끊어주는 일은 엄연히 불법이지만 기업은 물론이고 공정당국도 불감증에 걸려 있다. 2005년 이후 하도급법 위반으로 공정위에 접수된 9800건 중 고발된 사례는 11건에 불과하다. 

노골적으로, 혹은 교묘하고 집요하게 이뤄지고 있는 산업현장의 불공정행위를 제대로 감시하기 위해 공정위 고발만으로 수사가 가능한 ‘전속고발권’은 이래서 폐지돼야 한다. 출자총액제한제의 사실상 폐지와 금·산분리 완화 등 사전적 규제를 무력화시킨 정부가 사후규제마저 손을 놓는다면 경제력 집중현상은 영영 해소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가 모처럼 서민과 중소기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반가운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용두사미로 끝난다면 불신은 배가된다. ‘정치권력은 유한하지만 우리는 무한하다’는 자본권력의 오만을 이번에 꺾으려면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싸우려면 제대로 싸워라. 우리 경제에 지금 가장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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