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떤 취업기-1986년과 2010년

서의동 2010. 9. 13. 15:57

일본 하네다 공항 부근의 창고단지 풍경. copywrite by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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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겨울방학이던 1986년 1월 경기 부천시의 오디오 스피커 생산업체에 아주 잠깐 다녔다. 
프레스 기계에서 찍혀나온 스피커 모양의 금속붙이들을 정리하는 게 일이었다. 수십 개를 간추려 작업장 한쪽에 옮겨 쌓고 돌아오면 기계가 토해낸 일감들이 또 수북이 공장바닥에 쌓였다. 몇시간 못가 손아귀와 팔뚝이 후들거렸다. 

행여나 싶어 며칠간 머리를 감지 않고 가장 허름한 점퍼를 걸친 채 소사여객 버스를 타고 도착한 약대동에는 작은 공장들이 즐비했다. 
사진도 붙이지 않은 이력서를 쓱 훑어본 관리사원은 다음날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하루 일당 3700원에서 점심값 600원을 떼면 3100원, 한 달 꼬박 일해도 야근을 하지 않으면 10만원이 채 안됐다. 대학가 하숙비가 12만원이던 시절이었다.

점심시간. 식판을 받아든 직원들은 부지런히 숟가락만 놀려댔다. 말이 위험한 시대이기도 했지만 직원들은 과묵했고, 끼어들 기회도 없었다. 

일당 2800원의 일회용 라이터 공장에 취업한 학교 동기는 첫날 수천 개의 라이터를 검사하느라 오른손 엄지의 허물이 벗겨졌다. 
다음날엔 왼손 엄지, 다음엔 오른손 검지와 왼손 검지가 벗겨졌다. 퇴근하면 부엌이 딸린 단칸 자취방에 녹초가 된 몸을 누인 채 함께 끙끙 앓았다. 

그렇게 보름쯤 다니다 그만뒀다. 그 뒤 학교에서 염불처럼 외던 ‘민중’ ‘노동자’ 따위의 말은 입에 올리기도 싫어졌다. ‘공장사람들과 사귀면서 조직화를 시도하라’던 선배의 말은 ‘개나 물어갈’ 소리였다. 그들에게 나는 어설픈 시다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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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뒤인 지난 8월 초. 경향신문이 연재 중인 ‘고용난민의 시대-일자리 없나요’ 취재를 위해 인천 부평역의 한 파견업체를 찾았다. 
대기업에 TV부품을 납품하는 업체에 하루 취업체험을 할 생각이었다. 이력서 용지의 빈칸들을 생각나는 대로 메우면서 약간 긴장했지만 신원확인 같은 건 없었다. 

주민등록증을 안 보여줘도 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다. 쓰다 버리는 ‘일회용’이니 누구건 상관없다는 걸까. 

한 달에 이틀을 빼고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꼬박 근무하면 190만원을 받는다는 파견회사 직원의 설명을 반쯤 건성으로 듣고 있었지만 함께 면접을 보던 20대 청년들은 절박해 보였다. 
생산업체에서 본면접을 한 번 더 봐야 한다는 말에 표정이 어두워진 그들은 건물 밖으로 나오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하루벌이가 아쉬운 그들과 달리 취재고 뭐고 안도감부터 들었다. 

다음날 특별취재팀의 후배 둘은 물류업체와 가전제품 하청업체에 하루짜리 취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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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이 모아온 취재일지에는 ‘이렇게도 사는구나’ 싶은 사연들로 그득했다. 

철야를 마친 귀갓길의 파견노동자를 취재한 후배는 “작업리듬을 깨지 않으려고 일요일에 TV를 보며 밤을 새운다”는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기분 더럽고 수치스러움”을 감수하며 매일 아침 출근길 직장인들이 오가는 지하철역 한쪽 구석에서 파견업체 직원을 기다린다. 

기자들이 대기업들이 사상 최대의 이익을 냈다는 실적기사를 쓰고 있을 때 그들은 아침식사에 쓴 소주를 곁들이며 야근의 피로를 풀었다. 24년 전엔 큰일날 얘기지만 지금 공장에선 등록금을 벌려는 휴학생들로 넘친다.

특별취재팀은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는 노동난민의 행렬을 목도했다. 한국사회는 ‘불안노동’으로 넘실대는 거대한 바다였다. 

하지만 두 달여 취재로 바다의 한쪽 귀퉁이라도 제대로 본 것일까. 24년 전의 무력감이 다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