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출장길에 도쿄시내 중심부 유라쿠초에 있는 가전양판점 ‘빅 카메라’에 들렀다.
빼곡하게 전시돼 있는 가전제품들마다 손글씨로 쓰인 할인 안내표시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고 남대문 시장에서처럼 점원들이 목청 높여 호객을 하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 씽씽한 실내공간 속에서도 열기가 느껴졌다.
유라쿠초와 여기서 멀지 않은 긴자에는 이런 특정 업종의 전문양판점들이 즐비하다. 최근 국내에 진출한 유니클로의 긴자점도 부근에서 성업 중이다.
‘일본 상업의 얼굴’로 통하는 긴자·유라쿠초 지역은 유통업체들 간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격전지이고, 수많은 유통업체들이 명멸한 곳이다.
일본 유통의 근현대사는 꽤 드라마틱하다. 미국에서 시작된 편의점 체인 세븐일레븐을 일본형으로 표준화한 세븐일레븐 재팬 이야기나 가전업체의 대표기업인 마쓰시다전기와 ‘30년 전쟁’을 치른 후유증으로 몰락한 대형유통점 다이에의 사례를 보면 난세라 일컬어지던 16세기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방불케 한다.
일본 유통과학대학 최상철 교수가 쓴 <위대한 기업을 뛰어넘는 이기는 기업>(한국경제신문)은 상인국가 일본, 그중에서도 가장 격전지인 유통업계의 흥망성쇠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100엔숍으로 성공한 다이소 그룹의 창업자 야노 히로타케의 경영철학은 ‘임기응변만이 살길’이다.
모든 물건을 100엔에 파는 상식을 뒤엎는 승부수로 회사를 이끌어온 그의 이력에 딱 어울린다. 그는 직원들에게 “3년 안에 회사가 망한다”며 경각심을 불어넣거나 “점포는 목매 죽지 않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괴짜발언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단순히 저가상품만을 파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상품들을 단돈 500엔으로 30분간 즐길 수 있는’ 극장형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라는 독특한 발상이 소비자들의 공감을 사면서 시장점유율 60%(2008년 기준)대의 독보적 존재로 성장했다.
그런가 하면 마쓰시다 전기(파나소닉)는 계열 소매점인 ‘내셔널숍’을 핵심 판매루트로 삼는 유통전략을 수십년째 고수하면서 소비자들의 신뢰와 판매경쟁력 확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아왔다.
2004년 신제품 PDP TV인 ‘비에라’를 개발한 뒤 8000여개의 소매점에 시판 전날밤 일제히 진열하는 ‘깜짝 전략’으로 이 분야 1위에 오른 것도 계열 소매점을 유지해온 덕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기업만화 <시마과장>의 배경인 하쓰시바전기의 모델이 바로 마쓰시다전기다.
일본 유통업체들은 격전 속에서도 상생협력을 꾀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대형 유통업체 이온이 중소기업들에 PB상품(대형소매상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브랜드 상품) 생산을 맡기면서도 비용부담을 덜어주며 장기 거래관계를 지속하는 모습은 한국의 현실과 사뭇 다르다.
저자는 일본의 상인들이 제조업을 뒷받침하면서 일본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고 진단한다. 2차대전 후 일본 제조기업들이 급성장했지만 마케팅 수준은 낮아 유통업체들이 상품판매를 맡는 역할분담이 이뤄졌고, 근면한 일본상인들이 새로운 시장개척에 나서는 동안 제조기업은 생산에 전념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이에의 창업자 나카우치 이사오를 직접 인터뷰할 정도로 꼼꼼한 취재와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딱딱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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