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빨간 신호등' 앞에 선 일본

서의동 2011. 5. 27. 10:27
도쿄의 중심부인 오테마치 거리. 저녁 6시가 넘어서면서 퇴근을 위해 사무실을 빠져나오는 직장인들로 거리가 가득 메워진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이들의 옆얼굴은 석양으로 벌겋게 물든다.
5월 도쿄의 저녁 공기는 쾌적하다. 오가는 행인들의 표정은 ‘후쿠시마’ 이전과 다름없어 보인다.
하긴 1986년 체르노빌 사고 때도 현지에서는 체육대회도 소풍도 했다고 하니, 일상의 힘은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만성피폭이 무서운 원전사고 이후 어떤 일상을 만들어야 할지 실로 고민스럽다.    

3월11일 규모 9.0의 대지진 직후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던 TV의 공익광고는 어느덧 자취를 감췄다. 보도와 시사프로그램이 많은 NHK를 제외하면 나머지 민영방송들은 다시 예능 프로그램으로 시간대를 채운다. 아는 일본기자는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 사태이후 광고가 급감했고, 이번 지진으로 더 떨어지면서 제대로 된 드라마가 TV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신문들은 여전히 후쿠시마 원전상황을 주요 기사로 다루고는 있지만 정부와 도쿄전력의 ‘김빼기’ 전술이 먹혀 들었는지 ‘뉴스’는 없고, “지진직후 이미 원자로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는 식의 '뒷북성'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석달이 다 돼가도록 도호쿠 지방은 정리되지 않은 쓰나미 잔해들로 뒤덮혀 있다. 후쿠시마의 아이들은 섭씨 30도 가까운 날씨에도 모자에 마스크를 하고, 심지어 긴팔 옷까지 입고 다닌다. 공원에서 흙장난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후쿠시마에서는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이런 나날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후쿠시마' 이후 일본에 체류하는데 가장 큰 골칫거리는 먹는 일이다. 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물을 끓이거나 밥을 지을 때는 반드시 싱크대에 딸린 정수기를 쓴다.
하지만 괜찮을지 어떨지 알 재간이 없다. 도쿄도가 매일 발표하는 수돗물의 방사성물질 모니터링 결과는 ‘방사성요오드131 불검출, 세슘137 불검출’로 표시돼 있다. 한동안은 핸드폰에 깔아둔 어플리케이션을 열어 확인했지만, 요즘은 거의 들여다보지 않는다. ‘제대로 검사를 하기는 한 걸까’라는 불신감 때문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주변에서 출하된 채소류 상자가 ‘폐기’라고 적힌 채 쌓여 있다. (출처: 경향신문 DB)



동네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갈 때는 생선이나 육류, 채소류의 원산지 표시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특히 생선은 원산지 표시가 ‘태평양산’ 이라는 식으로 애매하게 붙은 것들이 많다. 태평양이라면 후쿠시마 앞바다도 오사카 앞바다도 같은 태평양 아닌가.
채소와 달리 여기저기 헤엄쳐 다니는 생선에 원산지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후쿠시마에서 내내 놀다 시즈오카 앞바다쪽으로 헤엄쳐가다 잡힌 생선에 '시즈오카'라는 원산지가 붙어도 할말이 없다.
후쿠시마 앞바다는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해역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차라리 '아메리카산'(일본은 미국을 아메리카로 표기)이 더 반가울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외식을 자주하게 되지만 생선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그렇게 신경쓰는게 건강에 더 해로울지 모르겠다)


한국인들과 만나면 으레 ‘물문제’가 화제다.
도쿄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한 학자는 아직도 밥지을 때 생수를 쓴다. 아무래도 '체내축적'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지진직후 생수판매를 1인당 1병으로 제한했을 당시 한 주재원은 옷을 여러겹 입고 슈퍼에 가서 생수 1병을 산 뒤, 옷을 한겹씩 벗어가며 다른 사람인 양 생수를 사다 판매원한테 적발됐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나돈다.
일본 정부를 믿고 따르기엔 미심쩍다는 것은 일본인들도 엇비슷한 것 같다. 일본 신문의 한 기자와 만났을 때 일본 정부가 방사성물질확산예측 시스템을 왜 그간 공표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정부의 대응에 좀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수긍했다.
처음 만나는 일본인들은 혼자 살고 있다고 하면 가족들이 방사능 때문에 입국을 연기한 것 아닌지 궁금해하는 눈치다. “지진 이전부터 예정된 일”이라고 설명해도 100% 납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쯔유’라고 불리는 장마는 올해 예년보다 열흘 일찍 시작된다. 일본은 장마와 태풍이 겹쳐온다. 수소폭발로 건물이 형편없이 손상된 후쿠시마 원전이 태풍을 견뎌낼지, 방사성물질로 오염된 원전부지에 내린 빗물이 고스란히 고농도 오염수가 될텐데 그건 어떻게 처리할지도 우려스럽다. 전혀 미덥지 못한 도쿄전력이 이런 난제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일본인들은 일을 정확하고 말끔하게 처리한다는 이미지는 도쿄전력을 보면서 완전히 구겨졌다. 그나마 청량감이 있는 뉴스는 간 나오토 총리가 에너지 정책을 재검토 의욕을 보이고 있는 것과 손정의(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사장이 태양광발전소 계획을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는 정도다.
이들의 '불온한' 움직임에 원전 기득권층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보수 신문들은 최근들어 ‘간오로시(간 퇴진)’를 위한 자민당과 민주당 내 일각의 움직임에 힘을 준다. 자민당은 간 총리 불신임안을 6월 초 제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원전으로 배를 불려온 '마피아'들에게 간 총리는 공적이 되고 있는 셈이다. 자칫 간 총리가 '십자가형'을 당하는 것 아니냐는 불길한 생각마저 든다.
 


출처: 경향신문DB



외국인의 맨눈으로 본다면 '후쿠시마' 같은 대사고를 겪고도(아니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치권의 모습은 기묘하기까지 하다. 전 정치권이 일본국민과 세계를 향해 석고대죄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먼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탈원전'의 움직임이 본격화됐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나라에선 그런 반성이 보이지 않는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사회를 '빨간 신호등이라도 모두 함께 건너면 괜찮다' 는 말로 설명한 적이 있다. 일본은 이런 정신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유발했다. 지금도 그 빨간 신호등을 다시 건너려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