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본정치의 '료마 마케팅'

서의동 2012. 2. 16. 17:42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는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다. 에도(江戶)시대 말기 하급무사였던 료마는 영지를 떠나 지사(志士)로 활동하면서 강력한 추진력으로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인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성립에 기여했다. 교토(京都)에서 자객의 칼에 맞아 요절한 료마는 한동안 잊혀졌다가 고향 고치(高知)현의 한 신문이 10여년 뒤 그의 평전을 연재하면서 알려졌다. 러일전쟁 직전엔 메이지 왕후의 꿈속에 료마가 나타나 “제가 해군들을 수호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국에 회자됐고, 일본이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한 이후 료마는 영웅으로 추앙됐다. 이후 최근까지 료마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만 20편이 제작됐고, 2010년 NHK가 방영한 <료마전>까지 TV 드라마도 8차례 만들어졌다.

최근 일본 정치권에서 료마 붐이 다시 불고 있다. 차세대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은 최근 발표한 총선 공약을 ‘선중팔책(船中八策)’을 본떠 ‘유신팔책(維新八策)’이라고 불렀다. 선중팔책은 료마가 교토로 가는 배 위에서 구상한, 근대 일본의 기초를 닦기 위한 8가지 정치강령을 가리킨다. 하시모토 시장은 “선중팔책의 심정으로 공약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21세기판 료마’로 불리고 싶은 속내가 엿보인다.

정치학원을 뜻하는 정치숙(政治塾)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19세기 풍경이다. 정치숙은 바쿠후(幕府) 말기 사상가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이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원조다. 하시모토가 세운 ‘유신정치숙’에 정원 300명의 10배가 넘는 3326명이 입학신청을 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지원자 중에는 정부 관료와 지방의원은 물론 현역의원도 끼어 있었다. 

일본 정치권이 ‘19세기 마케팅’에 열중하는 것은 당시가 근·현대사에서 가장 활력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바쿠후 최고권력자인 쇼군(將軍)이 외세에 절절매고 있을 무렵 에도(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사쓰마번(가고시마현)이나 조슈번(야마구치현)은 힘을 길러 바쿠후에 대항할 정도로 커졌다. 료마와 쇼카손주쿠의 지사들은 구체제의 ‘붕괴열’을 이용해 일본 개조를 실현했다. 매년 총리를 갈아치워야 하는 중앙정치권과 대조적으로 오사카, 나고야, 도쿄의 자치단체장들에게 힘이 쏠리는 요즘과도 닮아있다. 

확실히 정치에는 대중의 열광이 필요하다. 일본 정치인들이 19세기 감수성에 호소하는 것은 ‘식어버린 피자’ 같은 전후(戰後) 정치보다 개국시기가 유권자들에게 울림이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식 민주주의가 도입된 지 150년이 넘었지만 일본인들에게 존경받는 근대 정치가를 찾기 어려운 사정도 작용한다. 일본의 대중은 좀체 감동을 주지 못하는 ‘식물정치’ 대신 지사들이 활약하는 정치 스토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요즘도 신문에 전국(戰國)시대의 ‘무장열전’이 연재되는 일본에서 정치인들의 19세기 마케팅은 필수 아이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일본에선 무사들이 칼을 차고 다녔고, 개국파 정치인들이나 외국인들에 대한 수구세력의 정치적 테러도 빈발했다. 19세기의 열광을 재현하려는 정치인들이 이런 부(負)의 유산까지 닮으려는 듯한 태도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국가·국수주의적 구호들이 만들어내는 ‘열광의 쓰나미’에 얼마 안되는 민주주의적 감수성마저 쓸려가 버릴 수도 있다. 일본 정치권이 19세기의 향수를 이용하려면 할수록 현실정치에 대한 대중의 염증은 깊어질 수 있다. 열광에는 후유증이 따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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