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비문 분석 ‘임나일본부설’ 반박한 재일 사학자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의 일제 변조설을 제기한 재일 사학자 이진희 와코대 명예교수가 별세했다. 16일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이 명예교수는 폐암으로 투병하다 15일 사망했다. 향년 82세.
재일 한국인 1세인 이 명예교수는 강재언, 김달수 등과 함께 일본 내 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의 선구자로, 1972년 ‘광개토왕릉 비문의 수수께끼’라는 논문에서 일본의 광개토대왕 비문 변조설을 제기해 한·일 사학계에 충격을 던졌다. 그는 일본 메이지시대의 육참본부 사코 가네노부 대위가 이 비를 처음 발견한 뒤 입수했다는 탁본과 이후에 나온 수십종의 광개토대왕 비문 탁본을 일일이 대조, 일본 군부가 광개토대왕 비문을 변조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이 광개토대왕 비문의 훼손된 부분에 석회를 발라 새로운 글자를 넣어 변조했다며 일본 역사학자들이 이를 알고도 역사적 통설로 몰고 갔다고 비판했다.
그가 제기한 비문 변조설은 ‘고대 일본이 4세기 중반부터 2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뒤집는 중요한 근거가 돼 이후 한·일 사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계간 ‘삼천리’ 편집장으로 일하며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 한편 재일 한인의 차별상을 고발하는 데도 앞장섰다.
1929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메이지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뒤 조총련계 조선고등학교와 조선대학에서 한국고대사를 연구·강의했다. 그는 좌익성향의 조총련계 학자로 출발했다. 그러나 1971년 조선대학을 사직하면서 조총련과 결별, 1984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적잖은 갈등을 겪었다. 1980년대 초반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념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군사정권에 투항했다”고 비난받았다.
한국 국적 취득 후 ‘계간 청구’ 창간(1989),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 설립(1989) 등을 통해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 한·일 관계사 연구에 매진했다. 저서로 <조선 문화와 일본> <광개토왕릉비의 연구>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 등이 있다. 자전 기록 <해협>에는 그가 학자로서 일본의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차별에 저항했던 재일교포로서의 치열한 삶의 흔적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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