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후 2시50분쯤. 일본 도쿄 중심부인 지요다구 오테마치 산케이빌딩의 사무실에서 석간신문을 사기 위해 지하상가 쪽으로 발길을 옮기던 길이었다. 2~3m 앞 천장에 있는 신호표지판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틀 전에도 가벼운 지진으로 사무실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 터라 ‘이러다 말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2~3초도 지나지 않아 지하도 바닥이 심하게 흔들렸다. 지하도를 지나던 여성들이 기둥을 잡으면서 “도시요(어떻게 해)”라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행인들도 멈춰서서 벽을 붙잡으며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진도 3도 정도의 가벼운 지진에는 아랑곳하지 않던 일본인들의 평소 모습과 전혀 달랐다. 지하도의 가판대 쪽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평소 오후 2시45분쯤이면 도착해야 할 석간신문이 10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다.
지하철 마루노우치선, 지요다선, 한조몬선, 미타선 등이 정차하는 오테마치역 지하구내에서 긴급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지금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모든 역무원은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타고 있는지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지하도는 안전하니 승객들은 침착하게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니폼을 입은 역무원들이 비상점검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지하도의 행인들은 한 상점에서 켜놓은 TV 앞에 몰려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거나 가족 등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기자도 휴대전화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지진영향으로 휴대전화가 불통되자 시민들이 가족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공중전화앞에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경향신문DB)
회사에 보고하기 위해 황급히 사무실이 있는 산케이 빌딩으로 통하는 지하도 에스컬레이터에 뛰어 올랐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는 운행을 멈췄고, 건물내 엘리베이터 전체가 운행이 중단된 상태였다. 산케이 빌딩 앞에는 사무실에서 빠져나온 수십여명의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성거렸다.
거리 전체가 금연지역인 지요다구이고, 규칙을 잘 지키는 일본인들이지만 유례없는 재난상황에 직면하자 일부는 담배를 꺼내 물기도 했다. 산케이 빌딩의 인접 건물에는 전원이 건물 밖으로 대피해 건물앞 광장에 모여 있었다. 흰색 안전모를 쓴 채 메가폰을 든 한 건물관리인은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것보다 건물 안에 있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며 건물을 빠져나오는 이들을 만류했으나 당황한 시민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사무실이 있는 9층까지 비상계단을 통해 올라갔다. 벽 여기저기에 페인트가 벗겨진 게 눈에 띄었고 곳곳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당수 회사원들이 짐을 싸들고 사무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비상계단으로 몰렸다. “도쿄 도심에서 좀처럼 겪어본 적 없는 지진”이라는 말들이 들려왔다. 5평 남짓한 경향신문 도쿄지국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지진의 영향으로 책상서랍이 빠져나와 있었다. 첫 진동 이후에도 급요동은 없었지만 지속적으로 ‘삐걱 삐걱’ 소리를 내며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 1시간 이상 반복됐다. 조금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시 흔들리는 상황이 반복되자 ‘사무실에 있어야 할지, 지금이라도 밖으로 뛰어나가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여진이 반복되자 공포감마저 엄습했다.
본사 보고를 위해 수화기를 들고 국제전화를 걸었지만 “지금 전화가 폭주하고 있어 연결이 어렵다”는 자동응답만 들렸다. 그나마 끊기지 않은 인터넷이 외부와 교신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TV에서는 안전모를 쓴 아나운서들이 긴급한 표정으로 피해상황을 내보냈다. “여러분 절대로 혼자 있지 말고, 물건이 올려져 있는 곳에는 접근하지 마세요. 가스레인지와 전기기구를 확인하시고, 깨진 유리창이 있을지 모르니 집에서도 신발을 신고 계세요. 콘센트에 플러그가 꽂혀 있는지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바닷가에는 절대 접근하지 마세요….” 안전모를 쓴 방송국의 여성 아나운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피요령을 안내했다. TV는 헬기를 통해 잡은 도쿄시내의 한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지속적으로 내보냈다.
건물 구내에서는 “비상계단 한쪽에 물이 차 있으니 다른쪽 계단을 이용해달라”는 안내방송이 들려왔고 건물 창밖에서 소방차들의 다급한 경적소리들도 들려왔다.
도쿄 시내의 지하철은 물론 JR(철도·전철)도 운행정지상태였다. 미쓰코시 백화점 등 시부야, 신주쿠 등의 백화점은 지진이 발생하자 일시 폐쇄했고, 휴대전화도 끊기면서 시민들이 공중전화를 찾아 몰리는 모습이 목격됐다. 도쿄 도심 신바시역 광장에도 시민 수백명이 어쩔줄 모르고 망연자실해 하는 모습이 방송화면에 잡혔다.
전철이 끊기자 직장인들은 대부분 회사에서 묵었다. 회사의 숙직실이나 여기 저기 소파 등에 자리를 잡고 하룻밤을 보내는 모습이었다. TV에서는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이 “무리해서 귀가하지 말고 회사 등 안전한 곳에 머물러 있으라”는 당부가 흘러나왔다. 튼튼한 내진설계를 한 회사건물이 집보다 더 안전하기 때문이라는 해설도 흘러나왔다. 이날 일본인들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상당히 당황스런 모습이었지만 혼란과 무질서는 연출되지 않았다. 수많은 재난을 겪어오면서 체득한 특유의 ‘침착함’과 질서정연함이 돋보였다.
이날 지진으로 도쿄 중심부의 구단회관 홀 천장이 무너지면서 졸업식에 참석한 학생 수십명이 부상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수십년 만에 세계 최대 도시의 하나인 도쿄를 흔들어놓은 대지진의 첫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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