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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치기] 그 찬란했던 사랑을 다시 한번

서의동 2005. 7. 23. 18:52

영화 박치기를 처음 본 것은 2004년 겨울 무렵 일본 도쿄의 유라쿠쵸(有樂町)의 영화가에 있는 시네콰논에서였다. 그 전에 가끔씩 만나던 일본신문 기자가 내게 "박치기란 영화가 나왔는데 재일조선인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하길래 관심이 갔다.

당시엔 연예계에 진출한 재일조선인들에 대해 흥미를 갖던 때다. 가수 소닌이 성선임이란 동포(조총련계 고교까지 나왔다고 함)였고 일본 방송계의 대모격인 와다아키코(和田明子)가 김정일의 처 고영희와 단짝동무였고, 올리비아 핫세와 결혼했던 후세 아키라(2005년 홍백에서 ‘소년이여"라는 노래를 불렀음), 심지어 기무라 타쿠야도 한국계라는 구전을 접하면서 일본사회에서 ’재일‘의 자취를 더듬던 때였다. 도쿄대 강상중교수의 자전적 에세이인 ’재일(在日)‘도 그즈음 읽던 참이었다.

일본기자와 만난 며칠뒤 아사히 신문 광고란에 큼지막하게 ’박치기‘에 대한 강상중 교수의 추천사가 실린 것을 보고는 바로 극장으로 향했다. 시네콰논 극장을 들어서자 눈에 띄는 것은 50대 안팎으로 보이는 중년관객들...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당시 엄청난 인기그룹이었던 ’더 포크 크루세더즈"의 배경음악 등이 그들 분위기에 딱이었다. 사실 관객들의 거의 대부분이 그 연배였다. 일본은 최근 20~30대 관객들이 별로 없고 대부분 50대 관객들이 많다고 한다. 영화는 이런 점을 겨냥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기대만큼 재미있었다. 극장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도 적당한 효과음으로까지 들릴 정도였다. 

장면과 가사 하나하나가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위트와 감동, 그리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재일조선인들이 적지나 다름없던 곳에서 살아오면서 쌓아간 방어본능이 체육선생의 "너희들은 죽는 각오로 해라"는 구령으로 나왔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경자가 코스케에게 "조선사람이 될 수 있겠냐"고 한 질문은 오히려 당시 상황에선 "동포2세"의 힘있는 자기표현(1세들에겐 찾아보기 어려운)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또 눈에 띈 것은 조선고 학생들의 끈끈한 우애였다. 처음에 여학생이 봉변을 당하자 전교생이 몰려오는 장면은 그 자체가 만화스럽기까지 한 코믹장면이지만 마스크 여학생(강자)가 옥상위에서 진로문제를 이야기하는 장면이나 볼링장에서 강자와 재덕, 방호가 나누던 대수롭지 않은 대화속에서도 형제처럼 서로 아끼는 마음들이 녹아있음을 엿볼 수 있다. 

안성이 포경수술한 방호에게 딸기를 먹이기 위해 공중전화를 터는 장면도 엽기스럽지만 북송을 앞두고 한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를 향한 마음이 느껴진다. 방호가 포경수술을 한 뒤 안성의 엄마한테 보여주는 장면도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함께 의지하며 견뎌낸 재일조선인들의 공동체적 분위기를 풍긴다. 실제로 조선학교는 초중고 일관제 학교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10년이상 같이 지낸다고 한다. 우애가 남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 조연들은 ‘혁명의 이상’이 사람들을 달뜨게 만들던 당시 분위기를 생동감있게 전달해준다. 짤릴 걸 각오하고 상급자를 두들겨 패면서까지 청취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을 틀고 마는 '좌파' 라디오 PD, ‘혁명적"이란 단어가 늘 입에 붙은 모택동주의 고교교사, 어느 영웅적인 투쟁에 참가했다는 거짓말에 방호일행을 보는 시선이 존경의 눈빛으로 바뀌던 좌익학생 시위대의 표정, 자유와 해방을 느껴보려 스웨덴까지 다녀온 뒤 히피가 된 술집 종업원…. 좌파가 풍미하던 일본내에서도 가장 공산당세가 셌던 교토에서 있었을 법한 캐릭터들이다.

영화는 밑바닥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재일동포들의 모습에도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전체적인 톤을 흐리지 않는 선에서 간결하게 처리한다. 재덕의 장례식 신에서 재일조선인들의 고단했던 삶에 대한 반추장면이 나오지만 더 나가지 않고 이 장면을 마지막 반전의 모티브로 삼는 자제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재일동포들을 무심하게 비추고 지나간 장면들이 뇌리속에서 재구성되면서 "그들이 이렇게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한번씩 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일본인 배우들의 한국말 솜씨는 형편없고 어색하지만 그 판단도 우리기준일지도 모른다. 실제 재일조선인들도 별로 더 잘하지도 못한다. 나서부터 모국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여왔던 그들에게 한국은 모른척 했고 북한이 오히려 교육자금을 댔던 역사를 생각한다면 그들의 북한식 발음과 어법은 그들의 탓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역시 호쾌한 폭력신(더러는 지나친 장면도 있지만)과 주옥같은 음악, 청춘배우들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이다. ’청춘이 그 자체로 아름다움‘임을 웅변하고 있다. 조연과 단역들의 연기도 흠잡을데 없다. 한 시대를 아름답게 추억하는데 더할 나위없는 영화다. 다만 영화에서 군데군데 드러나듯 한국과 일본, 북한의 관계, 재일조선인들의 문제는 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는 현재진행형이란 점에서 한번 보고 잊어버릴 영화는 아닌 것 같다. 

PS : 영화에 흐르는 자 포크루세다즈(The Four Crusaders)의 노래중에 'あのすばらしい愛をもういちど(아노 스바라시이 아이오 모오 이찌도)'란 노래는 일본의 교과서에도 실려있다고 한다. 한번쯤 들어보시면 좋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