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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기고] 새로운 경제질서는 도래하고 있는가

서의동 2009. 4. 23. 18:59

※기획회의 최근호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세계적 금융회사인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본격화된 금융위기가 6개월을 넘어서면서 세계 경제질서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금융자본주의의 총아로 각광받던 투자은행(Investment Bank)과 헤지펀드들이 줄줄이 붕괴되고 실물경제 전반에 디레버리지(신용수축)와 수요감소에 따른 경기침체의 골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금융위기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치유될 것이라는 낙관론은 자취를 감췄고, 사회주의적 해법인 은행 국유화가 신자유주의의 본고장인 미국과 영국에서 유력한 해법으로 등장하고 있는 현상도 아이러니다.
 1970년대 중반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와 가치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있는 이 대 혼란기를 어떻게 봐야할 것인지, 신자유주의가 붕괴하고, 이를 대체할 경제질서가 도래할 것인지 등의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최근의 경제위기의 개요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2차 대전이후 기축통화인 미 달러화가 베트남전과 오일쇼크 등으로 발행이 늘어나면서 가치가 하락한다. 미 행정부는 달러를 일정량의 금으로 바꿔주도록 한 금태환 체제를 정지한다. 이후 전세계적으로 통화가 실물의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경제체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경기부양을 위해 화폐를 대거 발행하면서 신용팽창이 빚어졌고, 여기에 규제완화가 금융버블을 키웠다.  

 실물경제 지원이 본연의 역할이던 금융이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는 주체가 되면서 문제점은 증폭됐다. 거품들은 주기적으로 가라앉았다가 부풀어오르는 과정을 반복했다. 모든 기업의 가치가 주가에 의해 평가되는 산업의 '증권화'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금융이 실물경제를 짓누르고 왜곡하는 현상이 보편화됐다.
 이런 과정에서 부동산 대출채권을 증권처럼 사고 팔던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부동산 가격하락으로 급격히 부실화됐다. 세계를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어놓은 금융의 세계화 때문에 미국에서 발생한 부실이 복잡한 회로를 타고 전 세계로 번졌고, 이는 금융의 파산은 물론 실물경제의 위기까지 초래했다. 부동산과 주식같은 자산(資産)들의 가치가 반토막나는 등 빚으로 빚어낸 금융의 세계화는 종막에 다다르고 있는 중이다.

 최근 출판가에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서와 경제 대안서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현재의 경제질서가 어떤 방식으로 형성돼 왔는지를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책들이 아무래도 무게감을 갖고 있다. 전후 세계질서가 미국을 중심으로 구축되고 전개돼 왔던 만큼 불가피한 점이 있다.      
 미국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대안을 다룬 책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래를 말하다>(폴 크루그먼 지음, 현대경제연구원)와 <슈퍼자본주의>(로버트 라이시 지음, 김영사)다. 두 책 모두 2007년에 출간됐고, 국내에 지난해 소개됐지만 미국과 세계가 당면한 위기에 대한 통찰력있는 분석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크루그먼은 ‘뉴딜’을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아 미국 현대사를 재해석한다. 경제학자인 크루그먼이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놀랍게도 정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이 완화됐던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를 회고한 뒤 보수파들이 보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유포시키고 종교세력과 인종주의 세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하는지를 파헤친다. 아울러 사회적 양극화를 핵심으로 하는 미국사회의 문제를 풀기 위해 케인즈주의적 처방, 즉 의료제도 개혁, 감세정책 폐기, 노동자의 권익보호를 위한 법제정 등을 제안한다.  
  <미래를 말하다>는 정권이나 연방의회권력의 변화, 즉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가 소득불평등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을 논증함으로써 한때 밀려났던 것처럼 보이던 정치경제학적 방법론이 현 경제위기의 본질을 해석하는 데 유력한 방식임을 보여준다. 또 진보적 가치가 여전히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책은 미국에 진단과 분석, 대안을 담은 책이지만 ‘미국의 실패’를 답습하려는 우리 현실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침식해 들어가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게 된 현상을 ‘슈퍼자본주의'라 정의한다. 라이시는 레이건의 탈규제, 신기술의 발달, 세계화 현상 때문만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힘을 잃은 대신 투자자와 소비자로서의 권리만 중시하게 된 우리들 자신도 슈퍼자본주의의 ‘공모자’임을 지적하고 있다.
 냉전구도속에서 정부가 개발한 신기술들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에 활용되면서 기업들간의 경쟁이 더 치열해졌고, 권력이 소비자와 투자자들로 이동하면서 자본주의의 힘이 강력해져 민주주의를 갉아먹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과정이었지만 동시에 불공평하고 잔인한 과정이기도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은 우리 대부분의 안에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즉,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우리는 더 좋은 거래를 원한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우리는 그런 거래에서 비롯되는 많은 사회적 결과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는 균형의 수단이 없다. 대개 소비자와 투자자로서의 우리의 욕망이 우세를 보인다.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가치관은 사실상 적절한 표현 수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30쪽)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라이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간에 경계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경제의 규칙을 만들어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침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치에 대한 기업의 영향력을 줄이고, 기업이 게임의 규칙을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라이시는 지적한다. 기업을 의인화시켜 사람들의 권리와 의무를 빼앗는 것을 막아야 시민의 가치를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의 두책이 미국식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고찰과 대안제시에 초점을 맞췄다면 <뉴캐피탈리즘>(리처드 세넷, 위즈덤하우스)은 신자유주의 이후 노동과 사회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세넷에 따르면 막스 베버의 관료제적 질서하에서 자신의 노동과 삶을 '서사'적으로 구성할 수 있었던 노동자들의 삶은 신자유주의의 등장이후 불확실성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다. 관료제 혹은 피라미드식 공장질서 속에서 등장했던 ‘장인’적 노동자상은 주변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대신 맥킨지의 컨설턴트 직원들처럼 다방면에 흥미를 보이지만 결코 담아두지 않는 인간형이 요구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한다. 전원이 공급되는 동안에만 데이터를 기억하는 ‘디램’식의 재능이 우월적인 인재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회사경영 자체보다 자신의 투자수익에만 관심을 갖는 주주들이 경영권을 좌지우지하는 주주가치 확산, 합병과 구조조정 등이 활발해지는 금융우위의 자본주의 질서구축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세넷은 범위를 넓혀 현대의 정당들이 왜 소비자의 외면을 받고 있고, 특히 진보정치에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원인에 대해 영국의 신노동당 사례를 통한 분석을 시도한다.
 <뉴캐피탈리즘>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노동이 어떻게 해체돼 가는지를 독창적인 분석틀을 통해 보여주고 있지만 대안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안을 열망하는 독자들에겐 결말부분이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 책의 미덕은 노동소외 현상에 대한 통찰력있는 분석에 있다. 

  최근 흐름중 하나는 '미네르바'로 대표되는 인터넷 경제논객들이 온라인을 벗어나 오프라인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중서점엔 <똑똑한 돈>, <공황전야> 등이 나와 있다.  <똑똑한 돈>(나선, 이명로. 한빛비즈)은 현대경제의 위기는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신용화폐에 의한 신용팽창과 수축에 의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다음 아고라 등에서 명성을 쌓아온 저자들은 신용팽창과 수축의 메커니즘은 금본위제가 복원되지 않는 한, 그리고 중앙은행에 의한 신용화폐 제도가 존속하는 한 무한히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특히 이들은 디플레이션이 인류 역사의 후퇴가 아니라, 지난 20년간의 통화정책의 실패가 반영된 결과이며 모든 곳에서 가격이 제대로 평가돼 가는 과정이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이 책은 대안서라기 보다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시스템에 관한 이해를 돕는 교재적 성격이 강하다. 경제위기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될지, 이런 혼란속에서 자신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등 실용적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면 읽어볼 필요가 있다.
 <공황전야>(서지우, 지안)는 한국경제가 전세계 금융위기에 쉽게 휩쓸리게 된 원인에 대한 본격적인 진단을 시도한다. 공학도 출신의 인터넷 논객인 저자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이후 한국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이 왜 유독 불안한 흐름을 보였는지에 대해 학자나 금융전문가 이상으로 정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이후 국내 은행들에 의해 시도된 무분별한 자산 부풀리기가 금융시장의 출렁임을 키웠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언론보도에서 등장하는 알쏭달쏭한 용어들, 예를 들면 신용부도스와프(CDS),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에 대해서도 간결한 설명을 담고 있다. 저자는 해법으로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를 대폭 올려 은행들이 자본을 자연스럽게 확충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위기의 경제>(유종일, 생각의 나무)는 대표적인 현실참여파 경제학자인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전세계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문제점,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경제민주화 방안을 제시한 책이다. 
저자는 현재의 위기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규제완화나 감세가 아니라 경제민주화를 이뤄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회의 평등을 심화시키고, 자원이 효과적으로 배분되도록 재벌과 정부개혁을 추진해야 하고 필요한 규제는 하되 투명성과 일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경제민주화다.  성장을 위해 분배를 희생하고 안정을 해쳐 위기를 재생산하는 일을 막기 위해 경제민주화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 책의 미덕은 성장지상주의로 치닫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대안을 일목요연하고 간명하게 제시한데 있다. 앞서 다룬 <미래를 말하다>에서 폴 크루그먼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 즉 ‘문제는 정치에 있다’는 인식을 저자가 공유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