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47

[경향의 눈]설명 노력이 부족한 ‘문재인 외교’

2019.09.04 지난달 하순 서울에서 열린 포럼에서 일본 정치인과 학자, 언론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일본의 현지 분위기는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휴가철에 만난 지역구 주민들이 한국 수출규제에 대해 ‘아베 정부 정책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며 ‘타협하지 말라’고 하더군요.”(자민당 의원) 일본 야당 의원은 “야당 지지자들조차 한국에 대한 감정이 나쁘다”고 했다. 일간지 논설위원은 “일본 정부가 삼성 등을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무리 수를 쓰지는 않겠지만, 일본이 피해를 보더라도 수출규제를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을 ‘아베 정권의 가장 잘한 일’로 꼽을 만큼 일본의 ‘반한’이 맹목(盲目)단계로 치닫고 있음을 확인했다. 한·일 갈등 두 달은 시중에 나와 있는 일본개론서를 다..

칼럼 2019.11.03

[경향의 눈]북한에는 과거로, 한국에는 미래로 가자는 일본

2019.08.07 일본의 한반도 외교는 이율배반적이다. 한국에는 미래로 가자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과거를 추궁한다. 일본과 북한은 2002년 정상회담에서 과거사를 서로 인정하고 청산한 다음 국교수립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이 취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인 납치사실을 시인했고, 피해자 13명 중 8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은 ‘과거를 딛고 미래로 가자’는 북·일 평양선언의 취지가 무색하게 납치문제에 집착했고, 일본으로 일시 귀국한 생존자 5명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납치문제가 복잡하게 꼬인 이유는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의 처지에 설 모처럼의 기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나바시 요이치의 표현을 빌면 이런 처지의 바뀜에서 일본인들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듯 하다. ‘우리도 한국이..

칼럼 2019.08.09

[경향의 눈]한·일관계 10년의 회한

2019.07.10 일본은 10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2009년 자민당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쥔 민주당 정권은 동아시아 중시 노선을 들고 나왔다. 요즘도 가끔씩 한국을 찾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한·중·일과 아세안, 인도, 호주, 뉴질랜드가 참가하는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내놨다. 간 나오토 총리는 2010년 한일병합 100년 사죄담화를 발표했다. “한국인들 뜻에 반해 이뤄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냈다. (중략)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심정을 표명한다.” 백여년전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부르짖으며 동아시아를 뛰쳐나갔던 일본이 이웃나라들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전후(戰後)질서가 균열하던 1990년대부터였다. 미·소냉전이 ..

칼럼 2019.08.09

[경향의 눈]우리는 김원봉을 얼마나 알고 있나

2019.06.12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독일제국에 합병된 상태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패전국이 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 연합국의 분할통치를 받게 됐다. 38선 남북을 미·소가 분할 점령했던 한반도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연합국의 군사정부와 오스트리아 임시정부가 공존했다는 점이 달랐다. 패전 직전 노(老)정객 카를 레너가 친나치 계열을 뺀 모든 정파를 아우른 임시정부를 세운 것이다. 소련을 제외한 3개 연합국은 사회주의 정치가 레너가 주도하는 임시정부를 경계했으나 얼마 안 가 승인했고, 임시정부는 오스트리아 전역에 관할권을 행사하게 됐다. 그해 11월 총선에서 50%를 득표해 제1당이 된 보수계 국민당은 단독정부 수립 대신 사회당, 공산당과 ‘대연정’을 구성했다. 분단 위기를 딛고 통일..

칼럼 2019.08.09

[경향의 눈]북·일 정상 못 만날 까닭 없다

2019.05.15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던 2002년 9월17일 동북아는 난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그해 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이자 “선제공격으로 정권을 교체시켜야 할 대상”으로 지목했다.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도 탄력을 잃었다. 그해 4월 평양에 특사로 간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특보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면서 소강상태이던 남북관계가 풀렸지만,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을 궁지에 몰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 미국의 맹방인 일본 총리의 방북은 ‘일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사정 탓인지 고이즈미 총리는 최대한 건조하게 회담에 임했다. 당일치기로 방문한..

칼럼 2019.08.09

[경향의 눈]폼페이오의 임무

2018.10.0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만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종전선언에 곧 서명하겠노라고 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로 보인다. 북한 외무성이 지난 7월 성명에서 밝혔고, 미국 언론도 확인해 보도했다. 이 말썽 많은 종전선언의 표류 경위는 북·미 협상 2라운드의 향방을 가늠해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짚어봐야 한다. 올 들어 북한은 미국에 몇 가지 선물을 조건 없이 건넸다.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억류 미국인 3명 송환, 핵·미사일 시험발사 중단 같은 것들이다. 비슷한 무게의 조치들을 기계적으로 주고받는, 복잡다단한 상호주의가 신뢰 구축은커녕 불신만 키웠던 실패의 경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지난 25년간 북·미 협상은 으슥한 공터에서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상대 패거리들..

칼럼 2019.08.04

[경향의 눈] 불가역적인 남북관계의 요건

서울에 거주하는 네덜란드 청년이 지난 연말연시에 북한여행을 다녀온 뒤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렸다. 베이징에서 단둥을 통해 열차편으로 방북한 청년은 2018년 제야(除夜) 10만명이 참가한 김일성광장 설맞이 축하행사에서 불꽃놀이, 드론쇼와 축하공연을 북한 주민들과 함께 즐겼다. 남포, 사리원, 판문점 북측지역도 참관했다. 국내 한 방송사는 그의 방북영상을 토대로 한 다큐멘터리를 이달 초 방영했다. 지난 7일 평양에서 열린 국제마라톤대회에는 40여개국에서 참가한 1000여명이 시민들의 격려를 받으며 평양거리를 달렸다. 한 일본인 참가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가까우면서 먼 나라에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고 했다. 일본 방송들은 평양시내에 늘어나고 있는 전동자전거와 태양광 패널을 소개했다. 아베 정부의 대북 강경정..

칼럼 2019.04.30

[경향의 눈] 개성공단 '희망고문 2년'

개성공단에 진출했던 자동차 부품 전문업체 대화연료펌프는 정부가 2011년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지정할 정도로 탄탄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개성공단 폐쇄 이후 3년간 경영이 악화됐고, 수억원대 자금을 결제하지 못해 최근 부도처리됐다. 개성공단에서 의류공장을 운영했던 개성공단 비상대책위원회 정기섭 공동위원장도 국내 공장 두 곳을 접었다. “개성에서 번 돈으로 국내 공장 두 곳의 결손을 메워왔는데 개성공단 중단이 길어지면서 견디기 힘들었다.” 공단 폐쇄 3년을 넘기면서 개성공단 기업인들은 버틸 힘이 바닥났다. 은행대출은 일찌감치 막혀 사채를 끌어다 쓰며 버티는 기업들도 적지 않고, 부도위기에 몰린 곳도 10여곳에 이른다. 사실상 폐업상태지만 남북협력사업자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사무실만 유지하며 휴업 중인 곳도..

칼럼 2019.04.30

[경향의 눈]아키히토 일왕이 방한한다면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최대 격전지였던 오키나와는 일본의 패전 이후 미군정의 지배를 받다가 1972년 5월에야 일본에 반환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5년 7월 아키히토(明仁) 왕세자 부부가 와병 중인 부친 히로히토(裕仁) 일왕을 대신해 국제해양박람회 참석하기 위해 오키나와 땅을 밟았다. 전쟁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되거나 집단자살을 강요당하면서 10만명 가까이 희생됐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 정부와 전쟁의 최종책임자인 왕실에 대한 주민들의 원한은 채 가라앉지 않았다. 오키나와해방동맹준비위원회(오해동)를 비롯한 운동단체들은 한 달 전부터 ‘방문저지’를 외치며 별렀다. 왕세자 부부가 오키나와에 도착한 7월17일, 나하(那覇) 등 도심에서 수만명이 시한부 파업과 항의시위를 벌..

칼럼 2019.04.30

[경향의 눈]총력전체제 100년의 청산

지난 100여년의 한·일관계 혹은 일본과 한반도 전체를 아울러 볼 키워드로 ‘총력전체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국가의 전 분야를 동원해 총력을 기울여 하는 전쟁이 총력전이고, 이에 맞춰 국가와 사회 전 부문을 재편성한 것이 총력전체제다. 일본이 한일병합을 거쳐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위한 총력전체제에 돌입하는 과정에서 고안해낸 각종 제도는 한반도에 두고두고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1910년 퇴역군인의 전국조직인 재향군인회를 창설해 후방자원의 동원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1924년 학교에 교련제도를 도입했다. 1925년에는 반정부·반체제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을 시행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에는 내각에 기획원을 설치했다. 기획원은 전시에 모든 물적·인적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제정한 국가총..

칼럼 2019.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