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31. 21:30

평양 미래과학자 거리 경향신문DB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은 “중국 공산당은 법을 통해서 통치해야 한다. 법과 제도는 지도자가 교체된다고 해서 바뀌면 안된다”고 했다. 중국은 수차례 헌법개정을 통해 어떤 조직이나 개인도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특권을 갖지 못한다는 법치주의 원칙을 확립했다. 시장경제를 뒷받침하는 민법과 상법도 정비됐다. 중국 공산당이 법치주의를 강화한 이유는 해외투자 유치 때문이기도 하다. 투자자의 재산권이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법률로 제한하는 것은 경제성장의 마중물인 외국인 투자유치에 필수적이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법치주의 강화는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이와 유사한 움직임 김정은 시대의 북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 가족농 중심의 포전담당책임제 등 경제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2014년 기업소법과 농장법을 개정했다. 특히 2014년 개정된 기업소법은 기업에 생산조직권, 노력조절권, 품질관리권, 무역·합영합작권, 재정관리권, 가격제정권·판매권 등을 부여했다. 자본주의 국가의 민간기업과 거의 같은 수준의 경영자율권을 보장한 것이다.
 

시장경제가 확산되고 관련 법들이 정착되면 법률서비스 수요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북한에서 로펌의 등장은 법률서비스 시장이 북한 내에서도 성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북한 대외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은 11일 로펌 ‘룡남산법률사무소’가 최근 홈페이지를 개설했다면서 “기관, 기업소, 단체들과 개별적 공민 또는 외국법인·외국인의 재산상, 인신상 분쟁과 관련해 민사소송이나 국가중재 및 국제중재 대리 업무를 진행한다”고 업무를 소개했다. 이 중 개별적 공민의 재산상 분쟁과 관련한 민사소송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은 시장경제 발전에 따라 재산권 분쟁사례가 늘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12일 최고인민회의 회의에서 “우리나라를, 법이 인민을 지키고 인민이 법을 지키는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 법치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덩샤오핑을 떠올리게 한다. 비핵화 협상, 대북제재 같은 키워드만으로는 북한의 실체를 제대로 ‘검색’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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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1. 21:24

일본 와이드쇼 경향신문DB

일본에서 오전 또는 낮 시간대 TV를 켜면 어느 채널이건 예외 없이 ‘정보프로그램’을 방영한다. 사회자 외에 5명 안팎의 패널이 등장해 뉴스와 예능, 생활정보 등에 대해 제작진이 마련한 리포트를 보고 의견을 주고받는다. 테마가 다양하고 방송시간도 2시간이 넘기 때문에 ‘와이드쇼’로도 불린다. 1964년 일본교육방송이 미국 NBC의 뉴스·정보프로그램 <투데이>를 본떠 만든 <모닝쇼>가 성공을 거두자 다른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도입했다. 와이드쇼는 시청률 확보를 위해 뉴스프로그램과 달리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이야기식으로 연출하며, 전문가 외에 입담 좋은 예능인들도 패널로 출연시킨다. 시청률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취재 가이드라인을 일탈하는 일도 심심치 않다. TBS 와이드쇼 제작진이 1989년 10월 옴진리교 비판에 앞장서온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취재영상을 옴진리교에 노출시켰다가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족이 신도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대표적인 폐해로 꼽힌다.  
 

와이드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뉴스의 희화화다. 심각한 사안을 흥미 본위의 만담거리로 만들어 시청자들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킨다. 일본 미디어비평가들은 국회에서 중대한 법안 등이 다뤄질 때마다 와이드쇼가 연예계 스캔들 등을 떠들썩하게 방영해 유권자들의 눈길을 돌려왔으며, 때로는 정권이 방송사에 그런 주문을 해온 의혹도 있다고 지적한다.
 

와이드쇼는 한·일 갈등 국면에서 혐한 정서를 확산시켰다는 지적도 피할 수 없다. ‘조국사태’가 한창이던 9~10월 일본 TV들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의혹 보도 건수(878건)가 비슷한 시기 가와이 가쓰유키 일본 법무상의 부정선거 스캔들 보도(181건)의 5배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 지난 4일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주최한 포럼에서 이홍천 도쿄도시대학 교수는 “일본 법무상의 이름은 기억 못해도 조국 장관 이름을 모르는 일본인이 드물 정도”라고 했다. 이 교수는 “한국 정치와 한국인을 바보 취급하는 보도나 네트우익의 논리를 와이드쇼가 여과 없이 소개하고 있다”고 했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타국에 대한 편견과 증오를 부추기는 와이드쇼를 ‘혐한 증폭기’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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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1. 21:20

복역중인 청주교도소에서 독서하고 있는 고 김대중 대통령 경향신문DB 

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감옥은 대학이었다. 김 대통령은 1980년부터 2년반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청주교도소의 독방을 탐구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러셀의 <서양철학사>, 플라톤의 <국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비롯해 철학·신학·정치·경제·역사 등 다방면의 책을 읽었다. 푸시킨·투르게네프·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 등 러시아 문호들의 소설을 탐독했고, <논어> <사기> 등 동양 고전을 섭렵했다. 이 기간 중 이희호 여사가 구해 들여보낸 책만 600여권이다. 이 여사는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김 대통령을 위해 <불란서어 4주간>을 넣어주기도 했다. 영어실력을 결정적으로 다진 시기도 1976년부터 1980년에 걸친 수감·연금생활이었다. “내가 감옥에 있지 않았더라면 어찌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 감히 영어를 공부했겠는가.”(김대중 자서전)
 

국내 1세대 환경운동가인 최열 환경재단 대표는 1975년 명동성당 사건으로 투옥된 뒤 옥중에서 공해문제를 다룬 일본 서적 250권을 읽고 환경운동을 삶의 목표로 정했다. 작가 장정일은 폭력사건으로 소년원에서 1년6개월을 지내는 동안 책을 접하며 문학에 눈을 떴다. 장정일은 출소 후 펴낸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최연소(25세)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옥중독서가 출소 이후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례들이다. 
 

법무부가 교도소 등 교정시설 수용자에게 우송·차입 방식의 도서 반입을 원칙적으로 불허하기로 했다고 한다. 수용자들은 영치금으로만 책을 살 수 있고, 우편이나 민원실을 통해 들여올 수 있는 책은 학습·종교·법률 서적으로 제한된다. 법무부는 음란서적 등의 반입을 막기 위한 조치로, 유해간행물을 제외한 도서는 대부분 전달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사회단체 간행물 등 비매품이나 중고서적 반입은 어려워지고, 수감자의 경제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교정당국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멀쩡한 책에 ‘유해간행물’ 딱지가 붙어 반입이 불허될 우려도 적지 않다. 불과 몇 년 전 국방부가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을 금서로 지정했던 일이 기억에 선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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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1. 21:16

독일 드레스덴 전경 경향신문DB

엘베 강변에 형성된 독일 작센주의 주도(州都) 드레스덴은 옛 동독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힌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츠빙거 궁전을 비롯해 오페라극장인 젬퍼오퍼, 호프 교회와 레지덴츠 궁전 등 다양한 건축물이 황홀한 자태를 뽐낸다. 드레스덴은 이런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극우운동 조직 ‘페기다(서방의 이슬람화에 저항하는 애국적 유럽인들)’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페기다의 시위가 젬퍼오퍼 앞 광장에서 열리는 것도 아이러니다.  
 

극우세력들의 발호가 심상치 않자 급기야 드레스덴 의회가 지난달 말 극우주의를 배격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작센주와 튀링겐주를 비롯한 동독 지역에서는 극우성향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부상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이 지났지만 독일의 동서 간에는 여전히 ‘마음의 장벽’이 건재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통일 이후 동독 지역의 각종 지표들은 현저히 개선됐지만, 동서 간 격차는 여전하다. 동독의 고학력층과 젊은이들은 서독으로 이탈했고, 동독에 남은 이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잃은 채 ‘2등 국민’으로 강등됐다. 서독인 3만~4만명이 동독으로 건너와 은행장, 법원장, 병원장 등 주요 지위를 차지하면서 동독의 엘리트를 밀어냈다. 대학 총장 중 동독 출신은 한명도 없고, 정교수 중에서도 동독 출신은 5%에 불과하다고 한다. 통독 이후 동독체제는 나치 수준으로 ‘악마화’됐고, 동독인들의 삶의 방식은 부정됐다. ‘극우 포퓰리즘’은 이런 상실감과 좌절감을 먹고 자란다. 
 

서독은 1970년대부터 동방정책을 수립해 동독과의 화해·협력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은 1989년 11월9일 여행자유화에 관한 포고령을 발표하던 동독 공산당 간부의 실언으로 촉발됐지만, 동방정책의 결실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30년이 지나도록 후유증이 남은 것은 통일의 완성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웅변한다. 
 

한국 사회의 ‘북한 악마화’는 독일과는 비교불가의 경지다. 탈북민들이 겪는 차별을 생각한다면, 남북의 통일은 독일과는 차원이 다른 후유증을 몰고올 우려가 크다. 올해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그저 ‘그날의 감격’을 되새기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서의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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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1. 21:12

패러글라이딩 도중 토네이도에 휩쓸려 북한 땅에 불시착한 여성 기업인 윤세리와 북한군 장교 리정혁이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한국 드라마의 ‘운동장’을 넓혀 놨다. “일단 못 보던 광경이 풍물지적 흥미를 유발”한다는 평(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대로 북한이라는 금단의 공간을 무대에 편입시킨 것이 우선 득점 포인트다. 북한군 장교, 그것도 군부서열 1위인 인민군 총정치국장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설정도 전무후무하다. 상대는 재벌 2세인 여성 CEO. 남녀 주인공이 남북 체제의 파워집단 출신이라는 배역설정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트집을 잡자면 주인공인 북한군 장교가  지나치게 멋진 것부터 용납 못하겠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불온’해 보이는 드라마가 불시착은커녕 시청률 1위의 고공비행을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북한이란 공간과 분단의 현실을 멜로 판타지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솜씨 있게 활용한 것이 시청자들의 호응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남북 간에 놓인 장벽이다. 그런데 두 남녀는 나중에 장벽을 훌훌 넘어가 버린다. 한국 지형상 일어날 리 없는 거대 토네이도가 여주인공을 북한 땅에 데려다 놓은 것부터 드라마는 철저하게 판타지의 문법을 따라간다. 이 드라마에 국보법 시비를 거는 것은 그러므로 넌센스다.
 

판타지임에도 북한이란 배경화면을 초정밀 재현한 것도 미덕이다. 아랫동네(남한) 상품들이 공공연히 거래되는 장마당, 집마당 한쪽을 파내고 만든 저장고 ‘김치움’, 장시간 정차 중인 열차에 ‘메뚜기 장사꾼’들이 몰려드는 장면, 출연자들의 자연스러운 북한 사투리는 탈북인도 군말하지 않을 만큼 리얼하다. <응답하라 1988>을 재현한 듯한 전방부대 사택마을의 공동생활에서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는 중년들도 있을 것이다. 드라마는 북한 미화라는 우려가 쏙 들어가게 균형도 잘 잡는다. ‘꽃제비’가 등장하고, 전기는 수시로 나간다. 가정집을 숙박 검열하며, 거리에서 김일성 휘장을 달았는지를 불시 검문한다.
 

물론 ‘우리 민족’에 대한 정념(情念)을 안고 보는 이들도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시청자들은 ‘말은 통하지만, 통행할 수는 없는 나라’가 어떻게 그려졌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기까지 하니 일거양득이다. 보수세력들이 아무리 북한의 위협을 공들여 강조해본들, 사람들은 북한을 이국(異國)취미를 만족시킬 ‘레어템’으로 소비할 준비가 돼 있다. 확실히 북한은 희소가치가 있는 ‘미개척 콘텐츠’이다.
 

<사랑의 불시착>의 흥행은 북한 관광에 대한 관심으로도 연결된다. 정부는 올 들어 북한 개별관광에 이례적으로 강한 추진의지를 보이고 있다. 통일부는 관광객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금강산·개성을 방문하는 개별관광, 중국 등 제3국을 경유한 관광 등을 검토 중이다. 어떤 방식이건, 일단 문이 열린다면 가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다. 사람들이 북한 개별관광에 흥미를 보이는 까닭은 <사랑의 불시착>이 인기를 얻는 이유와 동일하다. 그들이 ‘친북’이라서가 아니라, 북한이 식상하지 않은 관광지이기 때문이다.
 

보수진영은 북한 관광이 국제사회의 비핵화 전선을 흐트러뜨릴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고, 늘 그렇듯 미국도 견제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의 대북제재 대상도 아닌 관광조차 정부가 풀지 못한다면 한국이 대북정책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차렷 자세로 미국 말만 듣고 있다간 남북교류는 영영 어려울 수도 있다. 한국인들이 관광을 안 간다고 비핵화가 앞당겨질 정도로 북핵 문제가 쉬운 일도 아니다.
 

“한반도 통일을 평화적으로 이뤄내려면 남과 북의 접촉을 늘리는 방법밖에 없다.”(1월18일 태영호 블로그)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는 북한 관광 자유화를 지지한다면서 “평양시에 배낭을 멘 한국 관광객들이 줄지어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뿌듯해진다”고 했다. 반북인사로 분류되는 그 역시 북한 관광에 찬성한 것은 이채롭지만, 상식적이다. 접촉하지 않으면 바뀔 수 없고, 바뀌지 않으면 통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북통일까지는 몰라도 평화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고, 미국이 깔아놓은 길만 고집할 이유도 없다.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처럼, 윤세리가 북한 땅을 밟은 것은 토네이도라는 기상이변 때문이다. 그런 이변 없이는 이웃나라에 갈 수 없는 현실은 바뀌어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북한 여행을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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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1. 21:08

경향신문DB

북한이 준비한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은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고만으로도 북한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북한과 미국 간에 2년간 조성됐던 협상 국면이 종언을 고했음을 이보다 더 극적으로 알리기도 쉽지 않다. 이제 북·미관계는 수십년간 되풀이해온 경로를 다시 밟을 가능성이 커졌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협상 시작→갈등 재연→협상 중단을 무한 반복하는 폐곡선 경로다. 생각만 해도 폐소공포증이 느껴진다. 한반도의 운명이 바위 굴리기 천형(天刑)을 반복하는 시시포스와 다를 게 뭔가.   
 

북한이 내년 초 신년사에서 밝힐 ‘새로운 길’이 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폐곡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나서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북한은 미국의 ‘절대반지’인 대북 제재를 무력화하는 쪽으로 국제질서 재편을 꾀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지난 16일 유엔 안보리에 대북 제재 부분 해제 촉구 결의안을 제출한 것은 그 예고편으로 보인다. 
 

북한이 한발 더 나아가 ‘비미(非美) 비핵화’를 추진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미국은 믿을 수 없으니 중국과 러시아 등의 참관하에 영변 핵단지를 해체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전임 행정부 때 체결한 이란 핵합의를 깬 트럼프가 ‘비핵화의 인증자’ 자격이 있느냐는 문제제기를 동반한다. 이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고,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명분도 약화시킬 수 있다. 반면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같은 군사행동은 미국이 쳐둔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는 만큼 자제할 가능성이 짙다. 경제 부문에서는 제재 대상이 아닌 관광산업 활성화로 외화를 수혈하며 버티기에 나설 것이다. 그람시의 용어를 빌리면 북한은 내년 한 해 기동전보다 진지전을 펼 가능성이 크다.
 

중국 역시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 대열에서 이탈할 동기는 충분하다. 미·중 패권경쟁이 ‘역사적 국면’이 된 현실에서 중국은 북한을 통해 동북아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미·중 무역분쟁이 봉합된다 해도 힘겨루기는 지속될 것이고, 주전장(主戰場)은 남중국해, 대만해협, 한반도 등 동아시아가 될 가능성이 크다(이희옥 성균관대 교수). 미국이 동북아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를 추진하는 사정이고 보면 중국에 동북아의 린치핀(핵심축)인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은 한층 커졌다. 
 

북·미 협상의 파탄은 트럼프에게 명백한 실점이지만, 대선 레이스를 앞둔 트럼프는 ‘새로운 길’을 고안할 의지도 동력도 없어 보인다. 미국은 셈법을 바꾸지 않은 채 북한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며 내년 한 해를 보낼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실패는 한·미 공조하에서 북·미 협상→비핵화→한반도 평화라는 ‘패스트트랙’을 타려던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도 실패했음을 뜻한다. 갈 길은 먼데 차량이 고장났고, 날까지 저물었다. 미국과 한길을 계속 갈 경우 북·미 공방 속에서 중심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젠 한국도 갈림길을 타야 할 시점이 됐다. 
 

하지만 한국이 어떤 길을 가려 하든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남북 교류·협력을 재추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북 제재를 돌파하기도 어렵지만, 그보다는 북한의 마음을 되돌리기가 더 만만치 않다. 북한은 지난 2년간 한국을 지켜보면서 남북관계 발전이 북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듯하다. 여전히 강고한 한국 내 보수세력의 존재, 그들이 구축한 ‘반북연대’를 돌파하지 못하는 진보정권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북·미 협상 구도에서 남북관계를 분리해내는 정도가 될 것이다. 북·미 협상의 문이 닫히면 남북관계도 강제종료되는 식이어서는 한반도 평화가 결코 달성될 수 없다. 비핵화와 무관하게 남북 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은 의외로 적지 않다.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북한에 대한 과도한 정념(情念)을 줄이고 ‘쿨(cool)한 이웃’으로 관계를 재설정하는 작업이다.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남북관계 규정(남북기본합의서)을 바꿔 남북을 ‘두 개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다. 동·서독처럼 북한과 남북기본조약을 체결하고, 조약에 상호체제 인정, 내정 불간섭, 불가침 등 남북기본합의서의 주요 내용을 담게 되면 그 자체로 ‘남북 평화협정’도 된다.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북한 이슈는 한국의 ‘오지랖’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북한 땅도 우리 땅이다’ ‘우리가 남이가’식 관념을 탈피하지 않는 한 북한 문제의 과도한 정치화는 피할 길이 없다. 북한을 별개 국가로 인정하게 되면 북한어민 추방 논란 같은 불필요한 잡음도 막을 수 있다. 보수·진보 모두 대북 주관주의(主觀主義)에서 벗어난다면 남북관계의 재출발은 한결 가뿐해질 것이다. 기본조약 체결이 영구분단의 길이 아님은 독일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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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1. 21:05

경향신문DB

방위비 분담금 공방으로 한·미동맹에 치장된 ‘신성(神聖)의 허울’이 벗겨진 것은 한국에 보약 같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서 왕의 엑스칼리버 같은, ‘한국 수호’의 성검(聖劍)이었던 한·미동맹은 ‘사람들을 겁박해 돈을 뜯는 폭력배 식’(조 바이든 전 미국 부통령 발언) 계약관계로 전락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사태는 미국의 동맹서열에서 한국이 일본에 멀찌감치 뒤처져 있는 현실을 체감케 했다. 그뿐인가. 기인(奇人)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됐을 때 사람들은 미국의 한반도 현상유지 정책이 바뀔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북한과의 2차례 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뿐이다. 트럼프는 ‘나서지 말라’며 한국 정부의 손발을 묶어두고 1년 넘도록 ‘희망고문’만 가하고 있다. 실제로 일을 되게 하려는 건지, 시늉만 내고 있는 건지 그 속을 알 길이 없다. 이래저래 한·미동맹에 대한 피로감이 커지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이미 ‘제국’도 아니고, 제국이 속주(屬州)들에 베풀던 관용과 품위도 사라졌다. 이는 이슬람국가(IS) 격퇴전에서 함께 피를 흘렸던 쿠르드 민족을 트럼프가 헌신짝처럼 팽개치는 것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내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말고 다른 이가 권력을 잡더라도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중국이 세계 패권국가로 부상하면서 미·중 갈등은 ‘역사적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종합국력으로 따지면 미국이 절대 우위이니 전면대결 가능성은 낮지만, 국지적 갈등은 벌어질 것이고 그 사이에 끼인 나라들은 시달릴 것이다. 한국이 이미 2016년에 뼈아프게 경험한 일이다.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으로 한국 기업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중국땅을 떠났고, 관광·문화 산업도 타격이 컸다. 한국 정부는 2017년 ‘3불 정책’(사드 추가배치·미사일방어체제 가입·한미일 군사동맹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으로 갈등 봉합에 나섰지만 냉기류는 그대로다. 한·중 간에는 이것 말고도 화웨이 규제, 동북아 중거리 미사일 배치 등 미국이 깔아둔 지뢰들이 있다. 홍콩사태에서 보듯 중국은 자국의 핵심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한국 외교는 앞으로도 험난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실족하면 큰 부상을 입을 것이고, 간신히 중심을 잡더라도 국론 분열은 피할 수 없다. 강대국 눈치를 보느라 내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 
 

그런데도 보수세력들은 한·미동맹을 만트라(주문)처럼 외워댄다. 한·미동맹이 외교의 지렛대인지, ‘한·미동맹 수호’가 외교 목표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다. 보수세력들의 이런 태도는 미국에 힘을 실어주고, 한국 정부가 운신할 폭을 좁힌다. 보수 언론들과 정치권은 미 행정부 관리들,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들의 사소한 발언조차 확성기 틀 듯 증폭시키며 안보불안 심리를 키운다. 지난 수십년간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서 한·미동맹은 ‘성역’이 됐고, 한국인들의 외교적 상상력은 쪼그라들었다. 
 

보수세력들이 철석같이 매달려온 미국의 대통령은 요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친서를 주고받고 있다. 북·미 협상은 암운이 짙어졌지만, 트럼프의 행태로 볼 때 계산만 맞으면 쿠르드를 내치는 강도와 속도로 북한과도 거래할 수 있다. 반면 동맹국들을 향해서는 미국을 “벗겨 먹는다”고 한다.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결렬될 경우 주한미군 감축도 강행할 기세다. 미국은 2016년 한·일 양국에 GSOMIA 체결을 요구하면서 북한 핵·미사일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과는 무관하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GSOMIA의 만료로 득을 보는 곳은 중국과 북한”(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이라고 말을 바꿨다. GSOMIA가 대중국 견제수단임을 자인한 것이자, 한·미동맹의 목표가 북한 견제에서 중국 견제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균형외교를 해야하는 한국의 처지는 안중에도 없다. 이쯤 되면 한·미동맹으로 인한 국익의 총합이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제로베이스에서 따져보는 것이 마땅하다. 
 

트럼프는 한국인들이 한·미동맹을 객관화된 시각으로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했다. 동맹의 민낯이 드러난 이 시기를 외교전략과 한·미관계에 대한 재검토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미·중 패권경쟁 시대에 한국의 핵심이익을 정확히 규정하고, 그에 맞는 외교전략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지정학적 숙명을 ‘비동맹 중립’으로 해소한 나라들의 지혜도 활용할 필요가 있다. ‘가지 않은 길’이라도 국익에 맞는다면 과감하게 발을 디뎌야 한다. 한국인들이 미몽에서 깨어날 기회를 제공한 트럼프에게 감사인사라도 하고 싶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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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3. 22:27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6월30일 판문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회동한 50분 중 절반가량을 한·미 연합훈련 중단 요구에 할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의 집을 나서던 김 위원장의 표정이 밝아 보인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긍정적인 언질을 받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두 달이 못돼 한·미 연합훈련이 실시됐다. 북한은 미국은 물론 한국에도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 관광지구를 현지 지도하고 금강산에 설치된 남쪽 시설 철거를 지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3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북·미 비핵화 협상은 ‘쌍중단’(북한의 핵·장거리미사일 실험과 한·미의 군사훈련 중단) 원칙에 양측이 동의함으로써 출범했다. 봄철 한·미 연합훈련이 연기됐고, 김 위원장도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중단 방침으로 화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직후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5개월 뒤 한·미 양국은 해병대 연합훈련을 횟수만 줄여 실시함으로써 ‘쌍중단’ 원칙을 흔들었다.

 

게다가 남북관계 복원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국방비를 역대급으로 늘리는가 하면 F-35A 스텔스기 같은 첨단 공격형 무기를 들여왔다. F-35A는 청주기지에서 떠서 15분 만에 300㎞ 떨어진 평양의 주요 시설을 공격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다. 군은 무인기, 정밀유도탄, 전자기펄스(EMP)탄, 경항공모함 등도 대거 도입할 계획이다. 군사합의서를 체결하며 긴장완화를 다짐했던 문재인 정부의 ‘이중적 행태’(7월25일 김 위원장 발언)에 북한이 당혹감을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부는 8월 한·미 연합훈련은 전시작전권 전환에 필요한 사전조치이고, 첨단무기 도입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일본 등의 군사력에 대비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해도 스텝이 꼬인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F-35A를 두고 주변 국가 방위용이라고 하는 건 북한이 ‘핵무력은 미국용’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허무하다.”(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북한은 북한대로 지난 5월부터 11차례나 단거리미사일을 쐈고, 이달에 들어서는 사정거리 2000㎞가 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도 시험발사하면서 ‘쌍중단’ 궤도를 이탈하려 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고, 미국이 전략자산을 한반도 주변에 집중시키던 2017년 못지않게 긴장이 고조될 우려도 있다.

 

북한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제재완화 외에 제도안전(안전보장) 문제를 들고나왔다. 미국이 북한의 제도안전을 불안하게 하고 발전을 방해하는 적대시 정책을 철회해야 비핵화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대시 정책의 첫번째 목록에 한·미 연합훈련이 올라 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발언은 ‘평화경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같은 한담(閑談)을 벗어나지 못한다. 바둑으로 치면 ‘급한 곳’ 대신 ‘큰 자리’만 두는 격이다.

 

정부의 태도에는 중재 역할의 효력을 상실하면서 한반도 정세의 종속변수로 전락한 데 따른 무력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북한이 최근 금강산에 지어진 남측 시설을 철거하고 ‘우리식’으로 새로 짓겠다고 한 데는 한국 정부가 ‘가만있지 말고 움직이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 남측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면 남북 화해협력은 꿈도 꾸지 말라는 통첩이기도 하다.

 

정부가 할 일은 자명해 보인다. 북·미 협상만 기다리며 좌고우면하지 말고 대북 제재와 제도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이끌어냄으로써 ‘쌍중단’ 원칙을 복원해야 한다. ‘대화를 하기 위해 무기를 내려놓자’는 것이니 명분도 확실하다. 11월 중순 열리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합의를 이끌어내거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문 대통령이 직접 ‘연합훈련 중단’ 방침을 천명하는 것도 방법이다. 비핵화와 별개로 재래식 군비통제와 긴장완화 등을 다루는 ‘남·북·미 군사협정’(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을 체결하는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

 

금강산관광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재개를 모색해야 한다. 금강산은 물론 개성에서 개별관광을 우선 시행하는 것으로 활로를 뚫어 나갈 필요가 있다. 우물쭈물하다간 남북관계가 아예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남북 접촉을 막는 유엔사의 월권에도 제동을 걸어야 한다. 몇 가지 원칙을 묶어 ‘문재인 독트린’을 내놓는 건 어떨까. 좀 더 과감해지지 않으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없다.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 자유왕래와 교역 문호개방을 담은 7·7선언(1988년)을 발표한 것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 발생한 지 8개월도 채 안됐을 때였다.

 

*2019년 10월3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원제는 '[경향의 눈] 남북관계, 무엇을 할 것인가' 입니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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