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15. 14:48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식 

미국이 코로나19 이후의 국제 질서를 미·중 신냉전 구도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원맨쇼가 아니다. 미국 백악관과 국방부가 지난 21일 의회에 제출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보고서는 미·중 갈등이 미·소 냉전기 이상으로 장기화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1979년 미·중관계 정상화 이후 40년간 중국의 발전이 미국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났다는 대목에서 미·중관계를 송두리째 부정하고픈 미국 집권세력의 인식이 드러난다. 굴기하는 중국을 냉전시대 ()의 장막안으로 되몰아 봉인하겠다는 기세다. 미국의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중국봉쇄 기조는 큰 변화가 없을 것 같다.

 

미국은 반중(反中) 대열에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인도 등을 세우겠다고 한다. 가장 시달릴 나라는 당연히 미·중 세력권의 경계에 놓인 한국이다. 미국과 동맹이지만 경제에서 중국 의존도가 큰 한국은 미·중 충돌 때마다 양자택일을 강요당할 것이다. 한국이 참가한 일대일로 사업도 미국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경제에서 중국 비중을 낮춘다 한들 지리적으로 이웃한 중국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충돌이 임계치를 넘어서면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 외교정책의 주요 목표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및 평화체제 구축이다. 그런데 북핵문제의 해결은 미·중 패권경쟁하에서는 더 요원해질 것이다. 지난 3년간 문재인 정부가 북·미 비핵화 협상을 위해 진력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외교 목표에 북핵문제가 들어 있는 한 우리 운명을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워지는 셈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 문 대통령은 올 초 북·미 협상과 별개로 남북협력을 증진시키겠다고 했다. 북핵과 남북평화를 분리하겠다는 결단이다. 통일부는 5·24 조치의 실효(失效)를 확인했고, 북한 사람을 만날 때 신고하지 않아도 되도록 법을 바꾸기로 했다. 전향적 조치들이지만, 이 참에 남북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규정하는 작업도 필요해 보인다.

 

남북은 1991년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다. 이 규정은 남북이 결국 하나가 돼야 한다는 이상을 담았을 뿐, 상대방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남북 쌍방이 별개 국가라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는 과정이 생략된 것은 남북문제의 과잉 정치화를 유발했다.

 

이런 지적이 타당하다면 이제 ‘1민족 2국가 체제를 인정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남북이 동·서독처럼 상호체제 인정, 내정 불간섭, 불가침 등을 담은 기본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종전선언도 미·중을 기다릴 것 없이 남북이 먼저 하면 된다. 조약에 이어 서로를 적대시하는 제도와 규정들을 철폐하면 남북의 갈라서기는 마무리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고 공존하게 되면, 한국의 운신의 폭도 넓어진다. 남북 간 충돌위험이 감소하면 미국과 방위비 분담금 때문에 옥신각신할 일도, 값비싼 첨단무기를 과잉구매해야 하는 부담도 줄어든다. 북한을 유격대 국가라고 비판하지만, 한국도 과도한 군비 탓에 사회보장 지출을 늘리기 힘든 비정상국가가 아닌가. 북한 지도자의 부재에 온 나라가 뒤집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물론, ‘한 민족이 두 나라가 되는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 탓에 저항감이 클 것이다. 하지만 별개 국가로 갈라섬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정념의 거품이 걷힌다면 교류협력에 대한 부담감도 줄어들 것이다. 통일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사실상의 통일로 나아갈 길이 열릴 수 있다. ·미 협상도 당분간은 당사자들에게 맡겨두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한 달 뒤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된다. 남북은 1949년부터 38선 일대에서 수천명의 남북군인이 중화기를 동원한 작은 전쟁을 치르며 전면전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2차 세계대전 후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된 오스트리아가 통일독립을 달성한 것과 대조적인 과정이다. 국제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지만, 결국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남북 내부의 동학(動學)이었다. 이는 거꾸로 한반도 평화도 남북 내부의 동학에 의해 상당 부분 달성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 동학은 서로의 실체를 쿨하게 인정하는 데서 탄력이 생길 것이다. 70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도 남북의 갈라서기는 필요하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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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5. 14:42

출처 에큐매니안 닷컴 

지난주 벌어진 일 중에서 총선 결과보다도 더 눈길을 끈 것은 국회에 제출된 2차 추가경정예산 내역이다.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국방비에서 9000억원을 삭감하기로 한 것이다. F-35A 스텔스 전투기, 해상작전헬기 같은 미국산 첨단무기 구매 예산을 깎겠다는 발표에 구약성서의 한 구절을 떠올린 이도 있었을 것 같다. “칼을 쳐서 보습(쟁기의 날)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미가서 43)

 

부활절인 지난 12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19로 텅 빈 바티칸 광장에서 강론했다. “전쟁은 더 이상 안됩니다. 무기 생산과 거래를 중단해야 합니다. 지금은 총이 아니라 빵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이 메시지가 나흘 뒤 군사력 밀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한반도에서 실현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부가 무기 구매 예산을 줄이기로 한 결정에는 여러 가지 배경과 사정이 있을 것이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몽니를 부리는 미국을 향한 대응 성격도 있을 법하다. 국방부가 삭감 방침에 괜찮다고 하는 걸 보면 애초 국방예산에 거품이 끼어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21세기의 유일한 냉전지대 한반도에서 총을 빵과 바꾸는이적(異跡)이 일어난 것만으로도 가슴 뛸 일이다. 어차피 F-35A 전투기는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하는 데는 뛰어난 전쟁신()’이지만, 바이러스와 싸우는 데는 무용지물 아닌가.

 

바이러스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냈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국경이 봉쇄되고 사람들이 활동을 줄이면서 대기오염이 가스실 수준이라는 인도 뉴델리의 하늘 색깔이 쪽빛으로 바뀌었다. 과학자들은 27개국에서 봉쇄 초기 2주 동안 지표면의 이산화질소(NO2) 농도가 평균 29% 감소했고, 초미세먼지(PM2.5)9% 줄어들었다고 분석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인적이 끊긴 해안도로를 바다사자들이 점령했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운하에 물고기 떼가 회귀했다. 인간들이 빼앗은 그들의 땅을 잠시나마 바이러스가 되돌려준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환경파괴를 멈추지 않는 한 인류도 절멸의 위기를 맞을 수 있음을 묵시(默示)한다. 삼림파괴로 숙주들과 인간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 바이러스 창궐 배경임은 알려진 대로다. 삼림파괴 추세가 지금대로라면 제2, 3의 팬데믹이 주기를 앞당겨 인류를 덮칠 것이다. 환경파괴에 따른 기후위기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치닫고 있음은 부연할 것도 없다.

 

전쟁은 환경에 대한 극단적인 테러다. 전쟁은 땅을 오염시키고 삼림을 파괴하고, 바다를 더럽힐 뿐 아니라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만들어낸다. 베트남전쟁에서 살포된 고엽제가 베트남 농토의 40%를 황무지로 만들었고, 밀림의 절반가량을 파괴했다. 코소보에서는 화학공장지대 폭격으로 유출된 기름과 암모니아가 강을 뒤덮었다. 콩고에서는 수천마리의 코끼리가 내전에 희생됐다. 이런 전쟁을 위해 세계가 지출하는 군사비는 30년 전의 2배로 늘었다.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 미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는 22일 현재 44805명에 달한다. 바이러스 창궐 두 달간의 희생자가 한국전쟁 3년간 미군 전사자 수(33686)를 넘어섰다. 국방비는 지속적으로 늘리면서도 보건의료와 복지 투자는 외면해온 미국이 자초한 현실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이런 가치 전도의 세상을 리셋(reset)’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세우지 않는다면 애프터 코로나는 인류 멸절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이 혼돈의 시기에 한국은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민주적인 방식으로 감염병 통제에 성공했다. 선거도 차질 없이 치러내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한국이 애프터 코로나시대의 질서와 규범을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할 자격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은 한반도와 세계적 차원에서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평화는 자연과 인간을 동시에 지키는 일이다. 우선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만드는 일, 즉 군비를 줄여 보건의료와 복지 부문에 돌리는 흐름을 한국이 선도해 갈 것을 희망한다. 한국은 방위력 개선비와 전력유지비 등에서 매년 5조원 이상을 절감할 여력이 있다(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고 한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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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5. 14:37

출처 연합뉴스 

한국은 개방형 통상국가다. 남북 분단과 전쟁이 없었다면 다른 형태의 발전 전략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1960년대 수출입국(立國)으로 방향을 정한 이후 수십년의 세월을 거치며 좋건 싫건 틀이 굳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주요국들과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과격한 형태의 경제협정을 체결하면서 시스템을 한껏 열어젖혔다.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세계화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올라탄 것이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이 고착화되고 보호무역주의가 대두하면서 이 전략에 물음표가 붙고 있다.

 

이런 한국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몇 겹의 충격을 받아야 하는 것은 개방형 통상국가로서 갖는 숙명이다. 통상국가는 물자와 사람이 자유롭게 오가야 기회가 생기지만, 접촉에 의해 확산되는 감염병은 이를 차단한다. 전 지구적으로 구축된 연결 회로를 타고 번지는 감염병은 한국엔 치명적인 도전이다.

 

감염병이 발생하면 대개의 정부는 입국제한이라는 수단부터 동원하게 마련이다. 시민들의 공포 확산을 막고 정권이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손쉬운 선택이지만, 감염병 확산을 일시 지연시킬 뿐 궁극적 대책이 될 수는 없다. 더구나 내수기반이 빈약하고 감염병 이후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개방형 통상국가에서 이런 선택을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가 개방성과 투명성을 유지하면서 감염병 확산을 막아야 하는 험로를 택한 것은 불가피했다. 발원지인 중국발 입국제한논란부터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지만 보수언론과 야당의 집요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개방원칙을 유지한 채 대대적 조기 검사·진료, 동선 추적 등 적극적 방역으로 불길을 잡아가고 있다. 코로나19의 본격 확산 두 달 만에 한국의 방역은 세계 각국이 상찬하는 롤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드라이브 스루선별진료 같은 궁즉통(窮則通)의 지혜도 세계로 확산됐다. 지난 15일 캐나다의 제안으로 열린 6개국 외교장관 전화협의는 한국식 방역모델을 전파하는 자리가 됐다.

 

하지만 돌파해야 할 난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실물경제는 수요·공급 양쪽에서 침체로 향하고 있다. 증시가 대폭락을 거듭하면서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의 복합위기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은 금융시장의 높은 개방성 탓에 대외 충격이 발생하면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리스크를 져야 한다. 외국 자본에는 현금인출기(ATM)나 다름없다. 독일과 프랑스가 국경통제에 나서는 등 각국이 참호를 파고 감염병과의 진지전에 들어갔다. 내수기반이 있는 나라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기동전을 생명으로 하는 통상국가 한국엔 지극히 불리하다. 코로나19를 한국이 먼저 이겨낸다고 해도 각국 간 시차를 감안하면 세계 경제의 회복에는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이다. 세계 경제가 U자형 회복을 하려면 3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엄혹한 세월을 견디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가까스로 코로나19가 물러가도 감염병은 주기적으로 닥쳐올 것이다. 사스(2003), 신종플루(2009), 메르스(2015)6년 간격이었지만 코로나195년 만에 찾아왔다. 2015년 지카바이러스가 삼림파괴로 숙주인 이집트숲모기가 사람과 접촉하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창궐했듯이 세계적인 환경파괴 추세를 고려하면 주기가 더 짧아질 가능성이 크다. 감염병뿐일까? 다음 위기는 기후위기로 인한 식량재앙이 될 수도 있다. 가뭄과 홍수, 슈퍼태풍, 산불과 폭염 등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재앙이 임계점을 넘어설 경우 농산물 수확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10년 러시아의 가뭄에 따른 밀 생산량 급감은 이듬해 중동의 민주화 시위라는 정치격변까지 몰고온 바 있다. 한국은 제조업 상품 수출을 위해 농업을 희생시킨 결과 곡물자급률이 23%에 불과하다. 이런저런 글로벌 충격이 닥칠 때마다 한국은 제1선에 서서 그 충격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코로나19의 태풍이 지나간 뒤 세상 풍경은 꽤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에 한국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성찰하고 반문해야 할 시기도 올 것이다. 세계화의 ()의 효과가 커져가는데도 개방형 통상국가라는 국가전략은 여전히 정답인가. 눈물을 머금고 세계화의 풍상(風霜)에 맞서 전력질주해야 하는 숙명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 내수를 키우고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쪽으로 경제시스템을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답을 내야 한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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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5. 14:33

일본인들은 ‘미즈기와(水際·물가) 대책’으로 불리는 일본 정부의 대응방침에 안심했을 것이다. 해안을 경계로 방어선을 쳐 코로나19의 상륙을 막겠다는 ‘쇄국(鎖國)작전’은 섬나라에 익숙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예전부터 이런 식으로 나라의 안전을 지키고 평화를 누려왔다. 그러나 이런 대처법은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예측불허의 리스크가 커지는 글로벌 시대엔 잘 먹히지 않는다. 더구나 경직된 거버넌스(통치구조)와 결합할 경우 ‘기능부전’에 빠지기 십상이다.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인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 대한 미즈기와 작전은 일본형 시스템의 난맥상을 여실히 드러냈다.
 

프린세스호에 대해 2주간 봉쇄조치를 내렸을 때 아베 신조 정부는 이 배가 거대한 ‘바이러스 배양접시’가 될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았다. 탑승자 3700명을 모두 하선시켜 전수조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아베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대책본부의 ‘매뉴얼’에는 빠졌다. 그렇게 한번 대책의 틀이 짜이다 보니 밀폐된 선내에서 감염이 급속히 번졌는데도 대응은 더뎠다. 초기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보니 대책의 틀을 바꾸지 않는 선에서 찔끔거리다 화를 키운 것이다. 일본 정부가 애초부터 나쁜 마음을 품었을 리는 없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사람의 안전’은 물가 저편에서 실종됐다. 크루즈선 환자는 ‘일본 내 감염자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얄팍한 생각도 일을 그르치게 했다. 아베 총리의 최대 관심사는 도쿄 올림픽이 영향받지 않도록 ‘일본 내 감염자 수’를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크루즈선 사태는 나라가 1000명이 넘는 자국민의 안전을 팽개치는 ‘기민(棄民)’사태로 확대됐다. 급기야 각국 정부가 비행기를 띄워 자국민 구출에 나서고, 올림픽을 5개월 앞둔 일본은 ‘방역 후진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그간 일본의 ‘미즈기와 대책’은 반드시 ‘기민’을 동반하곤 했다. 경제의 거품이 꺼진 뒤 2000년대 빈곤층이 급증하자 일본 정부는 생활보호 신청자가 급증하지 않도록 신청 단계에서 막았다. 노모의 치매를 돌보느라 파견사원 일을 그만둔 54세 남성이 생활보호를 받기 위해 2005년 7~8월 세차례나 교토시 복지사무소를 찾아갔으나 핀잔만 받았다. 막다른 처지에 몰린 남성이 노모를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비극을 불렀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1년도 채 안돼 일본 정부는 피폭 우려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을 귀환시키기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 후쿠시마현 전체를 방사선관리구역으로 지정하고 ‘무인지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은 묵살됐다. 거슬러 올라가면 1950년대 미나마타병 사태 때도 일본 정부는 줄곧 기업편을 들다가 10년이 지나서야 공장폐수가 원인임을 인정했다. 위기 때마다 정부는 방어선을 치고, 약자들을 그 너머에 내다 버렸던 것이다.
 

전후 경제성장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형 시스템과 매뉴얼은 정밀함에선 세계적 수준이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은 빈약했다. 1990년대 이후 글로벌 시대의 다양한 위험과 도전들을 감당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호황기의 풍요함에 가려진 시스템의 결함이 헤이세이(1989~2019년) 30년간 표면화되면서 일본은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물론 전환의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1980년대 말 여성 대표 도이 다카코가 국민적 인기를 얻었을 당시 사회당이 노동조합에 의존하던 체질에서 벗어나 젠더와 지역, 세대 등으로 영역을 넓혔더라면 일본 정치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탈원전’의 열망을 지렛대로, 일본을 안전·여성·생태의 가치를 중시하는 나라로 바꿔나갈 기회도 있었다. 이런 찬스들을 놓치면서 일본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감수성을 키우지 못한 채 ‘열화(劣化)’해갔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일본 내 여론조사에서 70%가 승객들을 하선시키지 말라고 응답했다는 점이다. 이번 사태를 승객의 ‘자기책임’으로 돌리는 풍조는 일본 정부의 ‘기민’적 태도가 사람들에 내면화됐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일본은 예전 우리가 알던 선진국에서 ‘위험사회’로 퇴행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한국 정부의 대응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6년 전 벌어진 세월호 참사가 그랬듯 ‘미즈기와’와 ‘기민’은 한국에서도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하루 2~3명꼴로 사람이 산재로 죽어가며, 외국인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 크루즈선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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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1. 21:41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진원지인 중국 우한 경향신문DB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공포는 기원후 5세기 아틸라가 이끈 훈족의 침략에서 비롯됐지만, 유럽이 세계패권을 틀어쥔 근대 이후에는 서양 주도의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띠어갔다. 19세기 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주창한 ‘황화론(黃禍論)’은 급부상하는 일본을 견제하고, 유럽의 중국 침략을 뒷받침하는 국제정치적 담론이었다. 
 

2차 세계대전 패전의 충격을 딛고 전후 고도성장을 일군 일본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미국 기업을 사들이던 1980년대 황화론은 다시 등장하며 플라자 합의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1985년 주요 5개국 장관들이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엔화가치를 올리고 달러가치를 떨어뜨리는 데 합의하면서, 일본 경제는 거품처럼 부풀다 꺼져버렸고, 황화론도 다시 잠잠해졌다.
 

황화론은 21세기 들어 중국 공포증, 즉 ‘시노포비아(sinophobia)’에 자리를 내줬다. 아시아 전체에 대한 견제에서 중국에 초점을 맞춘 어휘의 등장은 중국 패권에 대한 서양의 위협감을 대변한다. 서양이 노화하는 동안 굴기한 ‘청년중국’에 대한 시기심도 엿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중국은 일자리를 훔치고, 기술을 빼내기 위해 스파이 짓을 하는 적”이라며 시노포비아를 확산시켰다. 그의 집권 이후 미·중 무역전쟁,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에 대한 규제 등 미·중 갈등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물론 화웨이가 중국 정부의 ‘백도어’(인증되지 않은 사용자에 의해 컴퓨터의 기능이 무단 사용될 수 있도록 설치된 장치) 의혹을 벗지 못하는 등 중국이 빌미를 제공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중국이 서양 민주국가를 전복시키고, 미국이 중국의 식민지가 될 것이다” 같은 미국 정가의 담론들 역시 비이성적이다.
 

중국 우한에서 발현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리면서 ‘시노포비아’는 ‘혐중’(嫌中)으로도 의미가 확장됐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서방과 담론·체제 경쟁을 본격화하고 세계 질서를 주도하며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이루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노포비아’라는 적을 쓰러뜨려야 한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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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1. 21:38

청소년 환경운동가 툰베리 경향신문DB

지난해 12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25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는 인류 공동의 과제인 기후대응에 대한 국제사회의 합의체제가 얼마나 무력한 ‘거버넌스(지배구조)’인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총회의 목표는 2015년 채택된 파리협정을 이행하기 위한 17개 규칙을 완성하는 것이지만, 회기를 이틀 연장하고도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기후대응이 차일피일 늦어지는 가운데 세계 곳곳의 자연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희생돼가고, 자연은 기후이변으로 복수하고 있다. 세계정부 대신 국가들 간의 연맹체를 만들자는 칸트의 구상은 세계평화는 물론 기후대응에도 무력하기만 하다.
 

그런 점에서 기후 대응을 위한 강력한 주체가 금융계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수백조~수천조원을 굴리는 글로벌 거대 기관투자가들이 환경파괴, 탄소배출 관련 회사에 대한 투자 철회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마드리드 당사국 총회 다음날 골드만삭스는 성명을 내고 기후변화와 환경파괴 우려가 높은 사업에 대해 금융제공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북극유전 개발이나 알래스카 국립야생보호구역 개발 사업, 화력발전소 건설 사업 등을 투자철회 대상으로 올렸다.  
 

7조달러를 굴리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도 지난 15일 투자대상 기업 최고경영자들에게 보내는 2020년 연례서한에서 “총매출의 25% 이상을 석탄화력 생산·제조 활동에서 벌어들이는 기업의 자산(주식·채권)을 올해 중반까지 매각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움직임은 국부펀드 쪽이 앞서 있다. 노르웨이 정부연기금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열대림을 파괴하는 30여개 팜유회사에 대한 투자를 철회했다.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도 2017년부터 석탄화력발전 회사에 대한 신규투자를 중단했다. 수익성을 추구하는 민간 자산운용사들도 이 대열에 뛰어든 것은 기후가 현실의 리스크가 돼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엔의 기후대응에 대한 실망이 커지면서, 툰베리의 기후파업에 이어 금융회사들이 기업에 혈액(돈)의 공급을 중단하는 파업에 들어갔다. ‘돈주’들의 기후 행동주의가 지구를 구하는 유력한 수단이 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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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1. 21:35

미국의 표적공습으로 살해된 가셈 솔레이마니 경향신문DB

제3차 중동전쟁은 1967년 6월5일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이날 새벽부터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의 비행장을 공습해 이집트 공군전력의 80%를 괴멸시키며 하루 만에 제공권을 장악했다. 지상전에서도 이스라엘군은 파죽지세로 요르단에 있는 예루살렘,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했고, 골란고원에서 시리아군을 몰아냈다. 이스라엘로서는 두차례 중동전쟁 이후 아랍국가들의 보복 위협이 상존하는 가운데 “당신을 죽이러 오는 자가 있으니 일어나서 그를 먼저 죽이라”는 히브리 속담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동분쟁의 씨앗을 뿌린 셈이 됐다. 이 선제공격론은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미국 안보전략의 중심에 서게 된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2002년 국가안보전략에서 테러분자들의 위협에는 선제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며,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려는 불량국가들에 대해서도 자위권 행사 차원에서 선제공격을 취할 수 있다고 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은 이를 최초로 적용한 것이다.
 

유엔헌장은 제2조 4항에서 국가 간 무력사용 및 위협금지 원칙을 명시하면서도 제51조에 ‘무력공격이 발생한 경우’ 개별적 혹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하는 것은 주권국가의 고유한 권리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무력공격’의 범위를 실제 공격을 받았을 때로 한정하지 않고, ‘임박한 위협’을 받았을 때로 넓혀 선제공격까지도 자위권 행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하지만 ‘임박한 위협’에는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소지가 커 대체로 강대국에 유리하게 해석되게 마련이다.
 

미국의 가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 사령관 제거 작전을 둘러싸고 ‘임박한 위협’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미 하원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불러 솔레이마니 암살이 임박한 위협에 대한 자위권 행사에 해당하는지를 따지려 했으나 폼페이오 장관은 출석 요청을 거부했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임박한 위협’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성공한 공격이니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인가. 어떻게 귀결되건 이번 논란은 국제사회의 ‘자위권 행사’ 원칙이 현실 국제역학 앞에선 ‘허울’에 불과할 뿐임을 재차 환기시킨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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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1. 21:33

호주 산불 현장에서 구조된 코알라 경향신문DB

산불은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현상이지만 기후변화 탓에 지구가 감내할 범위를 넘어선 재앙이 돼버렸다.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올라가고 가뭄이 길어지면서 화재가 더 자주, 더 크게 발생하는 것이다. 호주 대륙에서 지난해 9월부터 다섯달째 지속되며 남한의 절반이 넘는 6만㎢를 태운 대형 산불은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기록적 고온이 원인이다.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2년 연속 발생한 대규모 산불도 시베리아 지역의 온난화로 눈이 평소보다 빨리 녹는 바람에 지면이 건조해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2011년 보고서에서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대형 자연화재들이 이산화탄소 대량 배출과 산림 파괴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기후변화를 부추기는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호주 산불 현장에서는 불꽃이 하늘로 치솟는 ‘화염 토네이도’ 현상과 마른 번개가 나타난다. 공기가 고온·건조해지면 상승하면서 회전하는데 이때 주변에 불꽃이 있으면 이를 빨아들이며 시뻘건 불기둥이 만들어진다. 대규모 화재로 발생한 뜨거운 열과 공기가 상승해 형성된 ‘산불 적란운’은 비는 뿌리지 않고 번개만 치면서 다른 곳에 새로 불을 놓는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호주의 하늘 사진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기후재앙으로 인한 아포칼립스(세계의 종말)가 이런 광경일지 모른다. 
 

인간들이야 그나마 덜 다쳤지만, 야생동물의 피해는 치명적이다. 호주에서만 서식하는 코알라는 이번 산불로 8000마리가 죽은 것으로 추정돼 ‘기능적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코알라는 호주 고유의 유칼립투스 삼림지에서만 서식하며 이 나뭇잎을 주로 먹고 산다. 동작이 느려 산불이 나도 나무에서 자다가 그대로 타죽는 일도 있다고 한다. 
 

기후재앙은 북극의 빙하를 녹이고, 남태평양 섬나라 키리바시와 인도양의 몰디브를 가라앉히고 있다. 폭염과 가뭄, 홍수와 태풍은 매년 극심해지고 있다. 매일 150~200종의 지구 생명체가 멸종(유엔환경계획)되고 있다. 아직도 기후변화라는 추상적인 위험 때문에 현재의 풍요로움을 포기하기 어렵다는 인간들에게 코알라가 경고한다. ‘다음 차례는 인간 당신들’이라고.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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