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9. 23:46

2019.08.07  

일본의 한반도 외교는 이율배반적이다. 한국에는 미래로 가자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과거를 추궁한다. 일본과 북한은 2002년 정상회담에서 과거사를 서로 인정하고 청산한 다음 국교수립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이 취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인 납치사실을 시인했고, 피해자 13명 중 8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은 ‘과거를 딛고 미래로 가자’는 북·일 평양선언의 취지가 무색하게 납치문제에 집착했고, 일본으로 일시 귀국한 생존자 5명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납치문제가 복잡하게 꼬인 이유는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의 처지에 설 모처럼의 기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나바시 요이치의 표현을 빌면 이런 처지의 바뀜에서 일본인들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듯 하다. ‘우리도 한국이나 중국만큼 당하고 살았다. 납치문제가 그 증거다.’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오후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기위해 입장하고 있다. 지난 2일 일본 화이트리스트 관련 긴급 국무회의 소집 후 사흘 만의 공식 회의 발언이다.

납치 피해자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을 입증하는 일본 정부의 공식기록만큼이나 찾기 어렵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부인하려 들면서 납치문제에는 집요하게 매달렸다. 일본은 자신의 이율배반을 이렇게 변명할지 모른다. 한국이 제기하는 과거사는 전전(戰前)이고 일본인 납치는 최근(1970~1980년대)의 일이니 엄연히 다르다고. 하지만 미수교 상태의 북·일 간에 ‘전전’ ‘전후’ 구분은 의미가 없다.

 

패전 이후 일본은 참회할 겨를도 없이 미국이 짜놓은 전후 질서에 몸을 맡겼다. 패전 직후 ‘1억 총참회’ 구호는 흐지부지됐고, 일본은 ‘1억 총망각’ 상태로 매진했다. 이국의 전장에서 돌아온 동네 아저씨와 형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가해자 일본’의 기억을 봉인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방사능’이 금기어가 된 걸 보면, 당시 일본의 ‘공기’가 허용하지 않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매년 ‘종전기념일’로 불리는 8월15일을 전후로 일본 방송들은 대체로 원폭 피해와 오키나와 지상전의 참상, 도쿄대공습의 기억 등을 극화한 드라마들을 방영한다. 일본 학교에서 역사수업의 진도는 러일전쟁에서 멈춘다. ‘피해자 일본’은 극적으로 기억되지만 ‘가해자 일본’은 ‘사실이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다’는 수준에서 공유된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처럼 ‘가해자 일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들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가해자로서의 성찰이 부족한 ‘겉핥기’ 역사교육을 받아왔으니 일본인들이 한국의 주장에 놀라거나 저항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일본은 미국이 부여한 전후 평화체제에 안주하며 동아시아 냉전체제를 남의 일로 여겨왔다. 목소리를 내야 할 진보세력은 냉전체제라는 ‘온실’에 갇혀 야성(野性)을 잃었다. 일본의 부조리와 위선이 도마에 오른 것은 한국의 민주화 이후다. 군사정권에 의해 봉인된 ‘가해자 일본’의 민낯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계기로 벗겨졌다. 물론 ‘고노담화’와 ‘무라야마담화’ 같은 반성이 있었고,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보상 노력도 있었지만 가해자 의식이 희박한 일본인들에게 ‘육화(肉化)’되지 못했다. 그 기간 보수우익은 일본군 위안부와 난징대학살을 축소·부인하면서 ‘아름다운 일본론(論)’으로 일본인들을 파고들었다. ‘아름다운 일본’론은 “우리 일본인들이 그런 잔인한 짓을 했을 리 없다”는 부인(否認)심리를 부풀렸다.

 

그렇다면 ‘납치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일본이 스스로의 잘못을 충분히 성찰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서 무수한 타 국민을 유린한 전쟁범죄의 천근 같은 무게감을 헤아려 보지 못했으니 수십명 납치에도 그토록 놀라 버리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최근 납치문제 진전이 없더라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겠다고 말을 바꿨지만, 일본 국민들이 ‘피해자’ 지위를 순순히 내놓을지도 의문이다. 과거사에 대한 교육과 반성을 생략한 대가가 일본 외교의 발목을 죄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시작된 한·일갈등의 주된 전장은 경제분야지만 역사전쟁도 격화될 것이다. 우리가 싸울 대상은 아베 정권이지 일본인이 아니다. 이 와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평화의 소녀상’ 전시에 나선 일본인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면 보다 치밀해질 필요가 있다. 영화 <주전장>에서 ‘위안부 20만명’ 문제를 추적한 미키 데자키 감독은 일본 시민단체 활동가의 입을 빌려 한국에 주의를 당부한다. ‘입증할 수 없다면, 숫자를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과거사 문제에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제기하다 한국에 호의를 품은 일본인들까지 등을 돌린 사례를 종종 봐왔다. 일본이 꼼짝 못하도록 주장을 벼리고 거품도 빼야 한다. 무딘 칼로 전장에 나가는 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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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9. 23:45

2019.07.10  

일본은 10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2009년 자민당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쥔 민주당 정권은 동아시아 중시 노선을 들고 나왔다. 요즘도 가끔씩 한국을 찾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한·중·일과 아세안, 인도, 호주, 뉴질랜드가 참가하는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내놨다. 간 나오토 총리는 2010년 한일병합 100년 사죄담화를 발표했다. “한국인들 뜻에 반해 이뤄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냈다. (중략)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심정을 표명한다.”

백여년전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부르짖으며 동아시아를 뛰쳐나갔던 일본이 이웃나라들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전후(戰後)질서가 균열하던 1990년대부터였다. 미·소냉전이 해체되고, ‘잠자던 거인’ 중국이 급부상하는 정세변화는 안보를 미국에 맡긴 채 경제에 매진하던 호시절의 종언을 뜻했다. 일본 경제를 휘감던 거품도 꺼졌다. 일본이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내놓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평양을 방문한 것은 탈냉전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었다. 민주당 정권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그 최대치였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의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공약은 미국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좌초했고, 2010년 센카쿠 열도 해역에서 벌어진 중국 어선과 일본 경비정의 충돌 사태 이후 동아시아 중시 노선은 파탄했다. 중국의 기세에 놀라 한국의 옷소매를 부여잡았지만 한국은 뿌리쳤다. 미국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대해 “아시아에서 냉전전략의 일부로 영토 분쟁의 소지들을 조약 곳곳에 심어놨다”고 했는데 그 덫이 정확히 일본을 겨냥한 셈이다. 민주당의 서투른 국정운영에 일본 국민은 리버럴(진보)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배외주의와 반지성주의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2011년 3·11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허울만 남은 전후체제를 물리적으로 해체해 버렸다. 아베 2기 체제는 일본에 만연한 이러한 열패감을 빨아들여 부활한 것이다.

 

일본이 좌충우돌하던 지난 10년간 한국 정부의 대응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달성하면서 일본에 기를 펴게 됐지만, 그에 걸맞게 관계를 재구축하고 대일외교의 원칙과 관행을 가다듬는 노력에는 소홀했다. 보수·진보 정권을 막론하고 일본에 협력적인 태도가 정치적으로 불리하다는 타산이 건전한 관계설정 노력을 방해하고, 풀어야 할 문제를 어정쩡하게 방치토록 했다. 박정희의 친일경력 때문에 선거에서 곤욕을 치른 박근혜는 일본을 3년간 피해다닌 끝에 한·일 위안부 졸속합의라는 덜컥수를 뒀다. 이명박의 2012년 독도 방문과 일왕 비판발언은 무신경·무원칙의 소산이다. 가만 놔둬도 한국땅인 독도가 졸지에 분쟁수역이 돼버렸고, 동일본대지진 때 위로성금까지 보낼 정도로 호조였던 양국관계에 생채기가 났다. 일본의 한국전문가는 “최근 한·일관계를 보면 한국이 일본을 무시하는 차원을 넘어 무신경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3일 저녁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규탄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정권 규탄 3차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일본의 경제보복 사태는 길게 보면 동아시아 전후 질서의 후과(後果)다. 한국은 해방을, 일본은 민주주의 체제를 제손으로 이루지 못했다. 남의 손으로 이뤄진 해방은 친일청산을 불가능하게 했으며, 그 회한과 정념(情念)이 일본에 과도하게 투사됐다. 패전국 일본은 미 점령군의 편의에 따라 천황제가 유지됐고, 과거청산과 민주개혁이 중도에 그친 것이 우경화의 토양이 됐다. 강경보수 아베 정권의 출현은 당시부터 예비된 셈이다. 민주당의 동아시아 노선을 뒤집어 친미노선으로 회귀한 아베 정권은 미국의 위임을 얻어 동아시아 질서를 주도하려 든다. 그 아베 정권이 지금 한국에 싸움을 걸어온 것이다.

 

수출규제에 독가스 전용 가능성까지 들먹이는 아베 정권의 적반하장이 괘씸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할 수는 없다. 이웃이 싫다고 이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대일외교를 좀 더 정밀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건전한 일본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도덕적 우위도 지킬 수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도 일본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대미·대중외교에 들인 에너지의 절반이라도 쏟았더라면 한·일관계가 이토록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대변인 시절 한·일국교 정상화에 찬성론을 폈다. 반대투쟁이 격렬하던 당시 그에게 ‘사쿠라’ ‘매국노’ 비난이 쏟아졌지만, 무조건 반대는 국익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소신을 지켰다. 그가 강조하던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 지금의 대일외교에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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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9. 23:45

2019.06.12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독일제국에 합병된 상태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패전국이 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 연합국의 분할통치를 받게 됐다. 38선 남북을 미·소가 분할 점령했던 한반도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연합국의 군사정부와 오스트리아 임시정부가 공존했다는 점이 달랐다. 패전 직전 노(老)정객 카를 레너가 친나치 계열을 뺀 모든 정파를 아우른 임시정부를 세운 것이다.

소련을 제외한 3개 연합국은 사회주의 정치가 레너가 주도하는 임시정부를 경계했으나 얼마 안 가 승인했고, 임시정부는 오스트리아 전역에 관할권을 행사하게 됐다. 그해 11월 총선에서 50%를 득표해 제1당이 된 보수계 국민당은 단독정부 수립 대신 사회당, 공산당과 ‘대연정’을 구성했다. 분단 위기를 딛고 통일독립을 이루려면 정치권이 기득권을 버리고 단합해야 한다는 시국인식이 좌우합작을 가능케 했다.

 

국민당은 사회주의 정책인 국유화를 수용했고, 사회당도 미국이 주도하는 마셜플랜 참여에 찬성하는 등 정치권은 실사구시의 태도로 국난을 타개해 나갔다. 1955년 주권을 회복하기 전까지의 10년간 오스트리아 정치권의 이념을 넘어선 결속과 협력은 지금 봐도 감탄스럽다. 해방 후 극심한 분열로 날을 지새우다 분단과 전쟁으로 치달았던 한반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약산 김원봉 위키피디아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계기로 약산 김원봉이 다시 논란의 핵으로 떠올랐지만 문 대통령이 말하려던 것은 ‘김원봉의 복권’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같은 ‘좌우합작’이었을 것이다.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중략) 광복군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습니다.” 문 대통령이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 기득권이나 사익이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마음이 애국”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말이라면 무조건 물어뜯고 보는 자유한국당과 보수세력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 없으니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때 만들려다 폐기된 국정교과서의 고교 한국사에 문 대통령의 추념사와 거의 같은 기술이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다(오마이뉴스 6월7일 보도).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로 결집한 것처럼 중국 관내의 무장세력도 한국광복군으로 결집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합류한 데 이어, 조선의용대 본부 병력이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고 김원봉은 부사령에 임명되었다.” 필진이 보수학자들 일색이던 국정교과서조차 김원봉의 ‘좌우합작’을 평가한 것이다. 1920~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에서 가장 혁혁한 업적을 세운 김원봉이 자신의 기반인 조선의용대를 해체하고 광복군에 합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원봉은 대의를 위해 기득권을 내려놨다.

 

귀국한 뒤 김원봉은 좌익계의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는 한편 중도세력의 좌우합작 운동을 지원하다 월북했다.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은 데 이어 여운형의 피살이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월북 뒤 북한 정권에 참여한 것은 알려진 대로이지만, 납북·월북된 중도파 정치인들과 함께 ‘중립화 평화 통일방안’을 내놓는 등 조선노동당과 다른 노선을 걸으려 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지만 해방 후 정치가들이 오스트리아처럼 좌우합작을 이뤘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좌우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정치인, 기득권 대신 통합을 선택한 정치인들이 정국을 주도하고 미·소와 협상을 벌여나갔더라면 적어도 수백만이 희생되는 전쟁의 참화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국사회가 굳이 71년 전 남한 땅을 등진 김원봉을 기억하고 불러내려는 것은, 그의 항일투쟁 때문만이 아니라 통합의 대의를 위해 기득권을 버릴 줄 아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김원봉은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를 좋아했고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에 두루 심취했다. 편협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독립에 필요하다면 누구와도 손잡는 실사구시형 전략가였다. “의열단원은 스포티한 멋진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했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 입었다.”(님 웨일스·김산 <아리랑>)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은 만주, 상하이, 일본을 종횡무진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공포에 몰아넣은 ‘어벤저스’이면서도 자신의 삶과 일상에 충실한 멋진 청년들이었다. 김원봉을 편협한 이념의 틀에 가둬선 그를 제대로 기억할 수 없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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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9. 23:43

2019.05.15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던 2002년 9월17일 동북아는 난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그해 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이자 “선제공격으로 정권을 교체시켜야 할 대상”으로 지목했다.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도 탄력을 잃었다. 그해 4월 평양에 특사로 간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특보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면서 소강상태이던 남북관계가 풀렸지만,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을 궁지에 몰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 미국의 맹방인 일본 총리의 방북은 ‘일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사정 탓인지 고이즈미 총리는 최대한 건조하게 회담에 임했다. 당일치기로 방문한 평양에서 그는 시종 표정을 풀지 않았고, 방북단은 오찬 대신 일본에서 챙겨온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사상 첫 북·일 정상회담은 납치문제라는 ‘블랙홀’이 모든 성과를 삼켜버리며 끝났다.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13명 중 8명이 이미 사망했다고 하자 일본 여론은 일거에 들끓었다. 식민지배 등 과거청산과 국교정상화 등 근본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미국의 사전 동의 없이 일을 벌인 후유증도 컸다. 북·일 정상회담, 남북 철도·도로연결 착공 합의 등 한반도 훈풍에 놀란 네오콘들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보름 뒤인 10월3일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해 고농축 우라늄(HEU) 의혹을 제기하면서 2차 북핵위기를 촉발했다. 악재가 겹치며 고이즈미의 시도는 불발했지만, 대북정책을 놓고 맞섰던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일본이 잠깐이나마 한국 외교의 자장(磁場) 안에 들어왔던 것은 동북아 외교 사상 진귀한 장면이었다.

 

당시 고이즈미 총리를 수행했던 아베 신조 총리가 최근 들어 북·일 정상회담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아베 총리는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이 결렬된 지난 2월2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한 뒤 “다음엔 내가 김정은 위원장과 마주하겠다”고 했다. 지난 6일 트럼프와의 전화통화 뒤 기자들에게 “김정은 위원장과 조건 없이 만나겠다”고 했다. 납치문제에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려놓은 것은 중대한 태도 변화다. 아베 총리의 핵심측근이자 납치문제담당상을 겸임하고 있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지난 9일 방미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과 회동한 것도 눈길을 끈다.

 

2002년 9월17일 북한을 처음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왼쪽)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에 앞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아베 총리의 대북 접근에 대해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물론 있다. 7월 총선을 앞둔 정치적 퍼포먼스라거나 한반도 주변국 중 일본만이 북한과 정상회담을 하지 못한 데 따른 ‘재팬패싱’ 비판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들이다. 일본에서는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는 ‘알리바이 만들기’라는 혹평이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한반도 정세에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두 번의 정상회담에도 북·미 협상이 교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한국 정부의 중재역량도 약화된 상황에서 일본은 북한에 매력적인 우회로가 될 수 있다. 아베는 트럼프와 ‘절친’이다. 고이즈미 방북은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아베는 트럼프와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아베 총리는 임기 중 실현하고 싶은 외교과제로 납치문제 해결과 북·일 수교를 꼽는다. “납치문제를 해결할 확신이 선다면 미국이 쳐놓은 가이드라인을 뛰어넘는 일도 불사할 것”이란 관측(일본의 한반도 전문가)이 나올 정도다. 1964년 이후 두번째로 치르는 내년 도쿄 하계올림픽의 성공을 위해서도 주변국과의 관계개선 욕구가 크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는 1970~1980년대에 집중됐다. 1984년생인 김정은 위원장은 직접 책임이 없는 만큼 선대의 과오를 매듭짓는 것이 큰 부담은 아닐 것이다. 북한은 ‘아베라는 우회로’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 복귀하려면 미국은 물론 일본과도 관계개선이 필요하다. 납치문제 해결은 그 필요조건이다.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는 “북·일 정상회담은 북한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했다.

 

17년 전 고이즈미 총리가 방북을 결심한 데는 김대중 대통령의 설득(2002년 3월 한·일 정상회담)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반면 지금의 한·일관계는 의사소통조차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가 주변국의 적극적인 참여로만 완성될 수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일관계가 나쁘다고 해서 일본의 대북접근을 부정적으로 볼 일은 결코 아니다. 북·일 두 지도자의 대담한 결단을 기대한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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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9. 23:41

2019.07.24  

지난 21일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은 아베 신조 총리가 아니라 배우 출신 정치인 야마모토 다로(45)일 것이다. 그가 결성한 정치단체 ‘레이와 신센구미’는 이번 선거에서 비례대표 2석을 획득했고, 득표율 2%를 넘기면서 정당요건을 충족했다. 비례 1번에 루게릭병 환자인 후나고 야스히코, 비례대표 2번으로 중증장애인 기무라 에이코를 당선시켰다. 비례 3번으로 입후보한 야마모토는 무려 99만표의 전국 최다 득표를 하고도 낙선했지만 ‘레이와 신센구미’가 정식 정당이 된 만큼 당대표 자격으로 정치활동을 이어가게 됐다.

 

야마모토 다로 레이와신센구미 대표(오른쪽)가 지난 21일 참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에 당선된 후나고 야스히코(왼쪽)와 함께 기뻐하고 있다. 도쿄 AFP연합뉴스 

선거기간 중 ‘레이와’는 태풍의 눈이었다. 편의점 점주, 싱글맘, 도쿄대 교수 등 다양한 인물들이 비례대표로 나서 빈곤·차별·탈원전·안보·경제 등 분야에서 아베 정권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자민당 독주와 야당의 지리멸렬이 계속되는 기성정치, 대기업만 득을 보는 아베노믹스에 염증난 유권자들은 야마모토의 도전에 열렬히 호응했다. 유세장에 매번 수천명이 몰렸고, 인터넷을 통한 모금이 며칠 만에 4억엔(43억원)을 넘어섰다.

 

16세에 연예계에 입문한 야마모토는 영화 <배틀로얄>과 NHK 대하드라마 <신센구미>에서 비중 있는 조역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가 궤도 이탈하게 된 계기는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였다. 사고 이후 트위터에 “테러국가를 거드는 일은 그만두겠다”는 글을 올린 게 화근이 돼 TV 드라마 출연이 취소됐고, 연예기획사도 그만둬야 했다. 방송·연예계의 주요 스폰서인 전력회사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이후 그는 탈원전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그 실현을 위해 정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2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으나 2013년 참의원 선거에서 도쿄 선거구에서 당선돼 파란을 일으켰다.

 

야마모토는 선거기간 중 장래가 촉망되는 타당 후보들의 지원유세를 펼치기도 했다. 다음 선거에 대비한 야권연대의 정지작업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는 “어느 시대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주변 눈치 안 보는(空氣を讀まない)’ 바보들”이라고 했다. 일본 정치에 모처럼 등장한 ‘바보’의 실험에 일본 시민들이 거는 기대감이 멀리서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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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9. 23:40

선거운동중인 아베 일본 총리 경향신문DB

일본 국회는 상원인 참의원(參議院)과 하원인 중의원(衆議院)으로 구성된다. 참의원은 근대화 초기인 메이지 시대 왕족, 화족 등으로 구성된 귀족원이 뿌리다. 일본 정부는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귀족원을 ‘특의원(特議院)’으로 바꾸고 보통선거가 아닌 방식으로 선출하려고 했으나 미군정청의 반대로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참의원으로 결정됐다.

 

참의원은 의원 임기가 6년이고, 3년마다 절반(121명)씩 교체되는 데다 중의원과 달리 내각총리가 해산할 수 없다. 또 중의원이 가결한 법안이나 조약 등을 참의원이 다시 심의하는 만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법안에 깊이 있는 검토가 이뤄진다. 참의원에서 부결된 법안이 중의원에서 재가결되려면 출석의원의 3분의 2 찬성이라는 장벽을 넘어야 한다. 이런 참의원의 권능과 특징은 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막고 안정을 꾀하는 완충작용을 해왔다.

 

단점도 물론 있다. 여당이 참의원에서는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국정운영에 어려움이 커진다. 2005년 중의원을 통과한 우정민영화 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중의원을 해산한 뒤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런 모험은 고이즈미 같은 승부사가 아니면 엄두를 내기 힘들다. 2009년 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당이 3년 만에 붕괴한 데는 참의원 여소야대로 개혁의 추진력을 상실했던 것과도 관련이 크다.

 

아베 신조 총리 역시 참의원과 악연이 있다. 집권 1기 때인 2007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후생노동성의 연금기록 누락 악재로 참패하면서 1년 만에 총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지난달 금융청이 “연금생활하는 고령부부들이 앞으로 30년간 더 살려면 2000만엔의 저축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면서 아베 내각이 발칵 뒤집혔다. 12년 전 총리사퇴의 불씨가 된 ‘연금 문제’가 선거 이슈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로 싸움을 걸어온 데는 이 메가톤급 국내이슈를 덮으려는 속셈도 작용했을 것이다. 오는 21일 참의원 선거에서 여당 자민당의 낙승이 예상된다는 일본 언론들 보도를 보면 ‘한·일갈등 블랙홀’에 연금이슈도 빨려 들어간 것이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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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9. 23:40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DMZ내 캠프 보니파스에서 한미 장병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DB

한국전쟁은 미국이 이기지 못한 ‘불명예스러운 전쟁’이자 ‘잊혀진 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 뒤 극동의 조그만 반도에서 벌어진 국지전인 데다, 베트남전처럼 전쟁을 성찰할 계기를 제공하지도 못했다. 전쟁 1년 만에 전선이 고착된 뒤에는 소모전을 되풀이하다 멈춰 드라마틱한 요소도 부족했다. 보통의 미국인들이 야전병원을 무대로 한 시트콤 <매시(MASH)>를 통해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저술가 시어도어 리드 페렌바크는 <이런 전쟁>(1963)에서 미국은 당시 며칠 혹은 몇달 안에 끝날 분쟁 정도로 여기고 참전했다가 수렁에 빠졌다고 분석했다. ‘준비 안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미국과 한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며 동맹이 됐고, 한때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됐던 한국은 자유진영의 최전선이 됐다. 비무장지대(DMZ)는 세계 최대의 군사력 밀집지역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연습이 벌어지는 현장이었다. 그러므로 ‘자유진영의 최고지도자’인 미국 대통령이 DMZ를 방문하는 것은 성지순례 같은 ‘의식(儀式)’이었다. 로널드 레이건(1983), 빌 클린턴(1993), 조지 W 부시(2002), 버락 오바마(2012)가 차례로 방문해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던졌다. 북한은 그때마다 “전쟁광신자” “전쟁행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지 2주 만에 방한한 부시 대통령은 DMZ 내 도라산역 연설에서 ‘악의 축’ 발언을 반복하려다 김대중 대통령의 만류로 그만뒀다고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토머스 허버드가 후일 회고했다.

 

오는 29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DMZ 방문이 초미의 관심사다. 일본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DMZ를 찾아 북한 비핵화 관련 메시지를 발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깜짝 만남을 가질 가능성을 보도하기도 했다. 두 정상이 친서를 주고받는 분위기로 미뤄 트럼프의 DMZ 방문 양상은 적어도 이전 대통령들과는 확연히 다를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방문이 한국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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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9. 23:40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기자 경향신문DB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한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에게 단서를 제공한 소식통은 ‘딥 스로트’로 불렸다. 우드워드 기자가 빨간 깃발이 있는 꽃화분을 자신의 아파트 발코니 뒤편으로 옮겨 ‘만나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면 딥 스로트는 그의 아파트로 배달되는 신문에 시계를 그려 넣어 응답했다. 30여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이 소식통은 미 연방수사국(FBI) 간부인 윌리엄 마크 펠트(1913~2008)였다.

 

‘소식통’들은 한국에서는 북한 관련 보도에 자주 등장한다. 대북소식통에는 국가정보원, 외교안보 부처 고위인사, 북한이탈주민, 대북사업가, 주한 외교관, 북한현지 주민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북한체제 특성상 다른 분야보다도 더 취재원 보호가 필요한 만큼 불가피하게 ‘대북소식통’으로 얼버무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역이용해 특정 목적하에 설익은 첩보를 흘리는 경우도 있고, 이를 그대로 받아쓰다가 오보를 내기도 한다. 대북소식통들은 남북관계가 악화될 때, 보수언론의 보도에 등장하는 일이 많다.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 전면 중단 방침을 밝힌 2016년 2월10일 통일부가 기자들에게 ‘북한, 군참모장 리영길 2월 초 전격 숙청’이라는 문건을 제공했다. 종파분자 및 세도·비리 혐의로 처형했다는 내용인데 통일부는 이를 대북소식통으로 인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의도는 뻔했다. 대북 비난 여론을 조장해 개성공단 중단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희석시키려는 ‘물타기’였다. 심지어 사실도 아니었다. 리영길은 석달 뒤인 5월9일 열린 조선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중앙군사위원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면서 ‘부활했다’.

 

미국 CNN방송이 처형설이 제기된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대표가 살아 있으며 현재 구금상태에서 조사받고 있다고 4일 보도했다. 앞서 조선중앙통신은 강제노역설이 나돌던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을 3일 공개했다. 북한이 김혁철을 처형했고, 김영철이 혁명화 조치를 당했다는 조선일보의 지난달 31일 기사가 가짜뉴스로 결론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사태가 한국언론의 대북보도 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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